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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격전장을 가다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정학적 요충지’ 오키나와의 분노

  • 전계완 | 시사평론가,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저자 jke68@daum.net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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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45년 오키나와 전쟁으로 원주민 3분의 1 사망
  • ● 류큐 왕국 강제 합병…일본군, 집단자결 강요
  • ● 日, 전쟁국가 변신 위해 새 미군기지 건설 강행
  • ● 지사, 주민은 ‘기지 완전 철수’ 내걸고 정부와 ‘전쟁’
“오나가 지사와 함께 신기지 건설을 막아내자!”

4월 초, 일본 오키나와(沖繩)현에는 기지 건설 반대 가두연설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곳곳에 나붙었다. 주민 직선으로 뽑힌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지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아베 정부를 상대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10년간 계속된 주민들의 반대에도 정부가 헌법에 보장된 자치권을 침해하고 북부 나고시 헤노코만(灣)에 미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공사는 잠정 중단됐다.



섬 20%가 미군기지

새 미군기지 건설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6년 미국과 일본은 섬 중앙에 위치해 소음, 성범죄, 주민 재산권 침해 등 온갖 민원이 끊이지 않던 오키나와 기노완시의 후텐마(普天間) 공군기지 이전을 발표했다. 발단은 1995년 9월 4일 미 해병대원 3명이 12세 여자 초등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었다. 주민들은 미 해병대원들을 처벌하라며 연일 항의시위를 벌였고, 이 때문에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완전 철수를 요구했지만, 양국은 북부 헤노코만 매립지에 새로운 기지 건설 계획을 밝혔다. 이에 기지 건설 반대 운동이 시작됐고, 급기야 오키나와현 지사가 매립 승인을 취소하며 소송을 벌이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문제는 지난 3월 31일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아베 총리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 직후 “기지 완공 시기를 당초 계획보다 2년(2025년) 늦추지만, 일본 정부가 전력을 다해 이전을 완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은 단순한 기지 이전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전체를 방어하는 미국의 공군기지 운용에 중국 변수가 급부상하면서 그 필요성이 더해졌다. 미국에는 중국의 공격적인 해양 진출을 견제할 최신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미국의 시각에선 오키나와 섬이 거대한 항공모함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동북아 주요 지역에서 군사적 상황이 벌어졌을 때 2시간 내 군사력 투입이 가능하다. 미국 정부가 주민들의 반대에도 오키나와 섬에 군사기지를 계속 유지하려는 이유다. 일본 정부도 평화헌법 개정을 목표로 ‘전쟁가능 국가’로 변신하며 미일동맹 위에 군사대국화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강력하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3만여 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다. 공격 임무를 맡은 해병대가 다수를 차지한다. 제주도의 1.5배 크기인 오키나와는 섬 전체 면적의 20%를 미군기지로 내줬다. 후텐마 기지 인근의 가데나 공군기지는 미국의 해외 공군기지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더 놀라운 것은 어마어마한 주둔 비용의 75%를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에서 확인되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수준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국가 간 외교가 오직 국익에 따라 좌우된다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극단적인 파국을 맞았을 때 미국은 과연 누구 편을 들까. 우문(愚問)일 뿐이다. 


