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에 대하여 <br>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382쪽, 1만3000원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과거는 바뀐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마다 과거는 바뀐다.
과거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옛날(jadis)에 비해 과거(passe)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과거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 시대에 이어 국가, 공동체, 가족, 생김새, 우연, 즉 조건이 되는 무엇이 끊임없이 과거를 좌지우지한다. 질료, 하늘, 땅, 생명은 영원토록 옛날을 구성한다.
‘과거’와 ‘옛날’에 대한 키냐르의 사유는 소설적인가? 나는 며칠째, 키냐르의 소설 ‘옛날에 대하여’를 읽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망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뭐랄까,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매우 익숙한 느낌으로 산책하며 주위를 확인하는, 세속적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 기분 좋게 풀어헤쳐진 걸음걸이의 느낌, 수축과 이완의 리드미컬한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감정의 흐름은 보통 소설을 읽으며 얻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키냐르는 도대체 무엇을 쓴 것일까. 이것은 소설인가? 아니 이것은 소설이 아닌가?
프랑스는 유령이 출몰하는 나라다. 그곳에서 과거가 새어나온다. 그곳의 하늘은 오래된 섬광(閃光)이다. 아주 미미한 발광(發光)이 조그만 이 나라의 종탑과 지붕들로 퍼지는 투명하고 거침없는 빛에 추가된다. 녹색 평원의 외딴 마을들에게는 숨어 있는 흔적들이 산재한다.(중략) 프랑스, 그것은 나라가 아니라, 시간이다.
이것은 제6장 ‘프랑스’에 대한 내용이자 묘사다. 내용(contents)이되, 스토리(story)는 아니다. 스토리란 시간 순으로 전개되는 사건의 서술을 가리킨다. 작가들은 이 순차적인 이야기의 단위(사건, action)를 가지고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재구성(reconstruction)하며 노는(play) 자들이다. 여기에는 작가마다 재구성의 방법이 있게 마련이다. 전통적인 서사 기법과는 달리 현대소설에서는 이 배분과 배치에서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법칙에 대입해서 키냐르의 ‘문학 작업’의 정체를 가늠해보자면, 그는 가능한 한 ‘인류의 거대한 삶’, 달리 말하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잘게 부수는 작업을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거대한 일상의 탐구자들인, 역사학에서 아날학파의 방법론(광대하고도 매혹적인 ‘사생활의 역사’ 를 보라!)과 동궤이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보들레르 시에 심취한 나머지 19세기 예술의 수도(capital)를 파리로 삼아, 그때까지 형성된 자본주의를 해체한 뒤 자기 방식으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한 발터 벤야민의 작업(방대하고도 황홀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보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정원에 어둠이 내린다.
새들이 침묵한다.
저녁의 침묵은 닳고 닳은 주제이다.
저녁의 침묵, 동물의 속성이며 새들의 속성인 그것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닳고 닳은 주제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소설가라기보다 ‘문학수집가’라고 불린다. 위의 ‘저녁의 침묵’은 시집의 한 페이지처럼, 그러니까 시 한 편으로 하나의 장(제82장)이 제시되고 끝난다. 그 뒤는? 제83장으로 제시된 뤽상부르 공원에서 과거에는 매일 벌어졌으나 이제는 구경할 수 없는 체스 놀이에 대한 기억을 더듬은 짧은 산문이다. 그 앞, 그러니까 제81장은? 로마 황제의 연설로 시작되어 ‘아기라는 나이 많은 짐승’에 대한 정의로 끝나는데, 4쪽에 걸쳐 9조각으로 구성된 산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