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레이건, 시중쉰, 김일성·정일을 보면 트럼프, 시진핑, 김정은이 보인다

북미중(北美中) ‘스트롱 맨’들의 숨은 그림자

  •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한국인을 위한 미중 관계사’ 저자

    jwc@khu.ac.kr

    입력2019-07-31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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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이건, 시중쉰, 김일성…북미중의 ‘죽은 제갈량’

    • 트럼프 정치 입문 권유한 레이건의 정치 참모

    • 회담장 박차고 나간 레이건, ‘친북 성향’ 시중쉰

    • 평화협정 말하며 핵개발 회귀한 北, 이번엔 다를까

    • 韓, 3국 전략적 사고 인식하고 성찰해야

    [AP=뉴시스]

    [AP=뉴시스]

    [AP=뉴시스, 윌슨센터 제공, 조선중앙TV 캡쳐]

    [AP=뉴시스, 윌슨센터 제공, 조선중앙TV 캡쳐]

    2012년은 ‘스트롱 맨’이 대거 출현한 해였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 일본의 아베 총리,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등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강한 국가 건설’을 내걸며 집권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초기에는 이들과 견줄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2017년, 미국에서 또 하나의 ‘스트롱 맨’이 출현한다.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강하다 못해 예측 불허인 리더십을 갖고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전략 판을 흔들기 시작했다. 집권 후 한 해 동안 진행된 대북 선제공격론은 김정은을 ‘스트롱 맨’으로 만든 측면이 있다. 김정은은 주변 4강의 ‘스트롱 맨’에게 강인함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2016년에만 24번, 2017년엔 18번의 미사일 발사 시험을 단행했다. 

    북미중(北美中) 3국의 ‘스트롱 맨’ 사이에서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의 봄’을 꿈꿨다. 2017년 5월 문 정부 출범 후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반도의 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를 우려한 듯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판문점선언 1주년을 맞아 한반도 정국을 ‘난국’으로 정의했다. 북한 비핵화 해결에 있어 정부가 자처한 ‘중재자’ 역할의 어려움을 실토하는 순간이었다.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숨고르기’를 하면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재정렬하겠다는 다짐도 엿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김정은은 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한다”고 면박을 줬다. 그리고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의 즉석 만남으로 문 정부의 성찰 결의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사실 현 정부의 ‘외교 참사’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은 무역분쟁으로 옮겨 붙으며 우리에게 어느 편인지 확실히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고, 일본은 한국 사법부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이유로 경제제재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주변 ‘스트롱 맨’을 상대하는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대응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지만 청와대와 외교부의 고뇌는 찾아보기 어렵다.

    소련 핵협상, 북핵 협상 데자뷔

    1984년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AP=뉴시스]

    1984년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AP=뉴시스]

    우리가 이들 ‘스트롱 맨’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외교 전략의 사고를 읽어내는 게 관건이다. 우선 트럼프의 외교 전략 사고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서 찾을 수 있다. 트럼프가 대통령선거 유세 때 내세운 대표적인 슬로건은 ‘위대한 미국 다시 만들기(Make America Great Again)’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였다. 이는 레이건이 1980년 대선에 사용한 구호인 ‘위대한 미국을 다시 만들자(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와 일맥상통한다. 이미 충분히 강한데도 더욱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두 지도자. 이들은 외교 현안에 대한 접근 방식도 비슷하다. 트럼프의 북한 비핵화 접근 방식과 레이건의 대소련 핵협상 전략이 그것이다. 

    레이건 이전 닉슨과 카터 전 대통령도 소련과 핵·미사일 감축 협상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레이건은 이들과 달리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총서기와 직접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다.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두 지도자 간 첫 협상이 이뤄졌고, 이후 총 세 번의 회담이 열렸다. 



