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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軍 단 1명이 주둔해도 全 미국인이 한국에 함께 산다 여기겠다 [+영상]

[Special Report | 미국, 손 놓을 수 없는 제국] 大韓民國 발전 가능케 한 한미상호방위조약

  • 조성훈 단국대 초빙교수(前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입력2023-10-0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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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백기 들게 한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강수

    • 전쟁 재발 억지력 양분 삼아 자란 國力

    • 美 “韓 침략 시 美 침략으로 간주”

    • 한미동맹→세계동맹 선결과제 = 北核 위협 해결

    올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70주년이 되는 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됐다. [Gettyimage]

    올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70주년이 되는 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됐다. [Gettyimage]

    6·25전쟁 휴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1951년 6월 하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미국 측에 “한국에 대한 공산 침략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보장을 해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7월 중순엔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와 면담에서 “나와 한국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유엔군이 철수해 한국이 무방비 상태에 놓이는 일”이라며 “휴전이 성립될 경우 적어도 충분한 자위 능력, 가능하다면 장래에 남북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이듬해에도 이 대통령의 뜻은 이어졌다. 3월 그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양국 간 상호방위조약이 필수적”이라며 “미국의 의도는 공산주의자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이다. 한국이 위태로운 휴전 기간 중 지원을 확정하는 조약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미국은 한국을 아예 조약 협상 대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딘 애치슨 미국 국무부 장관은 미국과 유엔이 한국에 상당한 군대를 유지하는 한 공식적 협약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둔 1953년 5월 하순에도 미 국무부는 방위조약 대신 주한미국대사를 통해서 이 대통령에게 16개 참전국 공동선언의 의의를 전달하며 “이는 미래 한국에 대한 공격을 단념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유엔 회원국들에 의한, 전례 없는 국제 보증”이라고 설명했다. “안보 관점에서 상호방위조약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고, 휴전이 지속되는 동안 효력을 보장받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더 튼튼한 끈을 원했다.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휴전 전 체결해 전후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다.

    조약 체결이 지지부진하자 이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월터 로버트슨 국무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한다. 2주간 협의 끝에 마침내 1953년 8월 8일,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부 장관이 서울에서 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하기에 이른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 테이블로 미국을 이끌기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둔다. 사진은 당일 반공포로가 전격 석방되는 모습. [동아DB]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 테이블로 미국을 이끌기 위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둔다. 사진은 당일 반공포로가 전격 석방되는 모습. [동아DB]

    “韓美, 일체 불가분 관계 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문과 6개 조항으로 이뤄졌다. 전문에선 당사국 가운데 어느 일방이 태평양 지역에서 고립돼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갖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대한 방어를 결의했다. 제2조는 당사국 가운데 어느 일방의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 무력 공격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적의(適宜)한 조치를 협의·합의하에 취할 것이라고 규정했다.

    제3조에선 이러한 조치를 각국 헌법상 수속에 따라 행할 것을 약속했다. 제4조는 미국의 육군·해군·공군을 한국 영토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한국은 허여(許與)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규정해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체결됐지만 약 1년 후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됐다. 발효 직전에 조인된 한미 합의의사록에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전후에도 계속 유엔군 사령관에 있음을 확인했다. 이 외에도 한국군의 최종적 규모와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 등을 규정해 군사적·경제적 지원으로 동맹을 강화할 수 있었다.

    미·소 양대 진영의 대립 속에 한미 양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조인함으로써 군사동맹 관계를 제도화했다. 이에 대해 변영태 당시 외무부 장관은 “우리가 갈망하는 바는 자유세계에 남아 있는 것인데, 이제 보장이 생겼다”며 조약의 의의를 평가했다. 합동참모본부의 전신 연합참모본부 의장이던 이형근 대장은 “방위조약이 체결된 것은 한국 방위 강화상 일대 약진이다. 군사적으로 양국이 ‘일체 불가분 관계’에 놓인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에서의 전쟁 재발을 저지하는 강력한 힘이 됐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군사력 증강은 물론 경제성장과 함께 정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1953년 8월 8일 변영태 한국 외무부 장관(왼쪽), 존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에서 조약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DB]

    1953년 8월 8일 변영태 한국 외무부 장관(왼쪽), 존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에서 조약문에 서명하고 있다. [동아DB]

    美 즉각 개입 개정 이루지 못했지만…

    지난 70년간 한미동맹은 안보동맹 수준을 넘어 공동의 이해와 가치를 공유하는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발전했으나 북한의 도발 등 국내외 정세 변화에 영향을 받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적의 무력 공격’과 ‘사전의 협의·합의’ ‘헌법상 수속 절차’가 선행 조건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안보 불안을 줄이기 위해 한국이 침략당할 시 미국의 즉각 출동을 보장받길 원했다.

