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윤석열 정권이 파시즘? 이재명 민주당이 파시즘!

[노정태의 뷰파인더] 폭력적 대중 정치 운동의 망령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입력2023-09-2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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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미애가 진중권 언급한 까닭

    • 정치 원칙, 편의적으로 취사선택

    • 본질적으로 법치주의와 상극

    •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맹목성

    • ‘내로남불’은 어떻게 독이 됐나

    • 성난 대중 앞세워 박유하 공격

    9월 3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단식 농성장에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9월 3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단식 농성장에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파시즘적인 통치 수단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입에 자물쇠를 채우기 위해 우선 조롱한다. 그 다음에 혐오를 만든다. 사회적으로 격리시킨다.”

    9월 3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의 국회 본청 앞 단식 농성장에 방문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발언이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과 현 정부가 이재명을 탄압하고 있으며, 그 방식이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미애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그는 윤석열이 이재명을 조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중권 이런 사람들을 시켜서 ‘왜 단식이야?’ 조롱하고 언론이 크게 쓰고 우리 지지 세력한테도 그런 사인이 가게끔”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추미애에 따르면 “독일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던 게 그런 것”이다.

    정말 그럴까. 윤석열이 이재명을 대하는 방식이 파시즘적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현 정권이 이재명과 민주당을 대하는 방식을 파시즘의 그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민주당, 특히 이재명 체제 하의 민주당이 최근 몇 년간 걸어온 행보야말로 우려스럽다. 파시즘이라는 말을 은유가 아닌 역사적 사건에 대한 명칭으로 이해할 때, 폭력적 대중 정치 운동으로서의 파시즘에 더욱 근접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민주당과 그 지지 세력이기 때문이다.

    추미애의 ‘윤석열 파시즘’ 발언은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타인이나 다른 정치 세력을 비난하기 위한 일종의 은유적, 수사적 표현인 셈이다. 단어의 뜻이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바람직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말이 낭비되고 뭉툭해지면 현실을 비판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를 잃게 된다.



    이 글은 주로 민주당을 비판하지만 민주당만을 매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파시즘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 양태를 파악해, 오늘날 우리의 정치 풍토에서 파시즘적인 행태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2023년 현재 한국정치는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특정 정당이나 계파의 이해관계를 넘어, 이제는 진지한 태도로 경고등을 켤 때다.

    ‘너는 히틀러 같은 놈이야’

    파시즘은 까다로운 주제다. 한국뿐 아니라 영미권,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히틀러의 악행이 워낙 도드라진 탓에 정치적 공격을 위한 수사법으로 동원되기 일쑤다. ‘너는 파시스트야’라는 말은 ‘너는 히틀러 같은 놈이야’, ‘너는 타자를 존중하지 않고 억압하는 나쁜 놈이야’라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두루 사용되고 있다.

    파시즘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미국 컬럼비아대 사회과학대학 명예교수 로버트 O. 팩스턴에 따르면 그런 뭉툭한 표현은 파시즘을 이해하고 비판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의 주저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교양인, 2005)을 펼칠 필요가 있다.

    미주와 색인을 포함해 600페이지가 넘는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 첫째, 파시즘은 이념보다 운동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돼야 한다. 둘째, 파시즘 운동의 주요 특징은 내로남불, 혈통주의, 법치 파괴다. 셋째,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파시즘의 위험을 안고 있으며 늘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요소부터 보자. 파시즘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이념이 아니라 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파시즘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다른 근현대 정치 운동과 달리, 이념이 먼저 만들어지고 정치 운동이 탄생한 경우가 아니다.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와 같은 ‘이즘’들은 정치가 교양인의 일이었던 시대에 처음 만들어져, 상대방의 감성과 이성에 호소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끈질기고 학구적인 의회 토론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반면, 파시즘은 대중 정치 시대에 출현한 것으로 “세밀하게 연출된 의식과 감정이 가득 실린 수사(修辭)를 적절히 사용하여 사람들의 정서에 주로 호소했다.”(53쪽)

    그렇다보니 파시즘은 다른 정치 이념과 달리 뚜렷한 생년월일을 가지고 있다. 1919년 3월 23일 일요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무솔리니를 지지하는 100여 군중이 밀라노 상공업연맹 회의실에 모여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 그 시초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운동을 ‘전우단’이라는 뜻의 ‘파시 디 콤바티멘토(Fasci di Combatimento)’라 불렀는데, 여기서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파시즘의 독특한 성격

    파시즘은 정치 이념이기에 앞서 정치 운동이다. 이 사실로부터 파시즘이라는 정치 이념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이 나온다. 그 내용을 종잡을 수 없고 일관성도 없으며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혈통 집착과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파시스트에게 정치 이념은 반드시 지켜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심사숙고하여 강령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행동 유형은 파시스트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정치 이념과 원칙은 편의적으로 취사선택되고 아무렇지 않게 무시당한다. 파시즘은 다른 ‘이즘’들과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르다.