    흥미로운 것은 두 번째 회담에서 레이건은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고 회담은 결렬됐다. 1986년 10월에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미소 정상회담에서 레이건 역시 트럼프의 2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처럼 ‘빅딜’을 모색했다. 그는 모든 탄도유도탄을 제거하면서도 미사일방어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권리는 유보하는 동시에 소련의 인권과 유대인 이민자,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침공 문제 등을 모두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탄도요격미사일협정(ABM) 조약의 강화 등 군축 의제에만 집중하거나 회담을 취소하자고 대응해 레이건이 회담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빌미가 됐다. 

    그러나 레이건은 전열을 재정비해 1987년 12월 세 번째 회담에 임했다. 이 회담에서 그는 중사정거리(5500km 이내)의 모든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과 발사체 폐기를 약속한 중거리 핵전략 조약(INF) 체결을 이끌어 냈다(이후 트럼프는 지난 2월에 INF 파기를 선언했고, 아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닉슨이 소련과 체결한 ABM 파기를 선언했다). 

    마지막 회담 전 1987년 6월 베를린 장벽 앞에서 한 연설에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이 장벽을 허물 것을 촉구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1986년에 발표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의지를 보이려면 소련이 베를린 장벽 개방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토대로 레이건은 1988년 5월 31일 모스크바 방문 때 소련과의 냉전 종결을 정식 선언할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붕괴됐고, 레이건은 냉전의 종결자로 역사에서 기억되고 있다. 

    레이건의 전략은 간단했다. 미국이 우세한 힘으로 소련을 몰아붙이면 견뎌낼 수 없다는 논리였다. 군사적으로 ‘전략 방어 이니셔티브(Strategic Defense Initiative)’를 기반으로 하는 이른바 미사일방어시스템과 ‘스타워즈’ 군비 경쟁에 소련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원유 증산을 요구해 석유값 하락을 유발했는데, 이는 석유와 가스 수출에 의존하던 소련의 ‘경제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전략을 동원한 것이었다. 그 결과 미국은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한 손으론 강력한 대북제재를 유도하면서 북한의 경제 아킬레스건을 움켜쥐고, 한 손으론 “좋은 친구”라며 김정은과 악수하는 트럼프가 떠오른다.

    트럼프 자문한 레이건의 참모

    트럼프의 외교 행보가 레이건의 외교 전략 사고와 연관성을 갖는 것은 레이건의 정치 참모였던 리처드 스톤(Richard Stone) 때문이기도 하다. 스톤은 레이건의 모든 대선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1980년 트럼프가 미국 정계에 진출한 배후에도 스톤과의 인연이 작용했다. 스톤의 요청으로 트럼프는 레이건 대선 캠프에 20만 달러를 기부한다. 당시 스톤과 맺어진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면서 트럼프 역시 2016년 대선에 성공했다. 트럼프에 대한 스톤의 ‘정치 자문’이 40여 년간 지속되면서 트럼프의 외교가 레이건과 유사하다는 평을 듣는 근간이 된다. 

    오늘날 트럼프가 중국 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것도 레이건의 외교 전략 사고와 닮았다. 트럼프 또한 레이건처럼 대만과의 관계를 격상시키려고 했고, 대만과의 관계 강화 전략을 레이건의 전철에서 찾았다. 레이건은 중국과 1982년 8월 27일 ‘상하이 공동성명’을 이끌어내면서 미국의 국내법에 불과하던 ‘대만관계법’(1979년 제정)을 중국도 인정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트럼프 역시 지난해 3월 ‘대만여행법’에 서명하면서 대만과 미국의 고위급 상호방문과 접촉을 합법화했고, 올해 5월에 미국 하원은 ‘대만보증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통상무역관계에서도 레이건처럼 취임 직후 대(對)중국 압박을 마다하지 않았다. 차이점은 트럼프는 압박을 누그러뜨릴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시진핑은 어떨까. 시진핑은 그의 정치 신념, 관념과 가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을 꼽는다. 시중쉰은 중국공산당 혁명 1세대 출신이자 중앙위원이었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과 함께 중국공산혁명의 승리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1962년 반당(反黨) 인사로 규정돼 부총리직에서 해임될 때까지 그는 당 내외에서 승승장구했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9년에는 이른바 ‘하방(下放)’ 당해 어린 시진핑과 같이 7년여 세월을 산시(陝西)성 량자허(梁家河)촌에서 보내며 나름의 정치철학을 마련하게 된다. 인민과 민중의 의미, 그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노동의 뜻을 아버지와 함께 곱씹는 경험을 한다.

