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도시몽타주] 서울 광화문광장, 이념의 전쟁터 혹은 배설의 집합소

‘정치 검투장’ 된 광장, 8월 1일 준공 ‘만 10년’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19-07-30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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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노총, 우리공화당 3일 시차 두고 집결

    • 어느 편도 아니라면 오래 있지 못할 곳

    • “세상 온갖 문제 갖다 파는 재래시장”

    • “종교화된 정치가 사람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 끈적끈적한 집단성의 배양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산하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7월 3일 광화문광장에서 총파업에 나서는 집회를 열고 있다.(위) 7월 6일 우리공화당이 세종문화회관과 광화문광장 사이에서 집회를 열었다.(아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산하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7월 3일 광화문광장에서 총파업에 나서는 집회를 열고 있다.(위) 7월 6일 우리공화당이 세종문화회관과 광화문광장 사이에서 집회를 열었다.(아래)

    8월이면 광화문광장이 완공된 지 만 10년을 맞는다. 2006년 취임 첫해를 맞은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16차로이던 세종대로를 10차로로 줄이고 도로 한가운데 녹지대와 광장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광화문과 옛 육조(六曹)거리를 복원한다는 취지였다. 광장 조성에 예산 700억 원이 쓰였다. 

    2009년 8월 1일. 당시 오 시장은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중국의 천안문 광장같이 나라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국가 상징 가로가 될 것”이라며 준공을 기념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지금 ‘말’과 ‘칼’이 있다. ‘칼’을 품은 ‘말’이 난무하고, ‘말’의 모양새를 빌린 ‘칼’이 춤을 춘다. 명함 한 장에 아군과 적군이 나뉜다. 어느 편이건 들어갈 수 있지만, 어느 편도 아니라면 오래 있지 못할 곳. 폭 34m, 길이 557m의 광화문광장은 열렸으되 닫혀 있다.

    가마솥처럼 과열된다

    7월 3일 민주노총이 광화문광장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 가운데, 인근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피켓이 보인다. [고재석 기자]

    7월 3일 민주노총이 광화문광장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 가운데, 인근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피켓이 보인다. [고재석 기자]

    정부서울청사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KT와 교보생명, 현대해상화재보험이 손에 손을 잡고 광화문광장을 감싼다. 광화문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 입주 기업에 재직 중인 강선영(31·여·가명) 씨는 이곳을 “각종 이념의 전쟁터이자 세상 온갖 문제를 갖다 파는 재래시장이다. 정치 검투장 같다”며 제법 문학적인 표현을 건넨다. 

    서울시 조례에는 “서울특별시장은 시민의 건전한 여가 선용과 문화 활동 등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광장을 관리해야 한다”(제1조)고 명시돼 있다. 이를 근거로 서울시는 정치집회는 불허하되 문화제는 허용한다. 하지만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서울시는 지난 5월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를 허가했다. 보수진영은 반발했다. 이러니 문화제로 변칙 신고하는 정치집회가 잇따른다. 광화문광장은 가마솥처럼 과열된다. 



    7월 3일. 구름 낀 하늘 밑으로 수십여 개 깃발이 나부낀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공공연대노동조합’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전국기간제교사노동조합’ 등의 레테르가 깃발의 정체성을 손쉽게 증명한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끝까지 함께 가자!’ ‘비정규직 없는 세상 문을 열자’는 문구가 전광판을 번갈아가며 채운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진다. 

    “세상의 주인인 노동자가 일손을 놓으면 세상이 멈춘다. 100만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진짜 사장’ 문재인 정부를 ‘집단 교섭장’으로 끌어내고 말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비정규직 철폐 전선에서 모든 비정규직과 모든 차별 철폐로 나아갈 것이다.” 

    이날 오후 3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산하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점심 직후부터 이미 세종대로 사거리, 서울현대미술관, 서울파이낸스센터 등에서 사전집회가 열렸다. 민주노총은 이날 집회에 지방자치단체와 공공기관, 교육기관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 5만3000여 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그 숫자를 3만2000여 명으로 봤다. 2만1000명이라는 격차가 주최 측과 경찰의 아득한 심리적 거리감을 보여준다. 

