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女검객 탄월의 마지막 칼춤

[고담기담]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3-12-19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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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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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날 채비를 마치고 막 작별을 고한 탄월이 다소곳이 앉아 소응천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리산 산음 고을을 밤새 적신 가을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나른한 새벽 햇살이 문지방을 타고 넘을 무렵 응천이 힘겹게 입을 뗐다.

    “네가 이 외진 곳에 불쑥 나타나 첩이 되겠다고 했을 때, 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널 받아들였다. 삼라만상엔 피치 못할 운명이 있는 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나이 어리지만, 얼굴에 감도는 기상도 좋았고, 내 명성에 주눅 들지 않는 담대함도 기특했다. 한데 그게 다 거짓이었더냐?”

    옷매무새를 정돈한 탄월이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려다 말고 대답했다.

    “소첩이 바라던 바는 세상을 바꿀 걸출한 주인을 모시고 천하를 도모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찾아 헤매다 삼남에 소응천이란 재야의 거두가 계신단 말을 들었지요. 망설임 없이 지리산으로 와 몸을 의탁했습니다. 하지만 한 해를 넘겨 모셔보니 제가 찾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난 어떤 사람이었느냐?”



    “계집의 몸이나 탐하는 졸장부는 아니었으나 겉으로 드러난 도덕군자라는 명성은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과분하다?”

    “그렇습니다. 선비님께서 누리는 명망은 과거에 급제할 재주를 지니고도 초야에 묻혀 살기에 얻어진 것일 따름입니다. 욕심 없는 분은 맞사오나 그저 그뿐입니다. 막상 기회를 얻어 세상에 나아가면 작은 파도조차 견딜 수 없으실 겁니다.”

    “내가 그리 약골이었느냐?”

    “기개란 남과 겨룰 때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지요. 싸울 줄 모르는 자는 말만 무성할 뿐 정작 위기가 닥치면 뒷걸음질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두 주먹을 움켜쥔 응천이 노여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넌 그럼 싸울 줄 안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감히 그런 소릴 지껄이는 게냐?”

    말없이 응천을 쏘아보던 탄월이 봇짐 하나를 풀었다. 평소 응천이 본 적 없던 가죽옷이 나타났다. 흡사 호랑이 사냥꾼처럼 무장을 마친 그녀가 가죽신 끈을 발목에 단단히 동여매고 마당으로 나섰다. 어느새 그녀 손엔 예리한 장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나리께 작별 선물로 평소 익힌 검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제 생애 마지막 칼춤이 될 듯합니다. 그전에 소첩이 이리 된 내력부터 말씀드릴까 합니다.”

    살육의 밤

    의금부 종사관이 나졸들을 몰고 정 판서 댁에 들이닥친 건 깊은 밤 모두가 잠에 곯아떨어진 때였다. 종사관은 애초 판서 체포에 목적을 두지 않은 양 집 안을 휘젓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베기 시작했다. 잔인하기는 나졸들도 매한가지여서 판서 혈족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덮어놓고 칼부터 휘둘렀다. 아수라장이 된 집 안 마당은 피로 얼룩져 갔다.

    마침내 내실로 들어서 판서의 목에 칼을 들이댄 종사관이 속삭였다.

    “짐작하시겠지만 이리 된 건 다 그 혀를 잘못 놀려서요. 어디 무엄하게 함부로 우리 좌상 대감을 비난한 겝니까? 정녕 조선 천하가 누구의 것인지 여태 모르셨던 게요?”

    떨리는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인 정자관을 간신히 머리에 올려 쓴 판서가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대답했다.

    “식솔들까지 해칠 필요는 없지 않으냐? 내 당당히 의금부로 압송돼 무고함을 밝히겠다.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게 되면 너희 문중이 무사할 듯싶으냐?”

    콧방귀를 뀐 종사관이 판서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부인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피가 분수처럼 천장을 향해 솟구치자 경악한 판서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사관의 칼은 판서의 목을 가로로 긋고 정확히 칼집으로 되돌아갔다. 천천히 무너져가는 판서의 육신을 향해 종사관이 말했다.

    “전하는 무슨? 이제 갓 열 살 넘은 꼬맹이인 것을.”

    나졸들은 집 안을 사방으로 에워싼 채 사내는 죽이고 계집은 포승줄로 묶어 피범벅이 된 시신들로 가득한 마당에 꿇렸다. 그들은 그날 밤 세 사람을 놓쳤다. 판서의 아홉 살 된 막내딸과 그 유모 그리고 유모의 딸 필령이었다.