3개월간 주민 12만 사망


주말 저녁, 오키나와 현청이 있는 나하(那覇)시의 국제거리엔 활기가 넘쳤다. 4월 초인데도 낮 기온이 25℃를 웃돌며 초여름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곳은 아열대 지역이라 매년 1월에 벚꽃 축제가 열린다. 1.6km의 직선 도로 양쪽으로 식당과 쇼핑시설이 빼곡하다. 일본인과 미군, 중국인 관광객이 섞여 관광 명소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국제거리의 별칭은 ‘기적의 1마일’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국과 일본이 벌인 최악의 오키나와 전쟁(1945년 4월 1일~6월 23일) 때 잿더미가 된 곳을 최단 기간에 재건했다고 붙인 이름이다. 전쟁 후 미국 통치를 받던 ‘기적의 1마일’에는 미국식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1953년부터 영업 중인 잭스 스테이크 하우스(Jack's steak house)와 아메리칸 스타일의 ‘스테이크하우스88’(스테키하우스 하치하치)은 오키나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소다. 토속음식점도 즐비하다. 미국 정통 문화와 오키나와 향토색이 국제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그런데 껍질을 한 겹 벗겨 속을 들여다보면 이내 비극적인 단면이 드러난다. 오키나와에선 1945년 전쟁 때 불과 3개월 만에 군인과 주민 등 20만 명 이상이 숨졌다. 오키나와 주민 3명 중 1명(12만여 명)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오키나와 전쟁 발발 70년 전으로 돌려보면 이곳은 일본이 아니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등거리 생존을 하던 류큐(琉球) 왕국이었다. 메이지유신(1868)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일본은 대만 침공(1874)으로 청나라를 제압한 뒤 류큐 왕국을 자국 영토로 만들고(1879) 오키나와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1945년 오키나와 전쟁은 엄격하게 말해 일본군과 미군이 류큐 왕국이던 오키나와 땅에서 벌인 최악의 지상전이었다. 미군이 쏜 포탄만 270만 발. 당시 주민 1명에게 472발의 포탄을 날린 셈이다. 오키나와 원주민의 눈으로 보면, 패권을 다투던 두 강대국이 남의 땅에서 전쟁을 치르고 자신들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떠넘긴 것이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하며 일본에 본토를 돌려줬지만 오키나와의 통치권은 계속 유지했다.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은 1972년이다. 그런 두 나라가 오키나와 전쟁 70년을 넘긴 지금 적국으로 싸우던 땅에서 ‘세계 제일의 동맹’을 과시하며 ‘사상 최강의 군사기지’를 함께 만들고 있다.     



죽음으로 평화 기원

나하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쯤 내려가면 미일의 최후 격전지 이토만(絲滿)시가 나온다. 이곳에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섬의 모양이 바뀔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이곳 자료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전쟁이 인간을 이토록 잔인하게 만든다는 생생한 체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전쟁을 긍정하고 미화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전쟁을 원망하며 오키나와를 반드시 평화로운 섬으로 만들어야 한다.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르고 이런 확고한 신념을 얻었다.’

자료관에는 ‘증언의 방’이 있다. 통계만으로는 실상을 제대로 알릴 수 없어 전쟁 체험 주민의 육성을 그대로 적고 영상으로 남겼다. 원통하게 죽은 이들을 대변하는 증거다.

증언에 따르면, 군과 민을 구분하지 않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수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으로 전투에 동원돼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일본군에게 학살되고 집단 자결을 강요받은 증언록도 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끔찍하다.

오키나와 사람들도 일본인이었지만, 본토 일본군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쟁에 필요한 도구로 인식했다. 일본군은 피란 간 주민에게 “미군에게 잡혀죽지 말고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죽으라”고 했다. 집단 자결을 강요한 것이다. 자식이 어머니를 돌로 때려죽이고, 형제자매를 찔러 죽이게 했다. 후퇴하던 일본군은 민간인이 숨어 있던 동굴로 들어갔는데, 미군에게 들킬 것을 우려해 세 살 이하 어린이를 모두 죽였다. 젖먹이의 목을 조르거나 주사를 놔 죽였다.

오키나와 말을 하는 사람은 ‘미군 첩자’라며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집단 학살에 가담한 일본군은 죽에 청산가리를 타서 주민들을 죽였고, 동굴로 몸을 피한 주민들은 동굴 속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거나 바깥에서 쏘아대는 미군의 박격포에 무방비로 죽어갔다.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상황에서 전쟁의 부조리와 잔혹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 이곳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지옥의 전쟁터’라 부른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도 집단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군대 징집, 비행장 건설, 탄약 운반 등으로 1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동원됐다. 위안부로 끌려온 1000여 명의 조선 여성 중 살아서 돌아갔다는 기록은 4명에 불과하다. 전쟁 막바지에 조선인이 일본군에게 간첩으로 몰려 학살당했다는 증언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오키나와에서 죽은 조선인만 1만 명이 넘는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군을 제외한 모든 이를 적으로 간주하고 살해했다. 오직 미군의 본토 상륙을 지연시키기 위해 천황을 내세우며 모두를 총알받이로 내몬 것이다.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에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갖고 온 돌을 원형탑으로 쌓았고, 제단 앞에는 한국으로 향하는 화살표의 표석이 억울한 넋들을 기린다.


구천 떠도는 1만 조선인

‘조선 출신 일본병사가 부대 내 학대를 피해 탈주’.

4월 1일 오키나와의 유력지 ‘류큐신보(琉球新報)’는 1면 머리기사로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미군 심문 기록을 공개했다. 전쟁 직후 일본 군인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조선인 출신 병사였다. 도쿄제국대 학생이던 가네마야 요시오(한국명 ‘김영오’로 추정)는 전쟁 발발 엿새 전 부대 내 학대를 피해 탈주했고, 미군에게 생포됐다.