    파시스트에게 말로 한 약속, 국민에게 제시한 강령, 외국과의 협상 등은 아무런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손바닥 뒤집듯 들어 엎어도 무방한 것이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승리자가 되기 위한 진화론적 투쟁에서 선택된 민족들이 승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보편적인 가치도 거부하기 때문이다.”(62쪽) 히틀러의 말이 담긴 문단을 인용해 보자.

    “히틀러는 강령(1920년 2월에 발표한 25개 조항)을 제시하기는 했는데, 그것을 불변의 강령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조항 가운데 많은 부분을 무시했다. 비록 강령이 발표된 날을 해마다 기념하기는 했지만, 이는 행동 지침이라기보다는 이제 당내에서 논쟁은 없다는 신호였을 뿐이다. 히틀러는 독일 총리로서 한 첫 대중 연설에서 ‘강령을 자세히 알려 달라는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나는 민족(Volk)을 향해 나아가다 말고 싸구려 약속들을 늘어놓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57쪽)

    물론 이론은 이론일 뿐이며 정치는 현실이다. 공산주의 뿐 아니라 심지어 자유주의도 현실 속에서 당면한 과제에 맞서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파시즘의 ‘유연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파시즘은 합리적인 세계관을 확립하고, 그렇게 창출된 보편적 이념으로 다수를 설득하는 것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파시즘만이 이성과 지성을 경멸한 나머지, 입장의 변화를 설명하고 정당화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479쪽)

    이렇듯 이성과 지성을 경멸하는 이들이 정 반대편에 있는 무언가, 즉 폭력에 걷잡을 수 없는 매력을 느끼며 폭력을 권력 투쟁의 도구로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탈리아의 총리가 되기 몇 달 전, 무솔리니에게 한 비평가가 파시즘의 강령에 대해 묻자 무솔리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 세계의 민주주의자들이 우리의 강령을 알고 싶어 하는가? 우리의 강령은 전 세계 민주주의자들의 뼈를 부러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56쪽)

    금반언(禁反言)의 원칙을 무시한 채 폭력을 도구로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법치주의와 상극일 수밖에 없다. 법치주의란 미리 정해놓은 법과 절차에 따르지 않는 한 국가가 범죄자를 체포 구금 처벌하는 절차조차 불법일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원리원칙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했던 말 뒤집는 게 아무렇지 않으며, 미운 놈 때려주고 남의 것 빼앗아도 되는 그런 세상은, 법치주의와 정 반대다.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행태, 그들이 권력을 쥐고 약속하는 ‘민족의 유토피아’가 바로 그런 곳임은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법치국가를 폐기하고 적법 절차를 거부하는 것은 나치즘이 보여줄 수 있는 최후의 단계다. 팩스턴에 따르면 이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것은 오직 나치 정권뿐이었고, 그에 견줄만한 것은 소련의 스탈린 독재 치하에서 나타난 급진화 현상뿐이었다. 서로 다르고 전쟁까지 벌였던 두 체제가 같은 종착점에 도달한 이유는 “두 정권 모두 법보다 역사의 요청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383쪽)

    정치는 말로 하거늘

    이 글을 시작하며 인용했던 추미애의 발언을 떠올려 보자. 언어의 뜻은 궁극적으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조롱하는 것이 파시즘’이라는 주장을 틀렸다고 못 박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그는 ‘은유로서의 파시즘’을 이야기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파시즘은 단지 은유로만 소비하고 말 대상이 아니다. 엄연히 현실에 출현했던 정치 운동이며, 그로부터 파생된 정치 이념의 총합이기도 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파시즘을 이해하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본다면, 윤석열과 국민의힘보다 이재명과 민주당이 오늘날 파시즘에 더욱 가깝게 쏠려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념으로서의 파시즘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만 떠올려 봐도 그 점은 분명하다. 파시즘은 이념이되 이념이 아니다. 말 바꾸고 입장 뒤엎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우리 편이 하는 일이면 무조건 옳고 저들이 하는 건 다 나쁜 일이며, 우리의 승리와 지도자의 안위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맹목성이 파시즘의 기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에, 헌법도 법률도 당헌 당규도 모두 ‘그냥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단식 정국’ 속에 이재명과 민주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지난번 체포동의안 부결 후 여론의 반발이 쏟아지자, 그는 석 달 전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한 바 있다. 민주당 역시 ‘정당한 영장에 대하여’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불체포특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아 당헌을 개정했다.