    5만 명(혹은 3만 명)의 가장 앞줄에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있다. 이날로부터 딱 6일 전, 김 위원장은 서울남부구치소에서 굳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국회 앞 불법 집회를 주최한 혐의 등으로 6월 21일 구속됐었다. 같은 달 27일 김 위원장에 대한 구속적부심을 맡은 서울남부지법 형사합의12부는 이날 보증금 납입 조건부 석방을 결정했다. 

    “정부가 약속한 정규직 전환이 지지부진해지는 사이 임금·상여금·휴일·복리후생에 대한 차별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100만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질적 사용자인 정부가 교섭에 나서야 한다.” 

    광화문광장에서 김 위원장의 이야기는 ‘비정규직’에서 시작해 ‘비정규직’으로 끝났다. 1965년생인 그는 1991년 철도청(現 코레일)에 입사했다. 2018년 민주노총 위원장에 당선되기 전까지 그는 전국철도노동조합에 터를 잡고 활동했다. 해직과 구속 기간을 제외하면 공공부문에서 밥벌이와 노동운동을 하며 삶을 영위한 셈이다.

    유체이탈식 당위

    민주노총은 1995년 출범 때부터 대기업과 공공부문 정규직 노조의 연대체였다. 양대 부문 노조는 강력한 교섭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연공급 임금체계(호봉제)가 원칙이던 시대였다. 자연스레 양대 부문 종사자들의 임금은 생산성과 상관없이 계속 올랐다. 이후 정부와 대기업은 비용 부담을 이유로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자연히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생성됐다. 

    민주노총은 정부와 대기업에 책임을 전가한다. 김 위원장은 6월 28일에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한국 사회 불평등의 강고한 벽을 깨부수는 저항”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주축인 대기업·공공부문에서 임금 인상을 자제하겠다는 양보안은 내놓지 않는다. “최저임금 1만 원은 사회적 약속으로 재벌에게 비용을 청구해야 한다”(6월 4일)며 여태 약자를 자처한다. ‘비정규직 차별’을 문제 삼는 김 위원장의 말은 광화문광장을 부유하다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가 광장에서 토해내는 사자후에는 ‘유체이탈’식 당위만 그득하다.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붉은 빛깔 ‘민주일반연맹’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에게 “기자인데, 이야기 좀 나눌 수 있느나” 물으니 “어느 매체냐”고 되묻는다. 명함을 줬다. “안 해요” “다른 사람과 얘기하세요” “실례해요” “할 말 없어요” “죄송해요”라는 말이 연이어 되돌아온다. 50대로 보이는 여성은 “더운데 고생하시네요. 갈 데가 있어서”라며 비교적 완곡하게 의사를 표시한 후 발걸음을 옮긴다. 30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총 6번 거절당했다. 

    이날 광화문광장의 울타리에 진입한 ‘진보진영의 의제’는 다종다양했다. KT스퀘어 앞에는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 피해자 서울구명위원회 명의로 ‘이석기 의원은 무죄다. 석방이 정의다’라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세종대왕 동상과 주한미국대사관 사이 횡단보도 옆으로는 ‘민중민주당’ 명의로 ‘트럼프 정부 규탄! 자유한국당 해체!’ 피켓이 놓여 있다. 피켓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나치’ 표시 띠를 어깨에 두른 채 ‘나치’ 경례를 하고 있다. 

    ‘일진그룹은 노조 파괴를 멈춰라!’가 적힌 전단지는 각기 다른 사람에게서 한 차례씩 총 두 번 받았다. ‘전국금속노동조합 대전충북지부 일진다이아몬드지회’에서 만들었다. 지회는 지난해 12월 29일 설립됐다고 한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일어서서 싸우겠다!’는 결기 어린 문구가 전단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반대 진영의 또 다른 결기를 만날 시간이다.