    유난히 겁이 많아 유모의 행랑채에 가서 잠들곤 했던 판서의 막내딸 혜령은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물론 유모의 동물적 본능도 크게 한몫했다. 그녀는 자신이 모시는 판서가 지나치게 강직해 늘 불안하던 터였다. 판서는 어전에서 나라의 권세를 틀어쥔 좌상 대감과 다투고 오는 날이면 술에 취해 세상을 개탄하곤 했는데, 그건 너무나 위험한 말들이었다. 더구나 좌상 대감 댁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먼 친척으로부터 빨리 판서 댁을 벗어나라고 신신당부하는 말까지 들은 뒤이기도 했다.

    유모는 대문 근처에 이른 의금부 나졸들의 어수선한 발소리를 예민한 청각으로 포착하자마자 그 의미를 곧바로 알아챘다. 남편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온 그녀는 근력도 남달라 양손에 두 어린애를 안고 뒤채 헛간으로 내달렸다. 단옷날 그네에 매는 밧줄을 꺼내 대나무 광주리에 연결한 그녀는 후원 담장 밑으로 이동했다. 키 큰 노송 굵은 가지에 광주리를 걸고 내려온 그녀가 딸 필령에게 다급히 말했다.

    “필령아! 정신 똑바로 차려! 혜령 아가씨와 널 광주리에 태운 뒤 엄마가 줄을 당길 거야. 그럼 어찌 되지? 광주리가 후원 담장 꼭대기에 닿겠지?”

    엄마의 두 눈을 응시한 필령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모가 다시 말했다.

    “담장 위로 발을 디디게 되면 이번엔 광주리를 담장 너머로 내려. 그리고 다시 아가씨와 함께 올라타. 엄마가 여기서 힘껏 당기고 있다가 천천히 풀어줄게. 땅에 내려서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칠보 아재 집으로 뛰어. 마루 밑이든 어디든 숨어 있다 아가씨랑 살길을 찾아! 알았지?”

    필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딸을 가슴에 꼭 안은 유모가 다시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시 못 보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 잊지 마. 발이 땅에 닿자마자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야 해. 엄마도 힘이 남게 되면 나무를 타고 담을 넘어볼게. 어서 움직여!”

    “그렇다면 네가 정 판서 댁 종 필령이로구나?”

    응천이 툇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물었다. 천천히 칼을 칼집에서 빼 운검을 준비하며 탄월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역적으로 몰려 멸족된 정 판서 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종년 필령이가 바로 접니다.”

    “네 어미는 어찌 됐느냐?”

    탄월은 잠시 칼을 들어 새벽 햇살을 살짝 가른 뒤 휘리릭 회전시켜 도로 칼집에 넣었다. 그녀가 깊은숨을 내쉬고 조용히 대답했다.

    “모릅니다. 전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혜령 아가씨 손을 움켜쥐고 뛰고 또 뛰었습니다. 엄마가 칠보 아재라 부르며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장장이의 집 다락에 숨어 사흘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버텼지요.”

    “어미 소식이 궁금하진 않았느냐?”

    응천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탄월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엄마가 절 품 안에 꼭 안을 때 그게 마지막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제 이름이 왜 필령이었겠습니까? 딸처럼 기른 혜령 아가씨를 반드시 잘 모시라고 필령이라 지었지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응천이 머리를 긁적이고 나서 말했다.

    “검무를 추기 전에, 어쩌다 탄월이란 이름을 얻게 됐는지 말해 줄 순 없겠느냐? 게다가 네가 모신 혜령 낭자는 어찌 됐는지 그 또한 궁금하다.”

    입술을 꼭 다문 탄월이 다시 칼을 칼집에서 꺼내며 속삭였다.

    “그걸 아시려면 먼저 제 보법과 운검술을 보셔야 할 겁니다. 소첩의 이름이 바로 그것에서 유래했기 때문이지요.”

    “그럼 탄월이 검술 이름이었더냐?”

    고개를 끄덕인 탄월이 두 손으로 칼을 쥐더니 갈지자로 전진 후진을 반복했다. 민첩한 보법으로 마당에 인 흙먼지가 새벽 햇살을 받아 안개처럼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몸을 솟구쳤다가 사뿐히 착지하며 탄월이 외쳤다.

