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명작의 비밀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의 정치학

숱한 논란 품은 매력적 스토리…문화재 반열 오를 것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19-08-07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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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광화문광장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1968년 4월 건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당대 대표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으로,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공공미술인데도 사람들은 이 동상을 자꾸만 정치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런 논란은 언제쯤 마무리될까. 충무공 동상은 50년, 100년 뒤에도 광화문광장을 지킬 수 있을까.
    “칼집을 오른손에 잡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왼손잡이였다는 말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걸 보니 패장(敗將)이란 말인가.” 

    “세종대왕을 기념하는 세종로에 왜 충무공 동상이 서 있는가.” 

    서울 광화문광장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논란이다. 1964년 5월 16일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독특한 조형물이 대거 등장했다. 당시 문교부(현재의 교육부)는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1996년 철거)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대로의 중앙 녹지대에 김유신, 권율, 정약용, 김정호, 유관순, 김구 등 위인 37명의 조상(彫像)을 세웠다. 애국선열조상(愛國先烈彫像)이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의 제안으로 시작돼 서라벌예대, 서울대, 이화여대, 홍익대 미대 학생들이 제작했다. 모두 석고상이었고 일부는 좌상, 일부는 입상이었다.

    ‘실패작’ 37명 애국선열 조상

    건립 당시 “졸속이다” “훼손 우려가 크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설치하고 보니 대학생 작품이라 수준이 좀 낮은 게 사실이었다. 석고상이라 너무 쉽게 훼손되기도 했다. 비바람에 쓰러지거나 깨지고 더러워지면서 도시의 흉물로 전락했다. 애국선열을 기린다는 취지와 달리 오히려 선열을 욕보이고 말았다. 건립 후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동아일보’는 이렇게 지적했다. 



    “주요 도로명을 선현의 이름을 따서 고친 것은 좋았다고 하겠으나, 서른일곱 분의 선열조상(先烈彫像)에 관한 한, 적지 않게 송구스럽다. 지난봄 한두 달 동안 급조해 세울 때부터 걱정된 일이지만, 세워진 지 두 달도 못 되어 얼룩지고 상처가 난다는 이야기이니 과연 올해 장마나 무사히 넘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생각은 좋았지만 좀 더 신중했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1964년 7월 9일자 1면 ‘횡설수설’) 

    이듬해인 1965년 봄, 문교부는 일부를 보수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판 여론에 밀려 1966년 7월 석고상 37개를 모두 철거했다. 한 달 뒤인 1966년 8월 15일,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출범했다. 석고상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동(銅)으로 영구적인 조상을 설치할 목적이었다. 위원장은 김종필이 맡았다. 건립위는 서울신문사와 함께 애국선열조상 건립운동을 펼쳤다. 1972년 해체될 때까지 을지문덕, 김유신, 강감찬, 정몽주, 세종대왕, 이황, 이이, 이순신, 세종대왕, 정약용, 윤봉길 등 모두 15명의 동상을 제작해 설치했다. 

    이때 첫 작품이 바로 충무공 동상이다. 1968년 4월 27일 지금의 광화문광장에서 제막식이 열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건립비 983만 원 전액을 헌납했다. 동상은 ‘최고 권력자 박정희’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충무공은 박정희가 오래도록 존경한 인물이기에, 광화문 충무공 동상은 군인 출신 박정희의 이미지와 오버랩될 수밖에 없었다. 

    광화문에 세워진 충무공 동상은 좌대를 포함해 전체 높이가 16.8m다. 화강석 좌대는 10.5m, 충무공상 자체는 6.3m. 동상은 구리로 주조했다. 좌대 전면에는 거북선 모형(길이 2.79m)을 구리로 만들어 설치했다. 제작은 당시 서울대 미대 교수인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이 맡았다. 김세중은 김남조 시인의 남편이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가면 그의 미술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김세중미술관이 있다. 

    충무공 동상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입고 오른쪽 발을 앞으로 살짝 내민 채 오른손에 장검(長劍)을 쥐고 있다. 턱을 바짝 당기고 눈을 부릅뜬 채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또한 배를 앞으로 내밀어 당당함을 과시하고 있다.

    충무공이 패장? 동상 고증 논란

    그런데 동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고증을 잘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①칼을 오른손에 잡고 있는 점 ②갑옷자락이 발끝까지 내려온 점 ③동상의 칼 모양이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사용한 장검과 다른 점 ④좌대 옆의 북(戰鼓)이 누워 있는 점 등이 문제가 됐다. 

