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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종친 vs 대신 “왕의 친척이라도 법 앞에선 평등” || 병자호란 還鄕女 문제 “백성을 지키는 것은 국가 책임”

  • 이규옥|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강성득|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종친 vs 대신 “왕의 친척이라도 법 앞에선 평등” || 병자호란 還鄕女 문제 “백성을 지키는 것은 국가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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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췌해 사초를 작성했다.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종친 vs 대신

“왕의 친척이라도 법 앞에선 평등”
이규옥|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조선 시대에 임금의 친족인 종친과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대신들은 어떤 관계였을까. 조선 초기에는 왕자들 간 참혹한 왕위 쟁탈전을 겪은 터라 세조 때부터 종친들의 정치 참여를 아예 금지해버렸다. 그러나 종친은 임금의 친척으로서 명예와 부를 누렸고, 정치 상황에 따라 왕위에 오를 수도 있는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적 야망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종친과 실질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대신 사이에는 서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갈등이 늘 있어 왔다.

영조 9년(1733), 종친과 대신 사이에 이런 갈등이 불거졌다. 해흥군 이강(李橿)은 선조의 아들인 영성군의 증손자로, 종친 가운데 비교적 품계가 낮은 종2품이었다. 그런 그가 난데없이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이 모여 회의하는 빈청에 나타나 턱하니 대신 자리에 앉은 것이다.

이에 좌의정 서명균은 하리(下吏)가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 탓이라 하고 종친부 서리(書吏)를 잡아다 가두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흥군의 아우 해춘군이 종친을 모독했다며 의정부 서리를 잡아다 가두었다. 이렇게 옥신각신 한차례 힘겨루기가 끝난 뒤, 이번에는 조정에서 영조와 신하들 간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졌다.



영조와 신하들의 舌戰

영의정 심수현
: 종친으로서 대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빈청에 들어가고, 게다가 의정부의 서리를 잡아 가두었으니 잘못된 일입니다.
영조 : 왕자와 대군은 대신과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1품 종친은 대신과 대등한 예를 행한다. 빈청은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빈청에 앉아 술을 하사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종친부는 모든 관사의 우두머리여서 전에는 왕자나 대군이 아니면 제조(提調·우두머리가 아닌 사람이 관아의 일을 다스리게 하던 벼슬)가 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촌수가 먼 종친이 제조로 있기 때문에 신하들이 얕보고 있다. 해흥군이 빈청에 들어와 대신의 자리에 앉은 것은 참으로 분별없는 행동이기는 하다. 그렇긴 하나 청지기를 가두는 것이라면 모를까 종친부 서리를 곧바로 가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좌의정 서명균 : 종친부도 중요한 곳이기는 하지만 의정부는 체통이 더욱 각별하니 결코 의정부 서리를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영조 : 그렇지 않다. 근래 종친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좌의정 서명균 : 더구나 관직을 가진 종친이 혹시라도 일을 소홀히 하면 의정부에서 단속해야 합니다.
영조 : 그렇지 않다. 종친부는 의정부가 간섭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영조는 ‘경국대전’에도 종친부는 의정부보다 우위에 있는 관사로, 명목상으로는 모든 관사의 우두머리인데, 의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 조정 신하들은 아무리 종친부라 하더라도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국가의 질서가 바로잡힌다고 생각한 것이다. 왕실의 존엄이 먼저다, 나라의 질서가 먼저다 하는 임금과 신하 사이의 살얼음판 같은 대화는 더욱 날선 대립으로 이어졌다.
영성군 박문수 : 대신을 공경하는 것은 나라의 체통을 높이는 것입니다. 종친부가 존중해야 할 곳이기는 하지만, 왕자와 대군도 아닌 2품의 종친이 어떻게 의정부의 서리를 직접 가둘 수 있습니까. 신은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영조 : (진노하여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박문수를 엄하게 추고(推考)하라. 너희들은 내가 왕자로 있다가 보위에 올랐다고 우습게 여겨서 종친부를 업신여기는 것이냐.



영조가 책상을 치며 오열하니,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허둥지둥 물러났다.


후궁 소생이란 열등감

영조는 후궁 소생의 왕자로서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종친부의 일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는 조정 신하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처럼 느꼈던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박문수가 개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하자 눌러뒀던 영조의 감정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이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조정의 권위가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해져 2품의 먼 종친이 직접 의정부 서리를 가두었으니, 박문수가 말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화낼 일도 아닌 말에 격노하여 임금을 업신여겼다고 책망하였다. 아, 대신을 존중하는 것은 임금을 존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임금이 이렇게 말을 잘못하였는데도 이 자리에 들어온 신하들이 감히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으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허물이 없도록 인도하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화를 낸 임금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 신하들이 문제라고 했다. 언뜻 보면 신하들을 나무라는 것 같으나, 실은 임금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정의감 넘치는 젊은 사관의 생각은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나 경험 많은 신하들이 임금의 격노에 대처하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 임금의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때는 잠시 피했다가 감정이 좀 가라앉은 뒤 차근차근 따지려고 했던 것 같다. 이틀 뒤 경연 석상에서 신하들이 이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검토관 조상명 : 그저께 작은 일로 인해 갑자기 뜻밖의 하교를 내리셔서 신하들이 허둥지둥 물러났으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하시면 말을 가리지 않고 하시는 경우가 많아 신은 항상 개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말씀하실 때에는 온화하고 평온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영조 : 나는 이 일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른바 종친을 제재한다는 것은 종친에게 권세가 있을 때 하는 말이다. 세조 이래 종친들은 권세 없이 종친부에만 의지하고 있다. 종친들의 힘이 요즘처럼 약했던 적이 없으니 권세를 휘두른들 누가 받아주겠는가? 박문수는 비변사 당상으로 입시해서는 자기 직무가 아닌 일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이 이미 상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화가 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김동필 : 여러 신하들이 아뢴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런데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엄한 하교를 내리셨으니, 이는 성상의 함양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영조 : 경자년(1720) 경종 즉위년 대상(大喪) 뒤에 내가 인도하는 자 없이 대궐을 지나다가 대신을 만났는데, 대신이 앞에 있으면서 끝내 길을 비키지 않아 내가 뒤따라가지 않으려고 피해서 다른 길로 간 적이 있다. 내가 왕자의 신분인데도 이와 같았다. 지금 나라에 세자가 없고 종실은 힘이 약해 권세를 휘두를 만한 자가 없는데도 억누르려고 하니, 내가 아니면 누가 종친을 돌봐주겠는가?