    “이 동네에는 진보좌파밖에 없었다”

    7월 11일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 우리공화당이 설치한 천막이 보인다. 서울시는 우리공화당에 7월 10일 오후 6시까지 광화문광장에 설치한 천막을 자진 철거하라며 2차 계고장을 보낸 바 있다. [뉴스1]

    7월 11일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 우리공화당이 설치한 천막이 보인다. 서울시는 우리공화당에 7월 10일 오후 6시까지 광화문광장에 설치한 천막을 자진 철거하라며 2차 계고장을 보낸 바 있다. [뉴스1]

    “오로지 해야 할 것은 우리 애국국민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것이다. 광장에 10만, 100만, 300만이 나오면 문재인 정부 끌어내리고 대한민국 구해낼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자유대한민국의 탄핵이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기어이 구출해야 한다.” 

    확성기를 뚫고 나오는 날선 외침이 광화문광장에 울린다. 연사가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구출하자’ ‘지켜내자’ 따위의 단어가 연신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상당수 집회 참가자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갖고 다닌다. 해병대 군복에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낀 노신사도 보인다. 

    7월 6일 우리공화당은 오후 1시부터 서울역광장에서 집회하다 오후 3시쯤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집회 장소를 옮겼다. 전날 우리공화당은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천막 4동을 설치했고, 6일 새벽 1동을 추가 설치했다. 

    이어 우리공화당은 같은 날 세종대왕상 인근에 천막 4개 동을 설치해 광화문광장에 재진입했다. 우리공화당은 7월 11일 세종문화회관 앞에 설치했던 천막을 자진 철거했지만 광화문광장에 꾸린 천막은 그대로 뒀다. 

    민주노총과 우리공화당은 서로 가닿기 힘든 아득한 거리에 있다. 그런데 이들이 광화문광장에서 ‘反문재인’이라는 고리로 교집합을 이룬다. 3일의 시차를 두고 광화문광장에서 묘한 기시감이 든다. 7월 6일 광화문광장 근처에 서 있던 홍문종 우리공화당 공동대표(4선·의정부을)에게 다가가 물었다. 

    - 오늘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분위기가 어떤 것 같나? 

    “느낌으로는 한 100만 명쯤 모인 것 같다.(웃음) (당명이) 우리공화당으로 바뀐 후 태극기를 사랑하는 분들과 나라가 이렇게 가서는 완전히 ‘종북좌빨’의 나라가 될 거라고 걱정하는 분이 늘었다. 그분들이 더욱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굉장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 그간 광화문광장에는 이른바 좌파 진영이 많았는데. 

    “이 동네에는 진보좌파밖에 없었다. 세월호, 녹색당, 이석기가 있었다. 그동안 보수우파가 점잖게 했다.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우리 의제를 더욱 더 열심히 표출하고 있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다시 천막을 설치하면 대응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대응을 하든지 말든지 우리는 우리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계속해서 텐트를 칠 것이고, 우리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할 것이다.” 

    - 앞으로 계속 거리에서 투쟁할 계획인가? 

    “지금 57일째 투쟁하고 있다. 텐트가 있으나 없으나 매일 모이고 있다. 앞으로 애국시민은 더 늘고 우리공화당 당원들은 더 뭉칠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이른바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면 심사숙고해서 하라고 경고하고 싶다.”

    진언 감별사

    홍 대표와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옆에 있던 중년 여성이 “저기요”라며 말을 건다. 기자의 소속 매체를 먼저 묻고는 휴대전화로 기자를 촬영하며 본격적으로 ‘취재’를 시작한다. “우리 조원진 대표님과도 인터뷰를 했나” “왜 이곳에 취재 왔나”를 묻더니 금세 “진보좌파 언론들이 (우리공화당에 대해) 왜곡을 많이 하는데, 같은 언론 종사자로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고 묻는다. 난감해서 계면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른 언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어렵다”고 답하고 대화를 서둘러 매듭짓는다. “명함을 달라. 문자 남기겠다”는 여성에게 명함을 건네고는 다시 세종문화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머 SBS가 웬일이야.” 60대 여성 둘이 지나가면서 속삭인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집회 광경을 촬영 중인 한 방송사 카메라맨을 보고 나눈 얘기다. ‘우리 편도 아닌데 왜 왔나’라는 투다. 수년 전 여의도에 ‘진박(진실한 친박)’을 가려내는 ‘진박 감별사’가 있었다. 2019년 광화문에는 ‘진언(진실한 언론)’을 가려내는 ‘진언 감별사’가 곳곳에서 활약한다. 이곳을 가도 저곳을 가도 ‘가짜뉴스’가 문제란다. 확성기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연합뉴스 앞으로 100가지의 정정 보도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 나온다. 청중이 거대한 환호성을 지른다. 