    이런 논란으로 인해 건립 직후부터 충무공 동상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처음엔 이 주장이 금세 사그라졌지만 1977년 무렵 다시 제기됐다. 표준영정 문제가 추가로 거론됐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충무공 표준영정 속 얼굴과 동상 얼굴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표준영정은 충무공 동상이 건립되고 5년이 지난 1973년 제정됐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애초부터 적절치 않았다. 

    그럼에도 서울시는 1977년 표준영정에 맞게 동상을 다시 만들기로 했고 문화공보부(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의 동의를 얻어냈다. 1980년 1월 예산까지 확보했지만 문화계와 시민 반대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10·26 사건과 12·12 신군부 쿠데타로 인한 정국 불안까지 겹치면서 부담을 느낀 서울시는 결국 1980년 2월 충무공 동상 재건립을 포기했다. 

    여기서 고증 문제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①을 지적하는 이들은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는 것은 전투에 나선 지휘관이 아니라 패장(敗將) 또는 항장(降將)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칼을 왼쪽에 차고 있어야 오른손으로 바로 뽑아 전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②의 경우 갑옷이 발끝까지 내려올 만큼 길면 전투하기에 불편하다는 내용이다. 

    ③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사용한 장검(보물 326호)의 실물이 남아 있어 문제가 됐다. 당시 장검은 칼날이 약간 휘어지고 길이가 2m에 달한다. 반면 동상의 칼은 직선인데다 길이도 1.3m에 불과하다. 

    ④번의 경우, 즉 좌대 옆의 북 모양을 문제 삼는 이들은 전투에서는 북을 세워놓고 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한다. 충무공 동상은 북을 뉘어놓아 전쟁 분위기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충무공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점도 논란거리가 됐다. 김세중 작업실의 천장이 낮아 이순신 장군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게 됐다는 미확인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충무공 동상에 쏟아진 이러한 지적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칼의 위치나 크기, 시선 등의 문제는 조각가의 창작 의도가 담긴 것이다. 또 고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모두 전투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김세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휘하의 병사들을 독려하는 이순신 장군을 동상으로 표현했다. 승전 분위기를 부각하고자 칼을 오른손에 쥔 모습으로, 칼을 이순신 장군 키보다 다소 작게 표현한 것이다. 그래야 승장(勝將)의 위엄이 더 살아난다고 조각가는 판단했다.

    기둥처럼 견고한 하체

    50년 넘게 서울 세종로를 지키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한국관광공사 제공]

    50년 넘게 서울 세종로를 지키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한국관광공사 제공]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저 멀리 적군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다. 승리를 성취한 아군 병사들을 향한 이순신 장군의 시선이다. 아군을 향해 “우리가 이겼다”고 외치는 분위기다. 물론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를 투영하려 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개연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박정희가 제작비를 전액 헌납하고 김세중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정희의 의도가 개입됐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동상에서 이순신 장군이 승리를 이끌고 부하 병사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종로 충무공 동상은 우리가 많이 보아온 고대 로마 조각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로마 조각이 해부학적으로 사실적인 인체를 표현했다면 충무공 동상은 위인의 풍모를 강조했다. 갑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하체를 하나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표현한 점이 그렇다. 마치 조선시대 능묘(陵墓)에 세운 무인상(武人像)을 연상시킨다는 의견도 있다. 

    기둥처럼 단단한 신체는 충무공의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한다. 이는 우리의 위인 기념조각 초창기인 1950~60년대 작품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위인 개인의 사실적인 신체보다는 역사적 위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조각가 가운데 이순신 장군을 패장으로 표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은 당대의 대표적인 조각가였다. 칼의 위치와 크기, 시선 등은 그가 이순신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고안한 하나의 장치였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고증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김세중은 이 동상이 정치 논리로 해석되는 것을 저어했다. 그가 만든 충무공 동상은 언뜻 정적(靜的)인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적(動的)이다. 칼의 위치나 시선 등만 보고 패장 이순신을 묘사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발상이다. 