    “달빛을 튕기듯이 가볍게, 이지러졌다 부풀 듯 변화무쌍하게!”

    신검 초의객

    대장장이 칠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혜령과 필령은 남장을 한 채 팔도를 유랑했다. 지방 도회지 거지 무리에 섞여 동냥하기도 했고, 북변의 큰 절에 머물며 공양주들 뒤치다꺼리로 생계를 잇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복수를 꿈꾸던 소녀들이 바라던 삶일 수는 없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검객으로 키워줄 스승을 찾아 방방곡곡 떠돌았다.

    철령 북쪽 최고 검객으로 이름을 떨치던 신검 초의객을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인간계를 벗어난 신묘한 검법으로 신검 칭호를 받던 초의객은 금강산 토굴로 찾아온 소녀들을 내치지 않았다.

    “동갑내기라 했느냐? 너희 둘?”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눈을 감았던 초의객이 천천히 입을 뗐다.

    “칼은 신분도 남녀도 가리지 않는다. 칼을 쥐는 순간 세상은 무차별하다. 내 너희에게 검법을 전수함은 다른 이유가 없다. 계집 몸으로 이렇게까지 할 땐 다 이유가 있는 법, 기왕 태어난 인생 한은 풀고 가야 할 것 아니겠느냐?”

    두 소녀는 초의객 밑에서 꼬박 5년을 수련했다. 제자들을 하산시키기 직전 초의객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 더 이상의 수련은 의미가 없다. 각자 타고난 그릇을 다 채웠기에 아무리 정진해 봐야 검술이 더 늘지 않는다. 하여 난 너희에게 서로 다른 검법을 전수했다. 혜령에겐 해의 강렬함과 직진성을, 필령에겐 달의 은밀함과 민첩성을 강화했다. 그러하니 각자 떨어져 싸울 때보다 함께 어울려 싸울 때 그 힘은 주체할 수 없이 강해질 것이다.”

    초의객은 혜령과 필령에게 각각 탄일검과 탄월검을 하사하면서 그녀들이 남은 삶을 살아가며 사용할 검호까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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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장 검객

    “그렇게 익힌 검술로 그동안 음지에서 먹고살았던 것이냐?”

    응천의 질문 속에는 냉소의 기운이 스며 있었다. 칼을 칼집으로 회수한 탄월이 마당 중앙에 꼿꼿이 서서 대답했다.

    “저희는 복수를 위해 살아남은 자들이었습니다. 남장을 하고 곧바로 한양 도성에 도착했지요. 마음 같아선 좌상 집으로 돌진하고 싶었지만 참고 또 참았습니다. 기왕 복수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응천이 막 내리쬐기 시작한 햇살을 피해 툇마루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은 탄월이 몇 걸음 이동해 응천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며 말을 이었다.

    “사대문 안 칼잡이들을 차례차례 꺾는 데는 두 달이면 충분했습니다. 힘이나 주먹이라면 몰라도 칼이라면 저희에게 대적할 자가 없었지요. 장안의 어깨들과 자웅을 겨루던 그 시절이 소첩에겐 그지없이 행복했습니다.”

    은은한 만족감이 탄월의 입가를 살며시 쓸고 지나갔다. 그 기미를 감지한 응천이 미끼를 문 물고기를 낚아채듯 잽싸게 물었다.

    “사람도 많이 죽여봤겠구나? 그렇지?”

    기묘한 떨림이 탄월의 눈가를 따라 흘러내리더니 입꼬리 언저리에서 경련을 일으켰다.

    “협객들끼리 싸우는 건 본디 목숨을 거는 겁니다. 사람을 죽이려 싸우진 않지만 싸움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끝난다 한들 강호에서 그게 뭐 대수였겠습니까? 목숨이란 한없이 귀하기도 하지만 더러 헝겊 조각만도 못한 게 세상 이치지요.”

    “그래서 몇이나 죽였더냐?”

    한참을 응천을 응시하던 탄월이 낮고 견고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남장 검객으로 살며 빼앗은 목숨 개수보다 칼춤 추는 검무기로 변장해 좌상 집 연회 자리에서 빼앗은 목숨 수가 곱절은 될 겁니다.”