    타 조약과 비교하건대 1961년 북한과 중국이 체결한 ‘북·중 우호협력 상호원조 조약’은 어느 일방이 침략당하면 자동으로 군사적 개입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조약 경우 제5조가 당사국 가운데 어느 일방에 대해 무력 공격이 있을 경우 당사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치를 ‘즉각’ 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 국방부는 미국에 나토 경우처럼 일방국의 선포로도 즉각 개입이 가능하도록 상호방위조약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서울이 비무장지대와 매우 근접한 입지 조건 아래에서, 헌법 절차 수속으로 인한 시간적 지연을 없애기 위함이다. 1963년부터 조약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안보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제2조의 ‘협의·합의하’를 ‘즉각’으로 수정하고, 조약 효력 소멸 요건을 ‘일방적 통고’가 아니라 ‘상호 협의에 의해’로 수정하거나 유효기간을 명시하는 등 여러 대안을 검토했다. 1966년 7월 국회에선 조약의 효력 조항을 ‘합의에 의해서만 종료’로 개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요구 사항은 1966년 10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간 정상회담에서 논의됐다. 방위조약 개정에 이르진 못했지만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미국은 한국의 휴전선에 대한 침공을 미국 본토 침략으로 간주하겠다. 또 한국 땅에 단 한 사람의 미군이 주둔하더라도 1억9000만 명 전 미국인이 한국에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여기겠다”고 발표하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1970년대 초엔 국제적 데탕트 흐름 속에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에 이어 주한미군까지 철수시키려는 상황이 벌어졌다. 큰 충격을 받은 한국의 여야 국회 지도자들은 한반도 안보를 위한 강력·즉각 조치가 가능하도록 정부에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을 요청했다. 이에 1970년 8월 하순 박 대통령은 스피로 애그뉴 미국 부통령과 회담하면서 북한의 공격이 있을 때 미국의 즉각적 개입 보장을 요구했다.

    미국의 답은 군제 개편이었다. 미국은 닉슨 독트린 후 1971년 3월 주한 미 제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시켰다. 미군 1개 사단과 군단사령부가 동시에 철수할 경우 미국의 대한방위공약이 약화될 우려가 있었다. 한미 양국은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71년 7월 1일 미 제1군단을 개편해 한미 제1군단을 창설했다.

    1976년 8월엔 판문점에서 발생한 북한군 도끼만행사건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됐는데, 당시 미군 장교만으로 편성된 유엔군사령부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해 한국군과 협조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로 인해 한미 연합사령부 창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고, 주한 미국 지상군의 철수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방어를 위해 연합 및 합동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사령부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1978년 11월 창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 미국 지상군의 일부 철수에도 불구하고 연합사령부의 발족은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억제하겠다는 양국의 확고부동한 결의의 표명”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미국에 대한 의존적 동맹이 지속되던 가운데 1990년대 초 큰 변화가 생겼다. 동유럽과 옛 소련 정권이 붕괴되며 한국의 국력이 크게 신장됐기 때문이다. 1990년 4월 미국 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 ‘21세기를 지향한 아태지역 전략개요’ 에선 앞으로 10년 내 한국 방위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미국은 지원하는 역할을 맡도록 할 것이라는 방침을 제시했다.

    5월 10일 한미 공군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고자 한국 공군 KF-16 4대와 미국 공군 F-16 3대의 수직꼬리날개에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로고를 부착했다고 밝혔다. [뉴스1]

    5월 10일 한미 공군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고자 한국 공군 KF-16 4대와 미국 공군 F-16 3대의 수직꼬리날개에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로고를 부착했다고 밝혔다. [뉴스1]

    新 한미관계 첫 과제 = 北核 문제 해결

    1990년 6월 25일 카네기국제문제위원회가 마련한 ‘세계 속 한국의 위상’을 주제로 한 학술모임 만찬에서 폴 울포위츠 미국 국방부 차관은 “한국군이 장비의 현대화 등 자주국방 터전 마련에 최선을 다해 상당한 실력을 쌓았음에도 아직도 주요 분야에서 보조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제 한국은 그들의 방위를 위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에 이듬해인 1991년부터 한국은 미군의 주둔 경비에 대한 안보분담금을 정식으로 부담하기 시작했다.

    한국 내부에서도 독자성을 제고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주한미군 주둔 및 연합사령부 존재로 말미암아 한국의 자주국방 의지와 노력이 약화됐고, 미군에 대한 의존 증대와 더불어 한국군의 정보 획득 노력과 독자적 작전기획 능력이 감소됐다는 게 근거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엔 전시작전권 전환이 한미동맹 관련 핵심 의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도 해외 주둔 미군을 재편하며 한미 양국은 2012년에 전작권을 한국군에 이양하기로 합의했지만 이후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전작권 전환이 유예된 데에는 그사이 커진 북한의 핵 위협이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북핵 대응 수단은 사실상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에 의존하는 것으로, 전작권 전환 시 핵 위협 대응 역량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한미관계를 북한, 한반도라는 울타리를 넘어 세계 차원 동맹으로 업그레이드하길 원함과 동시에 한국이 ‘글로벌 플레이어(global player)’가 되길 바라는 현재 미국의 입장과 어긋나는 관점이다.

    북한이 핵무기 사용 가능성으로 한국을 위협하는 현실을 타계하라면 한미동맹이 더는 한반도에 제한되지 않고 세계 안보 환경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역적 동맹’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작금의 북핵 문제 해결이 지역 내 안정을 확보하는 지름길이자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상] “미군이 돕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행복하게 못 살아요”



    [신동아 10월호 표지 B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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