    광화문광장 초입으로 이동하니 ‘태극기 모든 세력을 몰아내서 광화문광장을 국민에게 돌려줍시다’라는 현수막이 엿보인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소년이 ‘자유한국당 총선 심판’을 내건 피켓을 들고 있다. 근처에서 50대 남성이 “좀비들이 설쳐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자들이 광화문광장을 점거하게 할 수는 없다”고 성토한다. 맥락상 우리공화당을 겨눈 듯했는데 이내 그의 입에서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세월호 추모공간’ 코앞에서 지면에 더는 옮기기 힘든 거북한 욕설이 속사포처럼 이어진다. 그 옆으로 경찰 50여 명이 서 있다. 만에 하나 발생할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다.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단 또 다른 50대 남성이 따진다. 경찰에게 호소 같기도, 성토 같기도 한 말을 뱉어낸다. “아니, 경감님 이건 진짜 아니잖아요. 선을 지키며 비판을 해야지, 이런 식은 정말 잘못된 것 아닌가.” 경찰이 애써 웃으며 “네” “그렇죠” “선생님 말 이해합니다”라며 10분 넘게 그를 달랜다. 광화문광장의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복마전이다. 

    정치학자 하상복은 2009년 광화문광장 준공 직후 출간한 논문 ‘광장과 정치: 광화문광장의 비판적 성찰’에 “서울시는 정치적 공론의 기능이 사라진 광화문광장을 조성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광장의 철학적·법적 의미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광화문광장의 역사성 및 현대적 성격과도 양립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민주적 회합의 장으로서 광장의 ‘정치성’을 돋워야 한다는 의미다. 

    10년이 지난 오늘, 이와 같은 렌즈로 상대에 대한 조롱과 배설이 난무하는 광장의 양태를 가늠하기란 어렵다. 그곳에는 정치를 소재 삼은 주장은 있으되 정치가 없다.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기자에게 ‘정치의 종교화’라는 프레임으로 이 현상을 볼 것을 권한다. 

    “교회나 사찰 같은 기성 종교가 현실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대신 정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사람들은 타인과의 연결을 가시적으로 확인받고 싶어 한다. 유튜브 같은 미디어를 통해 1차로 확인하고, 오프라인(광장)에서 2차 확인하면서 자기가 믿었던 ‘사실’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받는 프로세스를 거치고 있다. 다른 주장은 자신의 믿음을 약화시키니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종교화된 정치가 사람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거대한 명분을 뒤집어쓴 채

    소설가 김훈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 이렇게 썼다. 

    “정치적 언어는 사실에 바탕하지도 않았고 의견에 바탕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흔히 욕망이나 이득에 바탕하고 있었다. 욕망과 이득에 바탕한 말들은 사실을 지운다. 그 말들은 거대한 명분을 뒤집어쓰고 뻔뻔스러워진다.” 

    민중과 민주, 자유, 애국 따위의 단어들이 ‘거대한 명분을 뒤집어쓴 채’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웠다. 화려한 선전 구호와 나부끼는 깃발은 ‘사실에 바탕 하지 않아’ 공허함을 자아낸다. 온갖 분노가 한데 뒤엉켜 있지만 ‘왜 분노해야 하는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욕망이나 이득’이 넘치는 자들은 진정성을 외피 삼아 우두머리를 자처한다. 그들이 ‘뻔뻔스러운지 아닌지’ 아직은 모른다. 곧 다가올 총선과 대선이 몇몇 우두머리의 속내를 가늠해볼 잣대가 될 터. 

    그때까지 광화문광장은 끈적끈적한 집단성의 배양지 노릇을 할 것이다.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을 숙주 삼은 노조의 수장이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박근혜’ 말고는 내걸 언어가 없는 정치 세력이 ‘가열찬 투쟁’을 선동하는 곳. 사람들은 오늘도 그곳에서 집단에 울고 집단에 웃고 집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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