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로 인한 ‘미주신경성 실신’ ‘기립성 저혈압’
우울에피소드, 불안장애도 늘어
‘취업·생활고 고민’ 한계상황
최근 오랜 취업준비생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은 이선영(가명·여·29) 씨는 출근 시간대 서울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싣고 면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등포구청역에서 을지로입구역까지의 짧은 거리였다. 신촌역을 지날 즈음, 이씨는 눈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다. ‘면접에 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도 잠시. 간신히 손잡이를 붙잡고 버티던 이씨는 시청역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이씨는 어딘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고 주변의 도움으로 병원에 옮겨졌다. 병명은 ‘미주신경성 실신’이었다. 의사는 “순간적으로 뇌로 가는 혈액이 부족해져 정신을 잃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씨는 “면접에 붙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원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면접을 볼 수 없었다.
요즘 이렇게 실신하는 20·30대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심장)미주신경성 실신은 젊은 층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유형 중 하나다. 심장에는 별 이상이 없으나 외부 요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자율신경계에 불균형이 초래돼 심박 수가 느려지고 혈압이 떨어져 의식을 잃게 된다. 실신 전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건장한 젊은이도 취업난이나 생활고 등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이렇게 정신을 잃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간 실신은 주로 무대 압박감에 시달리는 연예인이나 무리하게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여성의 일로 여겨져왔다.
“버터고 버티다 쓰려져”
신장이 180cm가 넘는 대학생 김모(26) 씨는 최근 집 현관문을 열고 나서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김씨는 학업, 동아리, 기업홍보대사, 방송리포터 활동에 열심이었다. 이렇게 활동적인 그가 졸도했다는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김씨는 “취업 스펙을 쌓기 위해 해온 일들로 인해 심신이 지쳤다. 버티고 버티다 쓰러진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피로와 스트레스가 심해 ‘기립성 저혈압’이 왔다”는 진단을 받았다. 자세의 변화에 따라 혈압이 떨어지는 기립성 저혈압은 어지러움, 눈앞이 캄캄해지는 현상, 목 뒤쪽 통증, 호흡곤란, 협심증, 실신을 동반할 수 있다. 김씨는 “쓰러지면서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일을 줄이는 대신 종합영양제를 먹는다.
커피숍을 운영하는 김모(여·31) 씨는 한 달 전 자신의 매장에서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깨어보니 거울에 비친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김씨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직원을 줄여 마침 직원이 없는 시간대였다. 자리를 지켜줄 사람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갔다”고 말했다.
스물네 살 때부터 커피숍에서 일한 김씨는 갈수록 높아지는 노동강도와 불규칙한 스케줄로 인해 심적으로 지치고 몸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일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포기한 상태라 외롭고 고독한 처지다. 김씨는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이나 결혼한 친구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요즘 자영업이 어렵고 미래가 불안하다. 그래서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고 했다.
고된 현실, 불안한 미래…20대 11.1%가 고위험군
특히 ‘우울에피소드’와 ‘불안장애’ 환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2017년 기준 우울에피소드나 불안장애를 앓는 20대 환자는 4만3045명으로, 2013년 대비 75.3% 늘었다. 전체 연령대 중에서 가장 큰 폭의 증가였다. 최근 강력범죄에 자주 등장한 정신질환인 ‘조현병’과 ‘비기질성 수면장애’를 앓는 환자 수에서도 20대는 상위권이었다. 한 의료전문가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20대 일부의 문제가 아니다. 20대 중 7%가 심한 우울증 상태에 있고 8.6%가 불안 증세를 경험하고 있다. 22.9%가 자살을 고려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20대의 11.1%는 ‘고위험군’에 속하는데, 고위험군일수록 스트레스 수준도 높다. 자아탄력성(중대한 역경이나 어려움에 직면해 긍정적으로 적응해나가는 경향성)과 부모의 경제 수준이 낮을수록 고위험군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대학 재학생 커뮤니티에서도 실신이나 우울에피소드, 불안장애 등을 호소하는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서울 소재 한 대학의 재학생 커뮤니티에는 “밀폐된 공간에 사람이 많으면 갑자기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토할 것 같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나는 미주신경성실신을 자주 겪는다. 카페에서도 사람이 너무 많으면 점점 속이 안 좋아지고 헛구역질이 나 화장실로 대피한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여러 번 쓰러졌다.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실신을 피하기 위해선 실신을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청년은 이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여유롭게 건강을 돌볼 처지도 아니다. 위험은 방치돼 있고 예방과 치료는 제한적이다.
취업준비생 박모(여·28) 씨는 주중에 새벽 5시 30분쯤 일어나 오전 내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번다. 오후부턴 공채 시험을 준비한다. 공채 시즌엔 수십 통의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쓰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다. 그러나 지금껏 단 한 번도 합격 통지를 받지 못했다. 통장 잔고는 늘 간당간당하고 생활비는 빠듯하다. 박씨는 “나는 건강한 20대지만 이런 긴장과 좌절이 반복되다 보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여기에다 생활고까지 더해지고 있다. 내일 당장 쓰러지더라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다.
‘토닥토닥’
요즘 청년 세대가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의 정도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지 모른다. 최근 서울 역삼동 원룸에서 발생한 집단자살 사건처럼 몇몇 청년은 사는 게 힘들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2위를 기록하고 있다.모 대형 서점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베스트셀러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정서 키워드는 ‘토닥토닥’이었다. 이 책들의 제목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상당수 젊은이는 ‘곰돌이 푸를 옆에 두고’ ‘죽고 싶지만 떡볶이를 먹고’ ‘무례한 사람에게 대처하는 법’을 깨치면서, ‘실신하지 않고’ 사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