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특집 | 나홀로 시대 살아가기

떠나라, 장터에서 향하라, 바람 찬 광야로

베스트셀러 트렌드, 孤獨

  • 이주향 | 수원대 인문대 교수·철학

    입력2016-05-02 10:48:27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고독하다는 건, 현대인이 고독하다는 건 혼자 있고 싶다는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겠다. 촘촘하게 잘 짜여 있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굴러가지만, 생각을 허용치 않을 정도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감옥 같은 일상에서, 그 삶을 물들이고 있는 경쟁 혹은 싸움에서, 질시 혹은 분노로 가득한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그런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위축돼 있는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 진짜 고독이 필요하겠다. 당신은 진짜 고독의 힘을 아는가. 로드 매퀸이 읊조리듯 부른 노래 중에 ‘고독은 나의 집’이 있다. “고독은 나의 집,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네….” 노래를 듣다 보면 고독으로 힘이 붙은 음유시인의 향기가 난다. 고독의 집에서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힘을 얻고, 인연을 긍정하는 힘을 얻은 자의 그리움 같은 것!

    그렇게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 ‘나’를 만나는 시간으로 힘이 붙은 사람은 고독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고독하고 싶다고 투정하는 건 고독할 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함께 살기 싫다는 것이고, 상처받았다는 것이다.



    현대인, 도망가고 싶은 未生

    현대인은 상처가 많아서 의외로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내가 아는 것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아무래도 고단한 세상살이 때문 같다. “공부 좀 해라…” “엄마 친구 딸은…” “그렇게 놀다간…” “점수가 이게 뭐냐…” 이렇게 우리는 어릴 적부터 숱하게 비교당하고, 평가당했다. 그렇게 ‘지적질’당하는 사이 상처 입은 자존감이 회복될 틈도 없이 약육강식의 세상으로 내던져져 열정만큼 다치고 꿈만큼 짓밟히고 나면, 남는 것은 후회와 체념, 쌓이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이다. 게다가 엄청난 성공을 일군 또래의 인생들을 보고 또 보다 보면 힘이 쭉 빠진다. 이름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평범한 ‘나’의 인생이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평생 고용이 사라진 시대 아닌가. 3포 세대, 7포 세대를 거쳐 마침내 n포 세대에 이른 시대의 핵심은 ‘미생(未生)’이다. 기업은 미생으로 굴러가면서 얄밉게도 미생을 완생으로 만들어주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그런 시대에 미생으로 살다 보면 밟히게 돼 있다. 내가 속한 조직은 내 꿈을 실현할 장이 아니라 내 의욕을 꺾고 내 길을 막고 서 있는 장애물이다. 그러니 도망가고 싶다, 차라리 혼자 있고 싶다는 노래가 일상의 독백이 된 것이다.  

    그럼 점에서 현대는 다이달로스의 미궁이다. 기술의 ‘끝판왕’이긴 하나 숨이 막히고, 스스로 완벽을 주장하는 만큼 인간적이지도 자연적이지도 않은 위압적인 구조다. 빠져나올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생존의 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 미생들에게는 그만큼 위협적이어서 그렇게 목숨 부지하고 사는 것도 다행이라 믿게 만드는 이상한 틀이다.

    현대의 갑은 그 미궁의 염라대왕 격인 미노타우로스며, 현대의 을은 그 미궁에 갇힌 제물이다. 그러니 미궁 속 미노타우로스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사람의 고독은 고독이라기보다 두려움 혹은 막막함이고, 미노타우로스의 고독은 고립이겠다.

    문제가 있는 곳엔 답이 있다. 문제에 짓눌려 답을 찾지 못할 뿐. 이 미궁을 벗어나야 하는 우리 속에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풀며 스스로 미궁으로 걸어 들어온 영웅 테세우스가 있다. 무엇이 테세우스가 쥔 아리아드네의 실일까. 나는 그 실마리가 ‘고독’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미움이라는 놈이 찾아와 분노의 불을 지피며 당신을 고통의 화택(火宅)으로 만들 때, 물이 끓듯 화가 끓고 기름이 끓듯 속이 들끓을 때 어떻게 하는가. 불편하고 역겨운 사람과 상황을 그저 꾹, 참고 견디는가, 아니면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하며 맞서 싸우는가.



    내가 나를 대면할 때

    나는 혼자만의 공간으로, 나만의 동굴로, 침묵으로 도망간다.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만나면 만날수록 오해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불신만 부풀어 오른다. 만나서 풀리지 않을 때, 만날수록 얽히기만 할 때는 ‘대범’을 가장하고 만나는 것보다는 그릇의 작음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것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대와 평판으로부터, 윤리와 의무로부터, 사람과 소문으로부터, 심지어 사랑으로부터도. 완전히 혼자가 돼 마침내 내가 나를 대면할 수밖에 없는 시간에 도달할 때까지. 그 시간을 견디기는 쉽지 않다. 그 고독의 시간은 홀로 코카서스 산 절벽을 견디는 프로메테우스의 시간이다.



    제우스의 벼락에서, 혹은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씨를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죄로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 절벽에 묶였다.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죄를 물은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심연이 아득한 절체절명의 절벽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되고, 그런 그에게 제우스의 독수리가 날아와 그의 간을 겨냥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뜯긴다. 하루 종일 뜯긴 간은 밤새 다시 살아나고, 싱싱해진 간은 다음 날 또 독수리의 먹이가 된다. 프로메테우스는 3000년을 그렇게 지냈단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아니라 3000년 동안의 고독이다.