신하들의 바른 소리

경자년의 대상은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의 국상을 말한다. 영조는 당시 후궁 소생의 왕자로 있으면서 대신에게 심하게 무시당한 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힘없는 종친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의 현실적인 힘과 논리를 이기지는 못했다. 결국 영조는 문제를 일으킨 해춘군을 파직하고, 종친부와 의정부가 서로 무시하지 말고 공경하라는 당부를 하며 갈등을 봉합했다.

요즘도 최고 지도자 친인척 비리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린다. 이들이 최고 권력자와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불법적인 행위를 감히 문제 삼지 못하다가 벌어지는 일이다. 200여 년 전 조정의 신하들은 임금의 친척인 종친이 법을 무시하면 임금 앞에서 당당하게 비판했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시대를 살면서도 오히려 조선시대 신하들의 바른 소리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병자호란 還鄕女 문제

“백성을 지키는 것은 국가 책임”
강성득|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전쟁은 언제나 한 사회의 기반을 재편하도록 강요한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일어난 병자호란도 약 2개월간 짧은 전쟁이었지만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조선은 전쟁이 가져온 변화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했다. 인조는 두 아들과 며느리들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야 했고, 수많은 사람이 전쟁 포로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전쟁 책임 소재를 가리는 문제뿐 아니라 청나라에서 도망쳐 오거나 속환(贖還, 대갚음을 하고 도로 찾아옴)된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인조 16년(1638) 3월 11일, 신풍부원군 장유(張維)가 자신의 며느리 문제로 예조에 단자(單子) 한 통을 올렸다.

“신의 외아들 장선징의 처가 병자호란 때에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지금은 친정에 있습니다. 예전처럼 부부로서 함께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병자호란 당시 강화가 함락되면서 청나라로 잡혀갔던 자신의 며느리가 속환돼 돌아왔지만, 절의를 잃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사대부가에서 청나라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단자를 받아든 예조에서는 이 일을 판단하기 난처했던지, 돌아온 사족(士族) 여인이 한둘이 아니니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여 임금에게 보고하면서 대신의 의견을 들어 처리하기를 청했다. 그러자 심양(瀋陽)에 다녀온 좌의정 최명길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인조에게 올렸다.

신이 전에 심양에 갈 때 가족을 속환하기 위해 따라간 양반 가문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만나자 마치 저승에 있는 사람을 만난 듯이 부둥켜안고 통곡하니, 길 가다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돈이 부족해 속환하러 가지 못한 부모나 남편들도 차차 가서 속환할 터인데, 만일 이혼해도 된다는 명을 내리면 분명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는 수많은 부녀자를 영원히 다른 나라의 귀신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명의 남편은 바란 대로 되겠지만 수많은 집안에서 원망을 품을 것이니 이는 화기(和氣)를 상하게 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정황을 참작해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혼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

이어서 최명길은 심양에 갔을 때 자신이 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미모가 매우 빼어난 처녀 하나를 끌고 갔는데,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다가 사하보(沙河堡)에 이르러 굶어 죽었습니다. 그러자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해 땅에 묻어주고 떠났습니다. 또 신이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처녀 한 사람을 약속한 값을 치르고 속환하기로 돼 있었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어기고 값을 더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결국 여인의 시체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이 두 여인이 제때 속환됐더라면 분명 자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지조를 지켰다 한들 누가 또 알아주겠습니까. 이로 본다면 급박한 전쟁 상황 속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스스로 결백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 또한 얼마나 많겠습니까. 잡혀간 부녀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이렇게 일률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를 들은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을 내렸다. 이 일과 관련한 사관의 기록을 보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와 관련이 있고 세상을 떠받치는 대들보이기 때문이다. 잡혀갔던 여인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라지만 변고가 닥쳤는데도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의를 잃었다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절대로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사관은 또 정자(程子)의 말을 들어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최명길의 견해를 두고는 “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통분을 금할 수 있겠는가”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두 사람의 견해 모두에 무언가 핵심이 빠져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병자호란 포로 50만 명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잡혀간 조선 백성은 많게는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인조는 청나라에 포로 송환을 적극 요청했지만, 포로를 인적 자원으로 인식한 청나라는 속환가(贖還價·찾아올 때 대는 비용)를 받아내려 했다. 조선 정부의 송환 노력은 주로 종실(宗室), 신료의 가족,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의 가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빨리 송환하기 위해 몇 배의 웃돈을 지급하기도 했다. 결국 속환가가 올라가면서 실제로는 고위 관료층이나 일부 부유층만이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의 책임이 어찌 포로로 잡혀간 여인들에게 있겠는가. 여전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조선은 어떤 조처를 했어야 할까. 당시 조선이 취한 조처는 미흡하다 못해 미미했다. 청나라에 잡혀간 자국 백성을 송환하려는 노력 부족과 ‘돌아온 여인’을 두고 조선의 지배층이 취한 박정한 조처는 조선이 자신의 백성을 저버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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