이 신문은 당시 일본군의 이민족(조선인, 오키나와인) 차별이 군 내부에 만연했고, 지금까지 구두 증언으로만 전해지던 것이 기록으로 처음 확인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당시 일본이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외친 것이 허구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기사에서 보듯, 미군은 물론 일본군도 전쟁 가해자였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공원 중앙광장에는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이 있다. 종전 50주년이던 1995년, 오키나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을 국적과 무관하게 새겨 넣었다. 23만8000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누구도 이것이 전쟁 희생자 모두라고 믿지 않는다. 조선인 희생자 1만 명 중 여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500명이 채 안 된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한 날, 200여 명의 일본 해상자위대 신입대원이 단체로 현장을 찾았다. 히로시마 출신의 한 여성 교관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는 해상자위대원으로 갓 입대한 젊은이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오키나와는 미국 식민지가 됐다. 모든 것이 파괴됐고 57만 주민 중 3분의 1이 죽었다. 남은 것은 굶주림과 질병뿐이었다. 토지 강제수용, 저항 주민 수용소 감금, 사유재산 몰수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식민의 고통에 난민이 겪는 상실감이 더해졌다. 미국은 대규모 군사시설을 만들었고 사용료도 지불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런 미군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비극에 이은 굴욕의 역사가 시작됐다.  



슬픈 유리공예

유리공예가 대표적이다. 별다른 지하자원이 없는 이 땅에서 주민들은 미군이 버린 콜라병, 맥주병을 모으고 이를 녹여 컵이나 그릇을 만들었다. 이를 미군과 관광객들에게 팔았다. 전통주 아와모리(泡盛)의 화려한 술잔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류큐 왕국의 후예들에게 오키나와를 돌려달라’는 운동이 벌어졌지만,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1972년 미국은 미군기지의 반영구적 사용을 조건으로 오키나와를 일본에 넘겼다. 이후 오키나와는 40여 년을 다시 ‘일본국 일원’으로 존속하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본토와 달리 천황의 흔적이 없다. 혼슈(本州)나 규슈(九州)에서 천황 또는 황족이 옷깃만 스쳐가도 온갖 표석을 세우고 이를 자랑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천황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기 때문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1975년 황태자 시절에 이곳에서 화염병 테러를 당했고, 오키나와 출신 가수는 1990년 천황 초청행사에서 ‘천황의 통치는 천년만년 이어진다’는 내용의 국가(國歌)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  

지금도 오키나와는 일본 정부를 향해 목청을 높이고 있다. 물론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미군 신기지 건설과 오키나와 역사 왜곡에 단호히 맞서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몸부림이다. 일본 정부 눈에 안 보이는 차별과 냉대는 ‘한 나라, 다른 민족’의 공존이 빚어낸 비극이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우익 정권이 집권을 이어가는 한 오키나와의 본질적 문제는 미래 지향적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류큐 왕국은 1429년 통일국가를 이룬 뒤 명나라, 일본, 조선 등과 중계무역을 하면서 번성했다. 450년 동안 왕조가 유지됐지만, 1879년 일본 귀속 이후 한 번도 자립과 자강의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패배와 절망의 역사를 썼다.



지정학적 요충지의 운명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평화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의 평화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하는 극악무도한 행위인 전쟁을 겪지 않는 것이 이들에겐 진정한 평화다. 침탈의 역사, 식민의 역사, 죽음의 역사에서 이들에게 꼭 필요한 평화는 살육만은 피하는 최소의 평화다. 오키나와의 이런 목소리는 거대한 힘이 작용하는 국제사회에서는 한낱 메아리일 뿐이다. 동북아시아엔 강대국 간 충돌의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국가 간 군비 경쟁은 한계선을 넘어섰다.

오키나와를 통해 우리는 ‘지정학적 요충지’의 비극을 되새겨야 한다. 열강의 충돌 중간 지점에 끼어 있기만 하면 그저 중간에 위치할 뿐 균형자로서의 힘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각축 속에 원심력과 구심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국가적 에너지를 키워나가야 한다. 오키나와 평화기념 공원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일찍이 류큐의 조상은 평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역 관계를 맺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며 평화와 우호의 가교이다. 평화는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던 류큐 왕국은 후대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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