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가져올 후과
공무원·공공부문 ‘철밥통의 나라’ 만들겠다는 건가
미래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
볼수록 한심하고 무책임한 얼치기 반동(反動)
무지도 죄이니 그들은 죄인이다
“이거 편의점 면접 맞나요?”
원자 연령대는 다양하다. 최근에는 2001년생까지 찾아온다. 1953년생 지원자도 이력서를 들고 똑똑 문을 두드린다. 10대 후반부터 60대 중반까지 여러 세대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편의점 점주이자 글 쓰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나 싶다. 물론 그 시간에 해당하는 면접 비용은 지급한다.특히 젊은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좋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앞으로 인생 계획은 무엇인지, 가끔 상대방이 “이거 편의점 면접 맞나요?”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많은 것을 듣고 묻는다. 그럴 때 나 나름의 대화 원칙은 딱 한 가지. 꼰대처럼 거들지 말고 되도록 듣기만 할 것. ‘우리 때와 많이 다르구나’ 느끼는 점도 있고,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구나’ 하면서 기성세대로서 미안하고 한숨이 나오는 부분 또한 있다.
실현 가능성과 관련 없이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갖고 싶으냐”고 물으면 적잖은 젊은이가 “공무원”이라고 답한다.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해본 적이 있거나, 앞으로 공시를 준비할 계획이 있거나, 가능하면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공시 경쟁률이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며 공무원 열풍이 분다”는 언론보도가 그냥 호들갑만은 아님을 실감한다.
하긴 어느 시절에나 ‘안정성’은 직업 선택의 주요한 고려 사항 가운데 하나였지만 갈수록 그런 경향이 심화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비하하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데 공무원의 역할은 의심할 여지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 인재가 너도나도 공무원을 하겠다고 나서는 오늘의 현상이 온전히 정상적이라 할 수 있을까. 더욱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일, 모험을 동반하는 일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만연한 사회, 그런 경향이 급격하게 심화하는 공동체는 과연 제대로 된 것인가, 이런 사회에 미래는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 투철한 국가관이 급속히 확산해 너도나도 나라의 공복(公僕)이 되겠다고 나서는 그런 상황도 아니고, 그저 ‘안정성’ 하나 때문에 공무원을 선택하는 상황이라면 더욱이 말이다.
셀프계산대, 키오스크, 무인편의점…
편의점 업체들이 ‘무인 점포’ 개발 및 도입에 나서고 있다. [뉴시스]
이마트뿐인가.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 마트가 속속 셀프계산대를 늘리고 있다. 요즘 마트에 가보면 손님들 스스로 계산하고 나가는 코너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편의점 상황에서도 그리 먼 미래의 일은 아니다. 편의점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매년 봄 ‘상품전시회’라는 이름의 내부 행사를 개최하는데, 전국 가맹점주를 초대해 올해 나올 신상품을 소개하고 앞으로의 트렌드를 알려주는 자리다. 올해 초에 열린 어느 편의점 상품전시회에 가보니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셀프계산대가 주요 행사 부스 가운데 하나로 설치됐다. 작년에는 ‘미래의 편의점은 이렇습니다’라는 식으로 그저 보여주는 수준이더니 올해는 점주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셀프계산대 실물을 준비해놓았다. 이곳뿐 아니라 모든 편의점 프랜차이즈가 현재 시범적으로 셀프계산대나 무인(無人) 편의점을 운영하는 중이고, 이것이 가다듬어져 전국으로 확산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업계에서는 내다본다.
물론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이 아니었더라도,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이라는 폭주 기관차가 아니었더라도 미래 사회는 셀프와 무인, 인공지능(AI), 온라인 마켓 등의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마트와 편의점에 셀프계산대 혹은 무인 운영점이 부쩍 늘어나고, 우리 동네 조그만 분식집에까지 키오스크(무인 주문 계산기)가 설치되는 풍경을 넌지시 보건대 문재인 정부에 ‘역설의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의 미래를 이토록 빨리 앞당겨주셨구나!