    죽음의 연회

    탄일과 탄월이 한양 왈짜패들과 어울리며 얻어낸 건 금전만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조직의 정보력을 이용해 정 판서 댁을 급습했던 의금부 나졸 명단을 확보했다. 어떤 자들은 돈을 받고 은퇴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승진해 병부나 총융청 요직에 좌상의 하수인들로 똬리를 틀고 있었다.

    탄일과 탄월은 원수인 나졸들을 꼼꼼하고 잔인하게 죽여나갔다. 복수의 기미가 혹여 좌상 끄나풀들에게 전해질까 저어해 암살은 시간차를 두고 띄엄띄엄, 그러나 정확한 간격을 유지하며 수행됐다. 은퇴한 자들과 병부 관원들을 모두 처치하자 마침내 총융청 순서가 됐다. 때마침 그 무렵 조직으로부터 새로운 전갈이 도착했다. 좌상의 장수를 비는 미수연이 인왕산 아래 별장에서 벌어진다는 소식이었다.

    “연회장 경호를 총융청이 담당한다더군. 한양 수비 병력을 좌상이 제멋대로 부리는 거지.”

    탄일이 입술을 깨물며 말하자 탄월이 이어 말했다.

    “아가씨, 오히려 잘됐습니다. 총융청에 남아 있는 원수들까지 단숨에 죽일 기회이지 않습니까? 제게 좋은 꾀가 하나 있습니다.”

    탄월이 낸 꾀는 근사했지만 위험한 것이었다. 칼춤으로 여흥을 돋우는 기녀인 검무기로 위장해 연회장에 잠입하자는 그녀의 계획에 대해 탄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위험하다. 이건 우리의 암살을 눈치챈 좌상의 함정일 수도 있어. 게다가 내 부모님을 도륙했던 종사관 놈이 지금 총융청 수장인 총융사로 있지 않니? 놈은 막내딸인 나마저 잡겠다며 우리 뒤를 끈질기게 추적했던 자야. 설령 들키지 않고 잠입한다 해도 검무기가 쓰는 가짜 칼로 무얼 할 수 있겠니?”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탄월이 천천히 입을 뗐다.

    “뭐 검무를 출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칼을 넣는 검합 속에 진검을 숨겨 입장해 곧바로 일을 벌이면 됩니다. 함정이면 뭐 어떻습니까? 아직 아가씨 검술과 제 검술을 합해서 구사해 본 적은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 처음으로 해보는 겁니다.”

    “그래볼까? 너와 내가 하나의 검술로 합쳐지면?”

    “둘이 합치면 주체할 수 없이 강해진다! 스승님 말씀이시지 않았습니까?”

    얼마 후 검무기로 위장해 인왕산 별장 연회장에 들어서려는 순간, 그녀들은 자신들이 함정에 빠진 것임을 즉각 눈치챘다. 위험을 감지하는 기민한 후각을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탄월은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검합에서 탄월검을 꺼내 든 그녀는 대문을 시위하던 갑병들을 베자마자 무희 무리 속에 몸을 숨기고 안채 마당으로 진입했다.

    미리 방 안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궁수들이 쏜 화살에 무희들은 낙엽처럼 쓰러져갔다. 간신히 대청마루로 몸을 피한 탄월이 뒤를 돌아보자 담장을 딛고 몸을 솟구친 탄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탄일검에서 번뜩인 살기는 빛의 속도로 움직이며 궁수들 목을 스쳐 지나갔다. 궁수들은 자신들이 누구 손에 죽는지 깨닫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햇빛을 튕기듯이 무겁게, 화염을 쏟아붓듯 강렬하게!”

    땅에 착지한 탄일이 외치자 탄월이 몸을 뒹굴려 그녀 옆에 섰다. 그녀들은 갈지자로 엇갈려 전진하며 닥치는 대로 베어나갔다. 하나가 해가 되어 직진하면 다른 하나는 달이 돼 주변을 회전했고, 하나가 횡으로 공격하면 다른 하나는 종으로 비껴 치며 길을 냈다. 총융청 무사들을 모조리 죽인 그녀들은 총융사 머리를 잘라내고서야 멈췄다.

    “살기가 제어되지 않는구나, 이를 어쩌지?”

    탄일이 탄월에게 속삭였지만 그녀들이 올라탄 죽음의 춤은 이미 사람의 의지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날 연회에 참석한 좌상 부부를 비롯해 그 일족 모두가 참수됐고, 뒤미처 좌상의 장수를 빌려고 방문했던 수많은 조야의 측근들까지 목숨을 잃었다.

