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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골라야 할지…아, 정말 미치겠어요”

요즘 20대 괴롭히는 마음의 병 선택장애

  • 심정현 |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차정은 | 고려대 국어교육과 2학년

“뭘 골라야 할지…아, 정말 미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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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합시다!”

정체성이 뚜렷하게 서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의존하게 된다. 의견이 일치하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땐 결정을 못하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물론 남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사자에게 최선의 선택을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다.

서울 한 대학가에서 5년차 미용사로 일하는 김세진(30) 씨는 “젊은 손님들 중엔 자기 머리를 어떻게 자를지 결정하지 못하는 분이 많다”고 전했다.

“많은 20대 남녀 분들이 미용사에게 머리를 이러이러하게 잘라달라고 먼저 주문하지 않아요. 미용사로부터 스타일을 추천받고도 쉽게 결정하지 않죠. 거울 앞에 앉아 5분 이상 아무것도 안 하고 고심합니다. 5분이면 머리카락이 한 움큼 잘려나가는 시간이죠. 심지어 ‘어느 정도 스타일이 정해진 뒤 가운을 두른 상태에서 그대로 할지 번복할지를 다시 고민하는 손님’이 ‘그렇지 않은 손님’보다 6대 4 비율로 더 많아요.”

한인숙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대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줄 때 큰 주제뿐만 아니라 구체적 내용들까지 세세하게 지침을 준다. 이러한 세부 지침이 없으면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한다”고 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해 창의적으로 구성하려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선택을 회피하는 것과 관련해, 우리는 동아리 선후배들인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1학년 윤모(20) 씨,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염모(여·22) 씨,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2학년 차모(여·21) 씨가 카페에서 만나 대화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이들은 카페에서 나와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명이 “여의도”라고 말하자 다른 두 명이 “거기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 다른 한 명이 “북서울 꿈의 숲”이라고 하자 다른 두 명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후 “하늘공원”이 나왔고 “뚝섬”이 나왔다. 이에 대해서도 “싫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어떤 장소가 나오든 똑같이 “좋다”고 하니 한 장소로 결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선택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위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투표를 했다. 이때도 자신이 무엇을 택했는지 먼저 드러나지 않도록 하려고 “하나, 둘, 셋”을 외치며 동시에 기표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게 ‘하늘공원에서 자전거 타기’였다. 그들이 이 선택을 하는 데 1시간 반이 걸렸다.

떡볶이를 먹을지 돈가스를 먹을지 등 다른 선택을 위해 세 사람은 이날 총 7번의 투표를 했다. 윤씨는 “‘친구가 선택한 것을 따라가면 그 친구도 좋고 나도 좋다’고 생각한다. 세 명이 모두 이렇게 생각하니 결정이 잘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선택지가 ∞(무한대)”

대학생 이은빛(여·22) 씨는 남학생 두 명과 함께 최근 서울 종로 보신각 부근에서 저녁식사 메뉴를 정하다 1시간여를 허비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웠다. 이씨는 “일행 중 한 사람이 선택장애를 갖고 있으면 일행 전체가 제대로 결정할 수 없다”고 귀띔했다. 회사원 이혜림(28) 씨와 이지혜(27) 씨는 늘 사내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먹는다고 한다. 이들은 “사내식당에선 메뉴를 선택할 권리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편하다”고 했다.

정보의 홍수로 선택을 못 하는 것과 관련해, 상당수 20대는 “지금 선택의 고민은 ‘자장면이냐 짬뽕이냐’의 차원을 넘어선다. 선택지가 거의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된 검색 시스템 덕에 선택장애가 더 쉽게 일어난다고도 한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2학년 송모(여·22) 씨는 얼마 전 ‘무스탕 재킷’을 사기 위해 인터넷에 ‘무스탕’을 검색했다. 12만9053건의 목록이 떴다. 해당 포털 사이트의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기획전만 101건에 달했다. 기획전당 평균 30점의 제품이 소개돼 있었다. 다른 종류의 겨울 외투를 소개하는 기획전들도 연관돼 나타났다. 송씨는 “고가(高價)이다보니 결정하는 데 더 신중해졌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선택지에서 내게 가장 잘 맞는 단 하나의 겨울 외투를 고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송씨는 마음에 드는 것들을 따로 정리해두는 ‘찜 목록’을 한 달 정도 이용했다. 그 목록에 수십 개 상품을 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상품들엔 ‘구매 불가’라는 표시가 떴다. 너무 오래 고민하는 사이에 찜해둔 상품이 품절된 것이다. 결국 송씨는 겨울 외투를 구매하지 못했다. 그는 “인터넷 쇼핑이 매장보다 싸니까 자주 이용하는데 상품이 너무 많아 결정하기 힘들다. 검색 분량에 자주 압도된다”고 했다.

강용 한국심리상담센터 대표는 “선택장애를 콕 집어 상담하러 오는 20대는 별로 없지만 이들을 상담하다보면 선택장애라는 점이 자주 드러난다”고 전했다. 강 대표에 따르면, 사소한 일을 결정하지 못하는 20대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인 배우자감이나 진로 선택도 스스로 하지 못한다.

강 대표가 치료한 선택장애 환자 중엔 초등학교 교사 A씨도 있었다. A씨는 진학 등 거의 모든 일을 부모의 결정에 의존해 살았다. 배우자를 고르는 일도 부모가 대신 해줬다. 강 대표는 “A씨와 같은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평생 아무것도 홀로 결정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로 가득 찬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홍익대 1학년 봉미정(21) 씨는 “동기들 대부분이 스스로 확신을 갖고 학과를 결정한 게 아니다보니 한 번씩 전과를 준비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고려대 2학년 허태훈(24) 씨는 “주변 친구들은 대체로 남이 정해놓은 표준적 기준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고 직업을 선택하려 한다. 입시공부에만 몰입하다보니 자기 내면의 동기에 의해 선택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스스로 진로를 결정하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뭘 골라야 할지…아, 정말 미치겠어요”

선택장애를 호소하는 사람은 커피전문점에서 메뉴를 고르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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