일자리를 어이할꼬
하루에도 숱한 이슈가 다이내믹하게 오르내리는 대한민국이지만 지난 수년간 기억에 남은 이벤트를 꼽으라면 역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들 수밖에 없다. 당시 전국은 AI 물결로 출렁였다. 월드컵 시즌이 되면 팔순 할머니까지 “오프사이드 룰은 말이야” 하면서 한 말씀 거들고, 김연아 선수가 동계올림픽에 나설 때는 온 국민이 피겨스케이팅 전문 용어를 구사하며 채점 기준까지 줄줄 외는 ‘지식사회’ 대한민국의 면모대로 사람들은 AI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직장을 가나, 술집에 가나, 거리에서나, 화제는 온통 AI였다.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AI라는 용어조차 들어본 적 없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전문가가 됐다. 언론도 AI가 만들어나갈 미래 사회에 대한 특집 기사로 연일 지면을 채웠다.미래 사회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세상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한낱 편의점을 운영하는 필자조차 ‘사람이 직접 손을 대는 영역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에 불안해한다. 일자리를 잃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지금 공부하는 것들이 나중에 말짱 헛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또한 있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잃지 않을 ‘철밥통’, 바로 공무원에 젊은 세대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미래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에 주요한 이슈는 역시 ‘일자리’다. 일자리와 관련해 다음 몇 가지 대책이 당장 떠오른다.
첫째, 미래 사회의 진행 속도를 어떻게든 늦추는 방법이다. 방직기가 도입될 무렵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으니 그 기계를 때려 부수자고 주창한 러다이트(Luddite) 운동과 같이, ‘인간이 기계에 질 수 없다’는 태도로 저항하거나 버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일시적 감속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흐름을 영원히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은 그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 잘 알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세대만(혹은 나까지만) 잘 버텨보자”는 세대 이기주의적 발상이기도 하다.
둘째, 일자리를 나누는 방법이다. 전통적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미래라면, 그 일자리를 나누자는 것이다. 한 명이 하던 일을 세 명이 하거나, 9시간에 한꺼번에 하던 일을 3시간씩 3번에 나눠서 함으로써 ‘일부러’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비효율’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비효율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효율성을 생명으로 하는 조직인 ‘기업’에 그 부담을 떠넘길 수는 없으니 어쩌면 그것은 정부의 몫이 될 수 있다. 정부가 나서서 비효율을 보조해주는 방법 말고 다른 뾰족한 수가 무에 있을까.
그러므로 셋째, 노는 자들에게도 임금을 주는 세상이 도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임승차’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란 점은 삼척동자도 예상할 수 있다. 힘들게 일해 100만 원 버는 삶이 있고 그냥 놀아도 70만 원 버는 삶이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후자를 꼽는 사람이 증가하는 공동체일수록 무너져가는 사회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건전한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노는 자들에게도 적정한 임금(이른바 ‘기본소득’)을 주되, 어떻게든 노동 의욕을 고취하려는 정책 수단을 끊임없이 강구하는 것이 앞으로 정부의 역할이 아닐 수 없다.
노동해방의 디스토피아
어쩌면 미래 사회는 “땀 흘려 일하는 데서 보람을 찾는 것이 진짜 인간” “눈앞의 개인적 이익보다 인류 공동의 운명을 생각하고 서로 협력하자”는 ‘캠페인이 꾸준히 벌어지는 곳이 되지 않을까’ 하는 다소 디스토피아적 생각마저 고개를 들기도 한다.한발 더 나아가자면 ‘한 사람의 뛰어난 천재가 1000만 명을 먹여 살리는 현상은 지식정보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더욱 또렷해지지 않을까’ 싶다.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겠지만 그 ‘한 명의 천재’를 키워내고,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사회 풍토를 만드는 데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해 보인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니까 어떤 세상이 떠오르는가. 누군가는 미래 사회를 다룬 만화나 SF소설, 영화를 떠올릴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공산주의’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세례를 받은 86세대가 꿈에도 그리던 사회가 점점 현실의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노동해방의 신새벽’이 밝아오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언급했으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과연 뭘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분배의 방식을 놓고 볼 때, 사회주의가 ‘일한 만큼’ 받는 사회라면 공산주의는 ‘필요한 만큼’ 갖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회주의가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는 사회를 추구했다면(물론 현실 사회주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거기서 나아가 일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사람에게는 필요한 만큼 혜택을 주는 그야말로 대동(大同) 세상을 그렸다. 그런 공산주의가 마르크스, 레닌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차차 실현돼가고 있다. 폭력이 아닌 지력(知力)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자유와 민주의 힘으로.