    시진핑이 ‘친북 성향’인 이유

    1980년대의 아버지 시중쉰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지식의 숲 제공]

    1980년대의 아버지 시중쉰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지식의 숲 제공]

    1978년 시중쉰은 복권돼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하면서 두 가지 임무에 매진한다. 하나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공산당 당중앙위원회의 위원과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임부위원장으로서 보좌했다. 다른 하나는 북한 김일성과의 친분으로 대북관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김일성의 중국 ‘절친’ 중 한 명이었다. 북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모두 수행할 기회를 갖게 된다. 

    시중쉰의 복귀는 곧 대북 외교의 시작이었다. 그의 첫 대북 행보는 1980년 중국공산당 우호방문단 대표로 평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1962년 이후 18년 만에 김일성을 만난다. 김일성은 그가 문화대혁명 때 겪었을 고초와 치욕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러면서 세 번의 설득 끝에 시중쉰이 느낀 최대 치욕 등 개인적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정의 깊이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후 시중쉰은 김일성이 베이징을 방문할 때마다 베이징역에서 김일성의 영접과 배웅을 직접 수행했다. 그의 수행 임무는 1983년 김정일의 첫 비공식 방중으로 이어졌다. 시중쉰은 또한 김정일과 회담하면서 김일성-정일 부자와 두터운 유대관계를 마련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시진핑 역시 북한에 대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시진핑은 그 어느 중국공산당 지도자보다 더 강한 ‘친북 성향’을 보인다. 2008년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에서 낭독한 방문 기념 서한은 역대 중국 지도자의 서한 중 가장 길었다. 이후 6·25전쟁 참전 65주년 기념 연설에서 그는 중국군의 참전을 ‘정의로운 전쟁을 위한 정당한 조치’라며 중국군의 넋을 기렸다.

    미국에 ‘러브콜’ 보낸 김일성

    2002년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뉴시스]

    2002년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뉴시스]

    김정은 또한 정치적으로 선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언론에서 주목했듯 그의 해외 방문 동선(動線)과 옷, 헤어스타일뿐이 아니다. 미국과의 회담을 향한 열정 또한 김일성과 김정일 못지않다. 그리고 회담 성사를 위해 한반도 정세 변화를 이용하는 책략 역시 선대의 책략과 매우 유사하다. 

    김정은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미국에 ‘러브콜’을 보낸 것도 할아버지와 닮은꼴이다. 김일성은 1972년 닉슨의 방중 이후 적극적으로 대미(對美) 회담 러브콜을 보냈다. 1973년 북한은 중국을 통해 미국과의 회담을 공식 요청했다. ‘데탕트’ 분위기에 힘입어 결국 8월 27일 미국의 주중(駐中) 연락대표부 부주임 알프레드 젠킨스와 주중 북한대사 이재필의 첫 접촉이 이뤄졌다. 회담 의제는 북한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 이후 뉴욕 유엔본부에 북한 대표단 상주 문제였다. 1974년 초부터는 다른 경로를 통해 미국과의 회담을 모색한다. 북한 당국은 루마니아와 이집트 대통령, 미국 금융인, 의원과 미 의회에 서신을 보내 회담 주선을 부탁했다. 당시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그는 4월 30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의 회담에서 “북한이 미국과 회담을 원하면 이들이 아닌 행정부에 직접 연락을 취했어야 한다”고 웃어 넘겼다. 한마디로 북한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1987년까지 북·미 접촉이 더는 없었다. 결국 김일성은 1986년 미사일 도발을 단행했고 미국은 움직였다. 미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한반도 안정화 방법으로 대화를 선택하게 된다. 결국 1987년 3월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방중 자리에서 중국에 북한을 압박해 남북대화에 응하고,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도록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북한이 수용한다는 전제하에 미국은 북·미 긴장관계 완화를 위해 대북 식량과 의약품 제공은 물론 ‘팀스피리트’ 군사 훈련의 일시 중단 또는 연기, 그리고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입장을 표명했다. 국제 스포츠 대회와 한반도 안정화, 그리고 미사일 도발을 대미 회담 개최의 명분으로 활용하는 책략은 오늘날에도 북한이 유효하게 활용하고 있다. 