    1980년대 이후 충무공 동상 재건립 논란이 재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증 잘못에 대한 얘기들은 여전히 가십처럼 떠돌아다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충무공 동상을 세종로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세종로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있어야 한다. 충무공 동상은 충무로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가 충무공 동상 이전을 본격적으로 검토한 일도 있다. 1994년이다. 당시 정부 행정쇄신위원회는 세종로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우고, 충무공 동상은 충무로로 옮기는 방안을 서울시에 검토 의뢰했다. 거리 이름에 맞게 동상 위치를 찾아주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사안을 심의한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충무공 동상은 이미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세종로의 상징이 됐으므로 이전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이전 논의는 10년 뒤 다시 시작됐다. 세종로 차로를 줄이고 보도를 넓히려는 논의가 한창이던 2004년이다. 그러나 당시 한 여론조사에선 시민 87%가 충무공 동상을 옮기는 데 반대했다. 결국 이전 계획은 무산됐다. 2005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 일각에서는 충무공 동상을 독도로 옮겨 세우자는 다소 황당한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2008년 지금의 광화문광장을 만들면서 또 한차례 충무공 동상 이전 주장이 나왔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세종로에 세종대왕이 있어야지 왜 충무공이냐. 군사독재의 산물 아닌가. 이순신 장군은 태어난 곳인 충무로 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은 이렇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왔다. 일종의 절충안이었는지, 2009년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섰다. 세종대왕 동상은 경복궁을 배경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임금 앞에 어떻게 신하가 서 있느냐”는 말도 나왔다.

    프랑스의 삼색기와 라마르세예즈

    2017년 10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집회 1주년 기념대회 ‘촛불은 계속된다’가 열리고 있다.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2017년 10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집회 1주년 기념대회 ‘촛불은 계속된다’가 열리고 있다.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올해 1월, 또다시 이전 문제가 불거졌다. 서울시가 발표한 ‘새로운 광화문광장’ 설계공모 당선작에 충무공 동상을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으로 옮기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다. 발표 직후, 동상 이전에 대한 반대 의견이 터져 나왔다. 논란이 일자 서울시는 “이전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연말까지 시민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최종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현재로선 제자리에 남을 가능성이 다소 높아 보인다. 그러나 충무공 동상 이전 주장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무언가 계기가 마련되면, 이전 주장이 또다시 터져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건 충무공 동상을 정치적으로 보려는 시각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에서 박정희의 헌납에 의해 제작된 것이기에, 어찌 보면 이것은 충무공 동상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의 여러 권력자는 국가나 민족과 관련된 영웅적 이미지를 자신의 상징으로 활용했다.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 프랑스 국가인 라마르세예즈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이것들은 현재 프랑스 공화주의의 상징이다. 그러나 과거 100년 넘게 공화 진보파와 왕당 보수파 사이에서 온갖 부침을 거듭했다. 두 세력은 깃발과 노래를 자기 상징으로 삼으려는 투쟁을 계속했고 그 과정에서 깃발과 노래는 영광과 수난을 함께 겪어야 했다. 한때는 진보의 상징이었고 한때는 보수의 상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과정이 깃발과 노래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부각했다. 이를 통해 지금은 프랑스의 상징으로 더욱 공고화됐다. 

    1964년 4월 27일 건립 이후, 세종로의 충무공 동상은 늘 논란의 대상이었다. 특히 정치적 해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숱한 논란 속에서도 그 동상은 원래 그 자리,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에 그대로 있다. 충무공이 내려다보는 바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만나고 논쟁하고 추모하고 분노하고 무언가를 소리 높여 외친다.

    100년 뒤엔…

    뒤집어 생각해보자. 세종로에 충무공 동상이 없었다면 그곳에서 이런 일들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이곳이 이렇게 상징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을까. 충무공 이순신의 존재감이 아닐 수 없다. 한 미술사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동상을 만들자고 했는지, 어느 조각가가 만들었는지 모두 잊힐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 동상의 인물이 갖는 인격성이다. 조성된 지 50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은 더 이상 권력자의 화신도, 가상세계의 장군도 아닌 그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조은정,‘100만 촛불 군중 속 이순신 장군 동상’, 월간미술 2016년 12월호 ) 

    앞서 말했듯 충무공 동상을 이전하자는 이슈는 무슨 계기가 있으면 재점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기에 이런 궁금증이 든다. 50년 뒤, 100년 뒤 이 동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독재시대에, 독재자의 후원으로 세워진 게 논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논란은 화제가 되고 많은 이의 관심을 유발한다. 그 논란조차 세월이 흐르면 매력적인 스토리가 된다. 충무공 동상이 건립된 지 이제 51년째. 문화재로서의 법적인 조건을 갖췄다. 좀 더 세월이 흐르면 이 동상은 분명 문화재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그럴 때 지금의 논란과 스토리는 중요한 덕목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논란은 충무공 동상이 명성을 쌓아가는 과정이자 명작으로서의 조건을 하나둘 갖춰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명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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