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5·6공 주역, 정호용 전 국방장관

“나는 친구 노태우에게 배신당했다”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5-10-24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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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공 주역, 정호용 전 국방장관
    10월14일 오전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정호용(鄭鎬溶·73) 전 국방부 장관을 만났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 하나회 멤버로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언론 인터뷰는 10여 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그에게서 1990년 1월 3당(黨) 합당 직전 의원직을 사퇴한 까닭부터 들었다. 1989년 12월31일 백담사에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회 5공청문회에 출석해 ‘광주 민주화운동’ 등에 대해 증언했다. 그 며칠 후인 1990년 1월8일 정호용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은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어 14일 뒤인 1월22일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3당 합당을 선언했다.

    -1990년 1월8일 ‘국가 안정’을 내걸고 의원직을 사퇴했는데….

    “당시 야당은 5·18의 책임을 물어 나를 의원직에서 사퇴시키라고 민정당을 거세게 압박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5·18에 대해 내게 법적·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5·18의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안정을 명분으로 사퇴한 것입니다.”

    당시 언론은 “13대 총선으로 형성된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에서 민정당 김윤환 총무(작고)와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김원기(현 국회의장) 총무의 막전 막후 줄다리기를 통해 정호용 의원의 의원직 사퇴가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정 의원의 사퇴는 여야 총무의 뛰어난 협상력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정 전 장관에 따르면 이 같은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그의 사퇴는 ‘원내총무선’에서 다뤄진 사안이 아니었다.



    전두환, 노태우, 그 다음은 정호용

    - 5·18에 책임이 없다면서도 야당의 요구에 응해 사퇴한 이유가 뭡니까.

    “당 일각에서 내게 의원직 사퇴를 권유했습니다. 나는 거부했죠. 야당이 아무리 거세게 압박한다 해도 응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이 나를 불러 사퇴를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국가와 당을 위해 그렇게 해달라면서 친구인 자신을 꼭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에 의원직 사퇴를 하면 석 달 뒤 대구 서구갑 보궐선거에 공천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더군요.”

    -의원직 사퇴가 노 대통령에게 왜 그토록 절실했습니까.

    “노 대통령과 YS(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 JP(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 사이에 은밀하게 3당 합당이 추진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를 퇴진시키라는 것이 YS, JP가 내건 3당 합당의 전제조건이었습니다.

    그건 3당 합당 이후의 후계구도를 염두에 둔 것이었죠. YS는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은 육사 11기 동기인 절친한 친구들로 5·6공화국을 세운 주역이다. 전두환·노태우가 대통령을 했으니 다음 대권은 정호용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야 육사의 같은 기수에서 대통령이 세 명이나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실제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 전 장관을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에 임명해 행정 경험을 쌓게 했다). 당시 노 대통령에게 3당 합당은 절체절명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의원직을 사퇴한 겁니다.”

    “친구인 대통령이 배신할 줄이야”

    - 석 달 뒤인 4월3일 대구 서구갑 보궐선거에서,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민자당 공천에서 배제됐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이 약속을 어기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친구이기도 한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크게 느꼈어요. 오죽했으면 아내가 목숨을 끊으려고 했겠습니까. 그래서 명예회복을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입니다.”

    대구 서구갑 보궐선거는 ‘5공 청산’과 ‘3당 합당’의 정당성을 심판받는 상징성을 띠게 됐다. 노태우 대통령과 민자당은 정권의 명운(命運)을 걸었다. 문희갑 당시 민자당 후보의 강력한 라이벌은 무소속 정호용 후보였다. 그러나 정 후보는 중도에 후보직을 전격 사퇴했다.

    -그때 일부 언론에서 ‘비자금이 포착되어 사퇴 압박을 이기지 못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안기부에서 나를 밀착 감시하고 내 주변 사람들을 샅샅이 뒤지며 못살게 굴었습니다. 여권의 회유와 압력은 상상을 초월했어요. 결국 그걸 이기지 못해 후보를 사퇴한 겁니다. 내가 만약 부정한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면, YS 정권 때 소급입법으로 5·18 특별법까지 제정해 나를 내란죄로 처벌한 검찰이 그걸 못 찾아냈을 리 없죠.