    4차례의 회담 끝에 북한의 서울올림픽 참가는 무산됐지만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이끌어냈고, 1988년 말 베이징에서 미국과 참사급 공식 회담을 여는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레이건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북·미는 베이징에서 총 7차례 회담을 했다. 더 주목할 것은 1989년 10월 개스턴 시거 전 국무부 아태 차관보가 미국의 고위급 공무원으로서 사상 처음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다.

    김정일 닮은 김정은의 광폭 외교

    김정은이 보여준 광폭 외교 행보도 1999~2002년까지 김정일이 취한 것과 그 동기와 성격, 목적 면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일정한 패턴을 보여준다. 북한은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시험과 금창리 핵개발 시설 의혹으로 한반도에 긴장국면을 조성했고, 미국에는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미국은 1999년 5월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특사로 파견해 일명 ‘페리 보고서’를 만들게 하고, 이를 토대로 10월 베를린 실무급회담에서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 유보와 미국은 대북제재 완화에 합의한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집권 이후 처음 베이징을 방문(2000년 5월)하고 이듬해 다시 비공식 방문한다. 이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2000년 6월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됐고, 7월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평양에서 영접했다. 10월에는 조명록 차수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각국의 수도를 상호 방문했고, 장쩌민 중국 주석은 2001년 9월 평양을 방문했다. 2002년 8월 김정일은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하고 9월에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평양에서 맞이했다. 

    이처럼 북한이 1980년대 말과 90년대 말,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추진한 ‘광폭 외교’에는 공통된 목적과 결과가 있다. ‘공통된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 1972년 1월부터 공식 제기한 미국과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 타결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제시된 북한의 제안에서 불변하지 않은 내용이 몇 가지 있다. 주한미군 철수, 미국의 대남 핵무기 및 각종 무기 제공 중단, 한미일 연합 군사훈련 중단과 한미연합사령부 해체 등이다. 한국 방어 및 방어능력 제고를 위한 미국 측의 협력 중단 요구는 올해 김정은 신년사에서도 강조됐다. 그러나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연합사령부 해체는 결국 한미동맹의 폐기를 의미한다. 

    ‘공통된 결과’는 북한이 결국 주변국을 기만하고 핵개발 재개로 회귀하는 사실이다. 북한은 광폭 외교를 경제 발전에 집중할 수 있는 외부 환경의 안정과 평화 마련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핵개발 중단도 가능하다는 ‘전향적인 모습’으로 광폭 외교를 활용했지만 이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일례로, 2002년 김정일은 경제 운용의 과오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선포했지만 이듬해 핵개발을 재개하면서 2차 북핵위기 발발의 빌미만 제공했다. 1993년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이 우려스러운 것도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사적 이정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레이건과 시중쉰, 김일성·정일 부자를 보면 트럼프와 시진핑, 김정은의 ‘외교 사고(思考)’를 읽을 수 있다. 지금 문 정부 외교의 시급한 과제는 성찰을 통해 그동안의 잘못된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다. 북미중 3국의 전략적 사고의 근간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 정부는 성찰의 시간을 가지려는 마음이 없어 보인다. 왜냐면 문 정부는 이들 지도자와의 회동 그 자체로 우리의 외교적 의사가 전달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안일한 태도는 북미중 3국의 우리에 대한 불신만 키워 ‘한국 패싱’을 자초하는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해결 방안을 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트럼프와 김정은이 회담하는 동안 우리 대통령은 판문점 옆방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는 상황, 김정은의 ‘오지랖’ 비방 등은 문재인 정부에 외교적 성찰과 전략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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