    정치인의 말이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국민 앞에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 정치인이 매 순간의 상황과 유불리에 따라 아무렇게나 말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정치인의 말을 믿고 표를 맡긴 국민의 주권은 정치인 개인의 것으로 갈취당하고 만다. 불가피하게 공약이나 대국민 약속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라면 전후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말을 지키는 것,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인 것은 우리 사회에 독이 됐다.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의 ‘거짓말 감수성’을 한없이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정치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 편 지도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두둔하는 지지층이 결합하면, 민주주의는 빠른 속도로 타락하고 그 끝은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재명과 박유하

    단식 정국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국회 내 흉기 난동 사건은 이재명과 민주당이 걷고 있는 행보에 대한 우려를 더욱 크게 만든다. 필자가 앞서 ‘뷰파인더’ 지면을 통해 지적했듯, 단식투쟁은 무저항 투쟁일 수 있으나 ‘비폭력’은 아니다.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본인의 생명을 걸고 벌이는, 어찌 보면 가장 강한 수위의 폭력 투쟁이다.

    당대표가 납득할만한 명분 없이 그토록 과격한 투쟁을 벌이자 일부 지지자들도 선을 넘기 시작했다. 9월 14일, 국회 내 단식 농성장 앞에서 이재명 지지자로 추정되는 50대 여성이 쪽가위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고, 그를 제지하던 중 두 명의 여경이 부상을 입었다. 그 중 한 사람은 5㎝에 달하는 봉합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튿날에는 민주당 당대표실 앞에서 70대 남성이 커터 칼을 꺼내 자해를 시도했으나 제압당한 일도 있었다.

    9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단식 농성장에서 50대 여성이 쪽가위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다가 여경에게 상해를 입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국회 관계자들이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 [뉴스1]

    9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단식 농성장에서 50대 여성이 쪽가위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다가 여경에게 상해를 입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국회 관계자들이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 [뉴스1]

    이런 사건을 ‘소수의 일탈’로만 보아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유사한 사례가 특히 민주당 주변에서 너무 자주 벌어지고 있다. 지난 총선 당시 송영길 민주당 당대표가 서울 신촌에서 선거운동 도중 장도리로 후두부를 공격당한 사건을 떠올려 보자.

    가해자는 ‘표삿갓’이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던 표 모씨로, 그는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이재명 지지자였다. 그가 구속기소된 뒤 구치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탓에 범행 동기를 모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확인된 사실도 있다. 표 씨는 반미주의, 반일주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매우 강하게 드러냈으며, 송영길이 입장을 바꿔 한미연합훈련에 찬성하자 그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적 열망이 제도권 정치 내에서 반영될 수 없다는 생각에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민족주의, 반일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백성들의 후손이다. 하지만 일본을 향해 무조건적인 혐오와 증오를 품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한 감정을 폭력으로 표출하는 일은 더더군다나 용납되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그래야만 할 상식이다.

    이재명은 어땠을까. 대중의 반일 감정을 부추기며 지식인에 대한 마녀사냥에 앞장섰다.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출판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자, 이재명이 2015년 2월 17일 트위터에 올린 글만 봐도 그렇다. “이 여자.. 아직도 교수직 유지하고 있는가요? 어쩌다 이런 사람과 하나의 하늘아래서 숨 쉬게 되었을까..ㅠ 청산해야할 친일의 잔재들..”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가 2020년 6월 ‘신동아’와 인터뷰하는 모습. [박해윤 기자]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가 2020년 6월 ‘신동아’와 인터뷰하는 모습. [박해윤 기자]

    당시 이재명은 대선후보도 당대표도 아닌 성남시장이었다. 하지만 이미 언론의 주목을 받는 잠재적 대선주자군에 속했다. 박유하의 책과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본인의 발언이 미칠 파장을 고려해 최대한 정중한 학술의 언어를 빌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정 반대의 길을 택했다. 소위 ‘전국구’ 정치인이 한 사람의 학자를 상대로 ‘하나의 하늘아래 숨 쉴 수 없다’는 둥, ‘청산해야 할 친일 잔재’라는 둥,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표출했다. 몇 번을 돌이켜봐도 실로 섬뜩한 일이다.

    상징이나 은유가 아닌 현실의 파시즘은 그렇다. 모든 파시스트가 무식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파시스트는 성난 대중을 앞세워 지식인을 공격하고 입을 다물게 하려 든다. 파시즘은 태생적으로 반지성주의이며, 파시스트는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는 지식인을 손가락질하며 매도하는 일에 기꺼이 앞장선다.

    추미애는 지식인 진중권이 정치인 이재명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며 파시즘을 거론했다. 은유로서의 파시즘이라면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파시즘, 역사의 파시즘은 정 반대다. 정치인 이재명이 지식인 박유하를 향해 폭언을 내뱉을 때, 국민을 향해 약속했던 불체포특권 포기를 번복할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적잖은 유권자가 이재명을 지지할 때, 파시즘의 망령은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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