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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바이킹 해적

  •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 sukkyoon2004@hanmail.net

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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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약탈자 잉글랜드 왕조를 바꾸다

바이킹 해적이 활약할 당시의 북유럽 지도.

러시아 진출

세월이 흘러가면서 바이킹의 습격은 더 과감해지고 그들 세력 또한 내륙 깊숙이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800년대 초가 되면서 바이킹은 얕은 물에서도 항해가 가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지역으로 진출했다. 일부는 발트 해를 건너 러시아 대륙으로까지 들어갔다. 이들은 발트 해 가까운 내륙에 무역기지를 세우고 드네프로 강을 타고 흑해로 가거나 볼가 강을 타고 카스피 해에 이르렀다. 발트 해를 건너온 다음 중부 러시아의 두 강을 타려면 내륙의 먼 길을 걸어가야 했다.

이때 이들이 내륙으로 가져갔던 배는 전통적인 바이킹 선보다 아주 작은 것이었다. ‘통나무배(Dugout)’라고 알려진 이 배는 하나의 통나무에서 속을 파내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순풍일 때는 노의 힘을 좋게 하기 위해 작은 돛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배의 가장 큰 장점은 무게가 가볍다는 것이었다. 급류를 만나거나 배를 띄울 수 없는 얕은 강을 만나면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항해가 가능한 곳까지 운반하기도 했다.

바이킹은 러시아 대륙의 곳곳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들 ‘슬라브(Slav)’라 불리는 러시아 출신의 노예는 스웨덴에서 거래됐다. 슬라브 노예에서 노예와 노예제를 뜻하는 영어 단어 ‘slave’와 ‘slavery’가 유래했다. 이로써 당시 노예로 잡힌 러시아인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흑해로 진출한 스웨덴인 바이킹 ‘루스’(슬라브는 스웨덴인 바이킹을 루스라 불렀다)는 콘스탄티노플을 여러 번 무력으로 점령하려 했다. 비잔틴 제국의 기록에 따르면 907년 수만 명의 루스가 흑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비잔틴 황제는 바이킹에게 조공과 무역권을 주겠다며 강화를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루스는 몇 년 뒤 재차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등 비잔틴 수도원과 마을을 약탈했다. 루스는 그 땅에 ‘러시아’ 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비잔틴 제국뿐 아니라 아랍 세계와도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바이킹의 포악성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도 어쩌지 못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러한 용맹성과 포악성으로 스웨덴 바이킹 중 일부는 비잔틴 황제의 근위대로 선발돼 황궁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는 것이다.

파리 침공

바이킹은 본격적으로 유럽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먼저 프랑크 왕국의 파리를 침공했다. 885년 11월 24일 노르만 바이킹은 700여 척의 바이킹 선에 바이킹 전사 4만 명을 싣고 센 강을 거슬러 파리로 올라왔다. 센 강 하류 20리 지점까지 길게 뻗친 바이킹 선 행렬 때문에 강물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바이킹의 목적은 파리를 거쳐 비옥한 내륙지역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바이킹에게는 당시 센 강변의 작은 도시이던 파리보다 내륙 깊숙한 곳의 비옥한 땅이 더 매력적이었다. 센 강을 따라 올라가려던 계획은 파리에서 센 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다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성탑으로 요새화 한 두 다리를 파괴해야만 배가 지나갈 수 있었다.

프랑크 왕국의 군사들과 파리 시민들은 노르만 바이킹에 맞서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나 2월초 쏟아진 폭우에 두 개의 다리 중 하나가 유실되고 말았다. 바이킹은 그 틈을 이용해 다리가 있던 지역을 신속하게 통과해 내륙으로 올라갔다. 나머지 바이킹은 뒤에 남아 파리를 계속 옥죄었다. 포위가 1년쯤 계속되자 파리 시민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이 무렵 ‘비만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황제 샤를 3세가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전투 한 번 벌이지도 않고 협상을 하고 말았다. 바이킹에게 내륙 통행을 허가하는 대신 한겨울에만 내륙지방을 약탈하고 그다음 해에는 물러간다는 조건이었다. 또한 전별금으로 은 700파운드를 약속했다. 바이킹은 내륙에서 약탈한 전리품과 전별금까지 챙겨 센 강에서 해안 쪽으로 유유히 철수했다.

이후에도 노르만 바이킹의 침략에 시달리던 샤를 3세는 911년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바이킹이 침략한 지역을 아예 봉토로 떼어주고 대신 충성서약을 받는 방식을 택했다. 바이킹도 약탈하던 지역을 자기 땅으로 만들었으니 달리 불만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북부에서 영국해협을 접하며 자리 잡은 나라가 ‘노르망디(Normandy) 공국’이다. 이후 영국에 노르망디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두 나라 간 복잡한 소유권 분쟁의 씨앗이 됐으며 수백 년 뒤 ‘백년전쟁(Hundred Years′War·1337∼1453)’의 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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