    고대 예언자들은 짐승들의 간을 보고 점을 쳤다. 모두모두 연결돼 있는 세상에서 공동체에,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를 알리는 징조가 간 속에 있었다. 그만큼 간은 영혼의 장기였다. 그 간을 내준다는 것은 생명을 내준다는 것이겠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자기를 던져 불을 전한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아는 자’라는 뜻이다. 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인지 몰랐을 리 없다. 그 대가가 3000년 동안의 고독이었으니. 그럼에도 그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에게 불을 전한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일까.    

    프로메테우스는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자기와 닮은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고 알고,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였다는 뜻이겠다.  인간 대부분은 자신을 보지 않고 자기 바깥 세상만 본다. 바깥 세상에 끌려만 다니니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일상이고,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않으니 자존감이 생길 리 없다.



    한탄하지도, 탓하지도 않는다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불이었다. 생명의 불이었다. 불은 생명이었다. 신화를 사랑하는 독일 시인 구스타프 슈바브가 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땅에 하늘의 씨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그 하늘의 씨를 보살피기 위해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의 불씨를 훔쳐 인간에게 주고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코카서스 산의 절벽을 고독하게 견뎠다.

    사랑하는 자는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다. 독수리에게 매일 당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독수리에게 쪼이고 먹힌 간이 매일 밤 부활해 그에게 힘을 준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밤, 그의 고독이고 고독의 힘이다. 자기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빌지 않고 구걸하지 않고 제우스를 탓하지도 않는다. 그런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지도 않는다.

    남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한순간, 어느 한 시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남 탓하고 비난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성격이 된 사람들이 있다. 제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에 대한 미련과 억울함이 그를 휘어감고 있는 것이다. 분노와 미련에 시달리는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한탄 아니면 남 탓을 하는 것이다.

    고독할 줄 모르는 그는 외로움에도 시달린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그 사람에게 기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눅 든 하인·하녀들이거나 폭탄 같은 그와 싸우지도 못하고 그를 버리지 못하는 착한 가족들밖에 없다. 문제는 그가 그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프로메테우스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한탄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는다. 고독이 ‘나’의 집인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시선 위에 세우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줄 알지만,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애석해하지 않으며 자기 길을 갈 줄 안다. 남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 존중하고 축복해줄 줄 알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존재 자체를 사랑할 줄 알고 축복할 줄 안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니체는 델포이 격언의 “너 자신을 알라”를 들어 그리스인들의 가장 큰 긍지는 자기 자신의 탐색과 탐구라고 했다. 니체가 안타까워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탐구하고 탐색하기 위해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권한 것이 바로 ‘고독’이다.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독파리떼에 물려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달아나라.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너는 하찮은 자들과 가엾은 자들을 너무 가까이에 두고 있다. 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앙갚음에서 벗어나라! 저들이 네게 일삼는 것은 앙갚음뿐이니.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 파리채가 되는 것, 그것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다!



    고독한 광야로의 산책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은 광야다. 광야는 시끌벅적한 곳이 아니라 사나운 곳이고 위험한 곳이며 무엇보다 고독한 곳이다. 고독한 광야와 대비되는 시끌벅적한 곳은 장터다. 니체에 따르면 장터는 “성대하게 차려입고 요란을 떠는 어릿광대로 가득”한 곳이다. 그 장터에서는 ‘자기성찰’이라는 위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창조하려 하는 자는 거센 바람이 부는 광야의 고독 속으로 홀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을 아끼지 않고 실적이 미미하면 폐기처분하는 사회,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사회, 모두들 돈 버는 기계로 내모나 제대로 돈도 벌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겐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니체의 광야, 성자의 동굴이 필요하다.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울고 싶으면 울어야 한다.

    고독이  ‘나’의 집이 된 사람, 고독 속에서 편안해진 사람은 누군가에게 자기 삶을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자기 존재가, 누군가가 자리를 허락해줘야 자리가 생기는 하인이나 하녀가 아님을 안다. 나는 나이며 나인 채로 좋은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굳이 의식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는 안다. 늘 자기 문제로 골똘한 그들도 의외로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그런 그들이 한 마디, 두 마디 한 것을 마음에 품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겠다.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굴러가는 세상을 극복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단순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화장 지우고 넥타이 푸는 시간을 늘리고, 원하는 것을 찾아가는 시간을 늘리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시간을 늘려보자.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시간,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은 공간을 허락해야 한다. 내 답답함을, 내 외로움을, 내 상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삶의 실타래를 엉망으로 만들지 않도록! 그 실타래야말로 미궁에서 살아나올 수 있는 실마리다.

    시간이 없다고 한다. 우선 TV 보는 시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반으로, 그 이상으로 줄여보자. 의외로 ‘나’를 위한 시간이 있다. 무엇보다도 산책할 시간을 만들어보자. 가까운 공원을 걸어도 좋고 이방인의 심정으로 골목길을 걸어도 좋다. 산책이 좋은 것은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을 만드는 징검다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생각이 많다. 생각에 끌려다니고, 논리에 끌려다니고, 편견에 끌려다니는 것이 지성인 줄 안다. 아니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건 자기 편견의 감옥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그 머리를 비워야 몸에 힘이 생기고 머리를 비울 줄 알아야 머리도 힘이 생긴다. 

    이 주 향


    ● 1964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이화여대 석·박사(철학)
    ● 한국니체학회 이사, 동아일보 2기 독자위원
    ● 現 수원대 인문대 철학교수
    ● 저서 : ‘사랑이, 내게로 왔다’ ‘이주향의 치유하는 책읽기’ ‘현대 언어·심리철학의 쟁점들’ 등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