    후보 사퇴 후 미국으로 갔습니다. 안기부 미국지부에서도 나를 철저히 감시합디다. 장인상(喪) 때 귀국해 노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했더니 대통령은 ‘급한 일도 끝났고 하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죠.”

    정 전 장관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1월31일 12·12 반란 및 5·18 내란 혐의로 구속되어 다음해 대법원 판결로 유죄가 확정됐다. 이로써 두 번째 국회의원직도 중도에 상실했다. 그는 이 재판 결과에 불복하고 있다. 그러나 12·12의 주역인 전두환 전 대통령측과는 불복의 사유가 다르다.

    -대법원 판결에 대한 견해는 무엇입니까.

    “검찰이 정치적 목적으로 기소한 것을 재판부가 그대로 받아준 전형적인 ‘정치재판’입니다. 나는 1979년 12월12일 밤 정승화 총장이 연행될 때 대구에서 50사단장으로 있었습니다. 12·12와 관련해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등과 사전에 전화통화 한번 한 적이 없어요. 12·12 이후 전 전 대통령의 배려로 내가 참모총장도 되고 장관도 되어 덕을 봤으니 ‘12·12 가담자’라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

    5·18 당시에는 특전사 사령관이었습니다. 내 휘하 특전사 소속 군인들이 광주의 시위진압에 동원되어 많은 광주 시민이 희생된 데 대해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계엄사령관의 작전명령을 받아 광주를 관할하는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특전사 3개 여단을 배속시켜 지휘를 받도록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나를 5·18 진압군의 지휘권자로 엮어넣지 않으면 신군부 전체가 5·18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내게 덮어씌운 것입니다. 또한 나를 12·12 가담자로 만들지 않으면 신군부와 5·18의 고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정승화 총장 체포 등 12·12에 전혀 가담하지 않은 나를 12·12 반란자에 포함시켰어요.”

    - MBC 다큐멘터리 ‘80년 5월 두 개의 반란’에 따르면 전투교육사령부 고위 장교들이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진압을 위해 광주에 내려왔다”면서 시위대에 사격하라는 지시 권한이 특전사에 있었다는 취지로 증언했습니다.

    “전교사 고위 장교들은 객관적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광주에서의 시위진압은 특전사 군인들을 배속받아 지휘권을 행사한 전교사가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늘에 맹세코 발포(發砲)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를 지휘하지도 않았어요.”

    “광주에서 내 지휘받은 군인 없다”

    - 증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내가 발포명령이나 작전지휘를 했다면 나로부터 그런 명령을 받은 특전사 장교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소속 3개 여단의 여단장 3명, 그 여단에 소속된 12개 대대의 대대장 12명, 또한 12대 대대 휘하의 여러 중대장 중에 누군가는 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검찰은 이들을 모두 소환해 집중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5·18 때 광주에서 내 지휘를 받았다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들이 YS 정권하의 검찰에 불려가서 YS와 대립관계이던 나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해줬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나로부터 명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런 명령이 실제로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들은 검찰에서 전교사로부터 작전지휘를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발포명령은 자위권 차원에서 중대장, 대대장급에서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나는 1심에서 5·18과 관련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법원이 양심적으로 판결한 거죠. 그러나 2심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나는 12·12와 5·18의 유일한 연결고리이기 때문에 내가 무죄가 되면 신군부를 5·18 특별법으로 처벌하는 전체 구도가 헝클어지게 돼 있거든요. 재심을 청구할 계획입니다.”

    최근 종영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정호용 전 장관은 거의 매회 비중 있는 배역으로 그려졌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자신과 관련된 부분 하나하나를 정리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반박하는 자료를 만들었다. 자신이 등장한 21개 장면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생존인물과 실제 사건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보여주는 역사 드라마이면서 고증을 안 거쳤습니다. 내가 등장한 21개 장면에서 하지도 않은 말,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처럼 연출했습니다. 5·18 때 최웅에게 ‘공수부대가 일반시민에게 밀린다는 게 말이 되나, 어!’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건 재판에서도 증명됐어요. 이 드라마는 5공 인사들을 악의적으로 욕보이겠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만들었어요.”