    자결

    “그런 모진 일이 벌어졌단 소문을 내 들었던 것도 같다. 그게 네 짓이었구나?”

    침통한 표정의 응천이 속삭이자 탄월이 그를 향해 절을 해 하직 인사를 올렸다. 비틀대며 몸을 일으킨 응천이 물었다.

    “한데 네 주인인 혜령 낭자는 어찌 됐느냐? 아직 검객 탄일이 돼 천하를 떠돌고 있느냐?”

    살짝 고개를 저으며 눈길을 아래로 향한 탄월이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복수를 마친 혜령 아가씨께선 자결하셨습니다.”

    “자결을? 그 빼어난 검술로 왜 자결을?”

    마른 한숨을 몰아쉰 탄월이 두 손을 꼭 움켜쥐며 대답했다.

    “저야 종으로 태어난 미천한 몸이라지만 아가씨는 양반가 숙녀이시지 않습니까? 원한을 풀었으니 이승의 인연을 다했고, 살인한 처지에 더 바랄 삶의 기쁨도 없다 하셨습니다. 자결해 구천에 계신 부모님께 못다 한 효를 바치겠다고도 하셨지요. 대신 모든 이승의 악업은 아가씨께서 짊어지고 떠날 테니, 저만은 부디 기개 있는 사내를 만나 못 이룬 큰 뜻을 마저 이루라 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날 찾아와 첩이 됐다?”

    눈을 가늘게 뜬 응천이 탄월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는 그렇게 탄월을 오래 쏘아보다 헛기침을 몇 차례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비록 싸움도 못 하는 필부이지만 사람 볼 줄은 안다. 보아하니 넌 계집종 필령이가 아니다! 그러니 탄월도 아닌 셈이지. 도대체 넌 누구냐? 내게 한 말이 다 거짓이 아니라면 넌 필시 혜령이어야 마땅하다! 검객 탄일이 너 맞느냐?”

    응천의 호통을 들은 탄월의 어깨가 잠시 출렁였다. 마침내 그녀가 신음하듯 물었다.

    “그걸 어찌 아셨소? 내 연기가 그리 싱겁더이까?”

    툇마루에서 내려선 응천이 대답했다.

    “판서 댁을 탈출하던 날 네 어미가 어찌 됐는지 물었건만, 그 대답이 영 신통치 않았다. 친딸이라면 그런 반응이 나올 리 없지. 게다가 네 태도와 말투는 종의 그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곱고 위엄이 있다. 적어도 종이었다면 사내 앞에 꼿꼿이 서서 해를 가려주는 여유가 몸에 뱄을 턱이 없겠지.”

    긴 실을 쥔 자

    복수를 마치고 인왕산을 넘어 도주한 탄일과 탄월은 주인을 잃고 버려진 외딴 암자로 숨어들었다. 탄일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래전부터 말했듯 우리 둘 다 살 순 없어. 함께 움직이다 보면 들키기 십상이고, 따로 떨어져도 잡힐 가능성이 두 배로 느는 셈이야. 하나만 살아남아 죽은 사람 몫까지 살도록 하자.”

    지친 기색의 탄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탄일이 물었다.

    “그럼 무엇으로 정할까? 죽을 자와 살 자!”

    탄일을 그윽이 바라보던 탄월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가씨께서 늘 좋아하시던 그 방법으로 하시지요? 이년은 그저 따르겠습니다.”

    “그럴까?”

    탄일이 주머니에서 실 두 가닥을 꺼내 자기 주먹 안에 움켜쥐었다. 둘은 각자 실 한 가닥의 끝을 잡아 주먹 밖으로 당겼다. 긴 실을 쥔 자가 이기는 내기였다.
    “내가 또 이겼네!”

    탄일이 속삭였다. 긴 실 쥐기는 둘이 금강산을 하산한 뒤부터 줄곧 해오던 내기였다. 위험한 대결을 벌이거나 죽기 십상인 사지로 진입하려 할 때면 늘 그 내기로 순서를 정했었고, 언제나 탄일이 이겼다. 망설임 없이 칼날을 목에 대며 탄월이 희미하게 속삭였다.

    “혜령 아가씨! 부디 제 몫까지 훌륭히 사소서. 소임을 다했나이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문인 안석경의 야담집 ‘삽교만록’ 속 일부를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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