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국가가 모든 문제 해결하는 나라는 독재국가뿐

[김태일의 대자보]

  • 김태일 국가교육위원회 위원·前 신전대협 의장

    입력2024-01-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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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현수막으로 불거진 규제 만능론

    • 국가 주도 모델로 성장했으나

    • 나라는 ‘감시’하지 말고 ‘감사’하라

    [Gettyimage]

    [Gettyimage]

    ‘낚시 못 하는 낚시 공원’이 있다. 한 곳도 아니다. 전북 군산, 경남 거제 등 보도된 곳만 두 곳이다. 세금 수십억 원이 들었다는데, 운영자를 찾지 못해 방치되고 있다. 공공사업 사례를 살피다 보면 이 같은 일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랏일이라는 핑계로 헛돈을 쓴 사실이 알려질 때마다 댓글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힌다. “실효도 없는 사업에 이렇게 큰돈을 쓴다고?” “나랏일이 그렇지 뭐.” 그만큼 나랏일은 국민의 신뢰와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정부가 나서길 바란다. 정부의 관심이 문제 해결의 척도가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도로변에서 심심찮게 예산 관련 현수막을 볼 수 있다. 예산을 유치했다면 축하하는 내용이고, 반대로 예산이 줄었다면 이에 반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선거철에는 이 같은 현상이 더 심해진다. 정치인들은 예산 확대를 주요 성과로 내세우고, 예산이 삭감됐다면 이를 두고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도 한다. 정부를 못 믿으면서도 정부의 관심을 갈구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현수막이 문제가 됐다. 정당 현수막이 길거리에 난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 개정안이 국회 소관 상임위 문턱을 넘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2023년 11월 1일 ‘옥외 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 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의 별명은 ‘정당 현수막 난립 방지법’이다. 정당 현수막 개수를 읍·면·동별로 2개씩만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다. 이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이 생긴 이유는 정당이 현수막을 우후죽순 내건 데 있다. 수량 제한이 없는 데다가 문구도 규제하지 않아 ‘공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법 통과로 수량 제한이 생겼으나 문구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과연 현수막 문구까지 규제해야 할까.

    생기면 지우기 힘든 규제라는 함정

    2023년 8월 1일 진보당이 서울 강서구에 건 정당 현수막. [뉴스1]

    2023년 8월 1일 진보당이 서울 강서구에 건 정당 현수막. [뉴스1]

    일단 규제가 무엇인지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규제의 정의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규칙이나 규정에 따라 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 설명만 보면 규제는 금지의 정도를 정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규제는 다르다. ‘금지 사항’을 제시하지 않는다. ‘가능한 것’만 명시하면 그 외 사항은 금지되는 구조다. 예를 들어, 대학의 학생과 등록금을 정해준다. 도서관 등 시설 개수와 규격, 직원 수도 정해져 있다. 정해준 지침을 따르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정해진 선이 있으니 더 잘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규제는 앞장서서 뛰려는 이도 주저앉게 만든다. 불합리해 보이는 조항들을 없애려 하면 무질서한 후폭풍이 우려된다며 시기상조라는 반응이 이어진다. 현수막도 마찬가지다. 내용 규제가 생기면 천편일률적 내용만 현수막에 오르내리게 된다. 누군가는 재치 있다고 생각한 문구도 영영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규제 그 자체에 드는 비용도 문제다. 하나의 규제가 생기면, 설계·도입·집행·홍보·관리·분석·감사·감시·조정·개선·유지·보수·기회비용 등의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이 뒤따르게 된다. 그로 인한 갈등 양상의 사례 모음집이 있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렇다고 규제를 없애는 것도 쉽지 않다. 이미 생긴 규제에는 ‘수혜자’가 있기 때문이다. 규제 혁파에 나서게 되면 수혜자들의 반발이 뒤따르는 건 당연지사다. 아예 안 주는 것보다 줬다 뺏는 게 더 원망을 사는 일 아니겠나. 결국 수혜자가 더 확대되는 방향으로 수정되는 것이 이른바 ‘규제의 관성’이다.

    사실 규제 등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실생활에 빗대 생각해 보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경우 일의 완성도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인테리어, 결혼식 등 관련 업체 리뷰를 보면 ‘내 맘에 쏙 드는’이란 문구가 종종 보인다. 그만큼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을 처리해 주는 업체가 드물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관련 인터넷카페에 들어가 보면 인테리어 업체나 웨딩업체의 일 처리를 문제 삼는 글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국가 서비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나라가 다 해준다’던 공산주의 국가만 봐도 알 수 있다. 국가가 배급을 해준다지만 공산주의 국가의 국민들은 암시장을 항상 달고 산다. 국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암시장을 이용하면 처벌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이를 각오하고 암시장을 만들고 이용하고 있다. 그렇게 ‘공공만능주의’의 모순은 공산·사회주의 체제 붕괴의 본질적 원인이 됐다.

    개혁 시작에 국민이 있어야

    정부가 아니라 민간업체에 맡기자는 의견도 있다. 책임의 주체를 정부에서 민간으로 돌리는 일도 능사는 아니다. 2023년 11월 17일 ‘정부24’를 포함한 각종 디지털 행정망 장애로 논란이 이어졌다. 이의 핵심 원인으로 ‘소프트웨어진흥법’이 지목되기도 했다. 공공 SW 사업의 대기업 참여가 배제돼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이라고 완벽했을까. 11월 27일 서울 소방재난본부의 전산망이 마비되는 사건이 있었다. 해당 전산망을 운영하던 회사는 대기업인 KT였다.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는 자사 보안팀에 토스 시스템을 해킹해 보라고 주문한다. 해킹을 해봐야 보안의 미비점을 찾을 수 있다는 발상이다. 다른 회사에 맡길 바에 본인들이 직접 해결 역량을 키우려는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비바리퍼블리카의 예처럼 직접 문제를 관리하는 편이 가장 좋다. ‘누구에게 일을 맡길까’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무리 답답하고 시급해도 이것이 국가에 떠넘길 책무인지 매 순간 숙고하는 편이 좋다. ‘내 일’을 해결할 효율적 방법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돌이켜보자.

    규제 만능론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기저에 있다. ‘큰 정부’는 해결사지만, ‘작은 정부’는 비겁하게 사회문제를 외면한다는 것. 그러나 비대한 권력이 우리 삶에 사사건건 과다하게 개입하는 일은 위험하다.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드는 셈이 된다. 우리는 과거, 이 같은 사회를 ‘독재’라는 이름으로 겪은 적이 있다.

    결국 사회에서 벌어진 문제는 국민들이 직접 자정하는 것이 가장 좋다. 대한민국은 지난 수십 년간 ‘국가 주도 모델’로 폭발적 성장을 이뤄낸 나라다. 그러나 이젠 세상이 다각도로 급변하고 있다. 국가 조직만으로는 그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국가는 지금까지 정부를 믿고 동행해 준 국민에게, ‘감시’가 아닌, ‘감사’를 돌려줄 때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개혁이고,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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