화면의 앵글을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려보자. 미래 사회로 나아가는 방향에서 대한민국은 ‘정말 꼬일 대로 꼬인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운 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자리 나누는 문제를 보자. 일자리를 나누려면 기존에 일자리를 가진 사람에게 어느 정도 피해가 갈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사회적 대타협이나 국가 차원의 보조가 필요한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300만 원 급여 일자리 하나 대신 150만 원 급여 일자리 3개를 만들어내는 것에 합의와 지원을 이끌어내는 과제 말이다. 모두가 부정하고 싶겠지만 미래 사회는, 혹은 미래 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는, 직업의 안정성보다 확장성에 주안점을 둬야 하지 않을까. 미래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통령이 앞장서 부채질
7월 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노총 공공부문 비정규직노동자 총파업 ‘비정규직 철폐 전국노동자대회’ 참가자들이 효자동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뉴시스]
이런 무책임한 정부가 어디 있을까. 이 정부는 또 일자리를 늘리겠다면서 최저임금은 대폭 높이고, 근무시간은 크게 줄였으며 해고는 갈수록 어렵게 만들고 있다. 기업이나 자영업자 처지에서는 기존의 고용을 유지하기도, 신규로 채용하기도 버겁다. 비정규직을 마치 ‘악마의 일자리’처럼 묘사하는 일을 정부가 뜯어말리면서 국민을 설득하고 바르게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대통령이 그런 선입견을 부채질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일자리를 늘린다면서 이런 정책이라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렇게 모순덩어리에 무능하고, 선거만 바라보는 정부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러면서 공무원 수는 크게 늘렸다. 강의실 불 끄는 일자리까지 만들어냈다. 공공부문 일자리를 창출하는 문제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공공부문 고용 비율이 아직 8~9%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8~20%)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그러니 “공공부문 일자리를 더 만들어야 선진국”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보다 공공부문 고용 규모가 낮은 나라는 멕시코밖에 없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해군이 뉴욕시보다 사망률이 낮으니 입대하라”고 광고한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숫자 놀음이고 일종의 혹세무민이다(건장한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나가고 사회에는 노인과 영유아만 남아 있으니 통계상으로는 해군의 사망률이 낮게 나타났다).
혹세무민
김용 경기도 대변인이 4월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9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물론 오롯이 어린이집 원장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껏 우리 사회가 그렇게 유지돼온 탓이다. 정부가 직접 책임질 영역을 민간의 몫으로 돌리고, 거기에 정부 예산을 지원해주고, 결국 정부 지원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준(準)공기업, 준공공기관, 준공무원을 숱하게 양성해낸 것이다. 비단 어린이집뿐인가. 버스도 그렇고, 의료시설도 그렇고, 사립 중고등학교도 그렇고, 도서관이나 문화시설도 그렇고, 정부 예산이 끊기면 하루도 연명할 수 없는 곳을 우리는 숱하게 알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확대되면서 그런 블랙홀은 갈수록 늘어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이 정부 예산을 타내려고 수많은 기획서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런 영역을 통계에 포함해 국가 재정으로 유지되는 고용 규모를 따져보면 얼마나 될까. OECD 평균은 거뜬히 넘어설 것이라 자신한다.
사다리 걷어차기
여러 차례 말한 바 있지만 이 정부 사람들이 특별히 악랄하거나 심술궂어 이런 정책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선의를 갖고 이런저런 정책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그들의 의도와 매번 반대로 엇나가는 역설을 똑똑히 경험하고 있다. 저소득층의 수입을 늘려주겠다는 정책은 저소득층의 일자리를 무더기로 뺏고, 영세 상인을 보호하겠다는 정책은 영세 상인을 궤멸시키고 있으며, 비정규직을 해소하겠다는 정책은 기존 노동자의 기득권을 보장해주고 신규 진입자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식이다. 바탕이 선하다는 이유로 이런 실패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무지도 죄이니 그들은 죄인이다.
오늘도 편의점에는 알바를 하겠다는 지원자들이 찾아온다. 책상에 마주 앉아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에 희망이 없고 나라에 미래가 없다. 시대에 역류하는 것을 반동(反動)이라 한다면 이만한 얼치기 반동들의 세상이 어디 있을까. 그들이 보수니 진보니 자처하는 것은 역사적 난센스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