    “드라마 속 내 캐릭터, 나와 다르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1999년 건국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 드라마에서 묘사한 본인의 성격은 실제와 얼마나 닮았습니까.

    “나와는 체형이나 외모가 전혀 다른 탤런트가 출연했더군요. 드라마는 나를 괄괄하고 외향적인 성격에 목소리가 크고, 상급자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아, 아, 데모하는 새끼들은 더 세게 밟아버려야 합니다!’라는 거친 말을 내뱉는 캐릭터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내성적이고 차분히 말하는 사람입니다. 상급자 등 주변 인사들에게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살고 절제된 언어를 써온 것은 나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이 드라마는 인물 연구가 안 되어 있습니다. 실제 인물을 그리면서 사실과 너무 다르게, 부정적인 쪽으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다음은 드라마의 대사와 이에 대한 정 전 장관의 반론(괄호 안)을 밝힌 그의 자료 중 일부다.

    -12·12 당일 밤백운택 장군 : “나 백운택이다! 니가 빨리 서울로 올라와야겠다.”정호용 50사단장 : “무슨 일이야?”백운택 : “일이 벌어졌어. 무조건 올라와!”벌떡 일어나는 정호용, 권총집에 권총을 넣고는 밖으로 나간다.(12월12일 백운택 장군과 통화한 일이 없다.)

    -보안사령관실전두환 : “인자 우리 11기가 군의 중심이 됐어. 정 장군이 특전사를 맡아서 최강의 공수부대를 한번 만들어봐!”정호용 : “알았다. 두환이하고 노태우, 너들이 수고 많았다. 우쨌든 고맙다.”전두환 : “그래.”(전두환, 노태우 장군과 회동한 일 없다. 12·12 이전에 이미 특전사령관으로 인사이동이 예정돼 있었다.)

    정호용 전 장관은 1970년대 전북 지역에서 특전사 여단장을 하면서 당시 30대 전남지사이던 고건 전 총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고 전 총리에 대해 “인물과 능력이 출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 전 장관은 1980년 5·17 당시 고 전 총리의 행적에 대해선 고 전 총리와는 다른 시각을 보였다.

    그간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조치가 확대됐을 때 고 전 총리가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1주일간 잠적했다’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해 고 전 총리는 “5·17 비상계엄 확대를 의결하는 국무회의에 배석하라는 비서실장의 지시가 있었다. 본인이 제출한 ‘계엄령 조건부 해제’ 건의안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비상계엄 확대는 군정(軍政)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군정을 절대로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상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사표를 제출한 후 청와대에 출근하지 않았다. 이유없이 청와대에 출근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 4개월 뒤인 1980년 9월1일 전두환 장군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고 전 총리는 교통부 장관에 발탁됐다. 비상계엄은 다음해인 1981년 1월24일 해제됐다. 정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고 전 총리의 일에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고 전 총리가 군정(비상계엄조치 전국 확대)을 반대했기 때문에 사표를 제출하고 칩거했다는 것은 좀 이해가 안 됩니다. 비록 소수 의견이지만 대통령 정무수석으로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명하는 것이 공직자의 자세가 아닐까요. 그런데 고 전 총리 말대로 그가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강력히 반대한 인사였다면 4개월 뒤 출범한 5공 정부가 그를 초대 장관으로 등용하지 않았을 텐데…. 그가 장관에 임명된 1980년 9월 당시에도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는 계속 발효되고 있었거든요.”

    50년 전 10월14일 그날

    정호용 전 장관은 2002년 대선 때 ‘전국정씨연합회 총재’로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통령후보를 개인적으로 후원했다. 정 전 장관은 “정 후보의 선친인 정주영 전 회장이 초대 전국정씨연합회 총재였다. 월드컵 4강 등으로 200만명 정씨 문중에서 대통령이 배출되나 했는데 정몽준 후보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며 웃음지었다.

    정 전 장관과 인터뷰한 날은 그가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된 지 정확하게 50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오후 부인과 함께 기념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23세의 나이에 동기생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소위 계급장을 달고 기뻐하던 50년 전 오늘이 엊그제 같다. 나는 특전사 사령관이 가장 적성에 맞는 야전 군인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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