- 1945년 오키나와 전쟁으로 원주민 3분의 1 사망
- 류큐 왕국 강제 합병…일본군, 집단자결 강요
- 日, 전쟁국가 변신 위해 새 미군기지 건설 강행
- 지사, 주민은 ‘기지 완전 철수’ 내걸고 정부와 ‘전쟁’
4월 초, 일본 오키나와(沖繩)현에는 기지 건설 반대 가두연설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곳곳에 나붙었다. 주민 직선으로 뽑힌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지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아베 정부를 상대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10년간 계속된 주민들의 반대에도 정부가 헌법에 보장된 자치권을 침해하고 북부 나고시 헤노코만(灣)에 미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공사는 잠정 중단됐다.
섬 20%가 미군기지
주민들은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완전 철수를 요구했지만, 양국은 북부 헤노코만 매립지에 새로운 기지 건설 계획을 밝혔다. 이에 기지 건설 반대 운동이 시작됐고, 급기야 오키나와현 지사가 매립 승인을 취소하며 소송을 벌이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문제는 지난 3월 31일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아베 총리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 직후 “기지 완공 시기를 당초 계획보다 2년(2025년) 늦추지만, 일본 정부가 전력을 다해 이전을 완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은 단순한 기지 이전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전체를 방어하는 미국의 공군기지 운용에 중국 변수가 급부상하면서 그 필요성이 더해졌다. 미국에는 중국의 공격적인 해양 진출을 견제할 최신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미국의 시각에선 오키나와 섬이 거대한 항공모함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동북아 주요 지역에서 군사적 상황이 벌어졌을 때 2시간 내 군사력 투입이 가능하다. 미국 정부가 주민들의 반대에도 오키나와 섬에 군사기지를 계속 유지하려는 이유다. 일본 정부도 평화헌법 개정을 목표로 ‘전쟁가능 국가’로 변신하며 미일동맹 위에 군사대국화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강력하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3만여 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다. 공격 임무를 맡은 해병대가 다수를 차지한다. 제주도의 1.5배 크기인 오키나와는 섬 전체 면적의 20%를 미군기지로 내줬다. 후텐마 기지 인근의 가데나 공군기지는 미국의 해외 공군기지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더 놀라운 것은 어마어마한 주둔 비용의 75%를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에서 확인되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수준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국가 간 외교가 오직 국익에 따라 좌우된다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극단적인 파국을 맞았을 때 미국은 과연 누구 편을 들까. 우문(愚問)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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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 떠도는 1만 조선인
4월 1일 오키나와의 유력지 ‘류큐신보(琉球新報)’는 1면 머리기사로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미군 심문 기록을 공개했다. 전쟁 직후 일본 군인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조선인 출신 병사였다. 도쿄제국대 학생이던 가네마야 요시오(한국명 ‘김영오’로 추정)는 전쟁 발발 엿새 전 부대 내 학대를 피해 탈주했고, 미군에게 생포됐다.
이 신문은 당시 일본군의 이민족(조선인, 오키나와인) 차별이 군 내부에 만연했고, 지금까지 구두 증언으로만 전해지던 것이 기록으로 처음 확인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당시 일본이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외친 것이 허구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기사에서 보듯, 미군은 물론 일본군도 전쟁 가해자였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공원 중앙광장에는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이 있다. 종전 50주년이던 1995년, 오키나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을 국적과 무관하게 새겨 넣었다. 23만8000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누구도 이것이 전쟁 희생자 모두라고 믿지 않는다. 조선인 희생자 1만 명 중 여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500명이 채 안 된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한 날, 200여 명의 일본 해상자위대 신입대원이 단체로 현장을 찾았다. 히로시마 출신의 한 여성 교관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는 해상자위대원으로 갓 입대한 젊은이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오키나와는 미국 식민지가 됐다. 모든 것이 파괴됐고 57만 주민 중 3분의 1이 죽었다. 남은 것은 굶주림과 질병뿐이었다. 토지 강제수용, 저항 주민 수용소 감금, 사유재산 몰수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식민의 고통에 난민이 겪는 상실감이 더해졌다. 미국은 대규모 군사시설을 만들었고 사용료도 지불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런 미군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비극에 이은 굴욕의 역사가 시작됐다.
슬픈 유리공예
‘류큐 왕국의 후예들에게 오키나와를 돌려달라’는 운동이 벌어졌지만,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1972년 미국은 미군기지의 반영구적 사용을 조건으로 오키나와를 일본에 넘겼다. 이후 오키나와는 40여 년을 다시 ‘일본국 일원’으로 존속하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본토와 달리 천황의 흔적이 없다. 혼슈(本州)나 규슈(九州)에서 천황 또는 황족이 옷깃만 스쳐가도 온갖 표석을 세우고 이를 자랑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천황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기 때문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1975년 황태자 시절에 이곳에서 화염병 테러를 당했고, 오키나와 출신 가수는 1990년 천황 초청행사에서 ‘천황의 통치는 천년만년 이어진다’는 내용의 국가(國歌)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
지금도 오키나와는 일본 정부를 향해 목청을 높이고 있다. 물론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미군 신기지 건설과 오키나와 역사 왜곡에 단호히 맞서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몸부림이다. 일본 정부 눈에 안 보이는 차별과 냉대는 ‘한 나라, 다른 민족’의 공존이 빚어낸 비극이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우익 정권이 집권을 이어가는 한 오키나와의 본질적 문제는 미래 지향적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류큐 왕국은 1429년 통일국가를 이룬 뒤 명나라, 일본, 조선 등과 중계무역을 하면서 번성했다. 450년 동안 왕조가 유지됐지만, 1879년 일본 귀속 이후 한 번도 자립과 자강의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패배와 절망의 역사를 썼다.
지정학적 요충지의 운명
오키나와를 통해 우리는 ‘지정학적 요충지’의 비극을 되새겨야 한다. 열강의 충돌 중간 지점에 끼어 있기만 하면 그저 중간에 위치할 뿐 균형자로서의 힘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각축 속에 원심력과 구심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국가적 에너지를 키워나가야 한다. 오키나와 평화기념 공원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일찍이 류큐의 조상은 평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역 관계를 맺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며 평화와 우호의 가교이다. 평화는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던 류큐 왕국은 후대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