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혼밥판사’의 한끼 | 도시락

이혼법정의 눈물 젖은 도시락

  • 정재민 전 판사, 작가

    입력2019-08-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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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당사자들 상처에 비할 순 없지만 판사도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울적함의 조각이 커피 속 각설탕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법정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 편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정재민 전 판사, 작가
    [동아DB]

    [동아DB]

    나는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집에서 직장까지 한 시간 걸린다. 처음과 끝은 차들이 오가는 도로변을 달리지만 그 사이 대부분은 개천가에 난 자전거 도로를 달린다. 달릴 때는 대개 ‘멍 때리고’ 있다. 하루 계획을 세운다거나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다리를 움직일 뿐이다. 특별히 유심히 쳐다보는 풍경도 없다. 개천을 묵묵히 흐르는 물, 그 양측에 무성하게 난 풀, 그 속에 돋아난 민들레나 해바라기 같은 꽃들이 스쳐지나가도 굳이 시선을 던져 붙들지 않는다. 곁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 맞은편에서 달리거나 걸어오는 사람들도 무심하게 지나친다.

    자전거 타고 법원 통근

    그러나 얼굴에 불어오는 바람 감촉만큼은 강렬하다. 추운 날에는 칼날이나 고드름이 날아드는 것 같지만 더운 날에는 사우나 열기처럼 후끈거린다. 찬 공기든, 더운 공기든 얼굴에 날아드는 것이 반복되면 노곤해지면서 졸음이 느껴질 때도 있다. 햇살이 얼굴에 닿을 때의 강하거나 약한 느낌도 선명하다. 새벽에 출근할 때는 자전거 위에서 일출을 보고 저녁 어스름에 퇴근할 때는 자전거 위에서 날이 저물 때도 있다. 똑같은 길인데도 계절에 따라서는 물론이고 날마다 미세하게 달라진다. 

    느릿느릿 가다 보니 수시로 등 뒤에서 다른 자전거들이 “지나가겠습니다!”라는 말을 건네고는 나를 앞질러 간다. 청년 때는 누가 나를 앞질러 가면 괜한 자존심에 지지 않으려고 속력을 높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자전거든 차든 직업적 경로든 빨리 가면 뭐하나 싶다. 목덜미와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린다. 헬스장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면 지루해서 반 시간도 채 못 달리고 내려올 때가 많은데 자전거를 타면 꼼짝없이 한 시간을 탈 수밖에 없다. 집에서 출발하면 어떻게든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가야 하고 퇴근길 자전거에 오르면 어떻게든 집에는 가야 하니까. 하루의 스트레스가 땀과 함께 증발하기도 한다. 

    자전거를 타고 법원에 도착하면 샤워를 하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옥상 정면에 보이는 산등성이를 쳐다보면서 도시락을 먹는다. 여기서 도시락이라는 것은 출근길 빵집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커피다. 빵과 커피가 그렇게 맛있을 때가 없다. 자전거를 타느라 힘이 들어 음식을 먹는 것인지 음식을 맛있게 먹으려고 부러 한 시간씩 자전거를 타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점심이나 저녁을 먹는 것이 귀찮을 때가 있다. 구내식당 음식은 질려서 먹고 싶지 않고, 밖에 나가서 사 먹자니 걸어가면 오래 걸리고, 차를 타자니 주차가 귀찮고, 식당 음식은 구내식당보다 훨씬 더 비싸고, 때로 누가 밥값을 낼지 애매할 때도 있다. 그럴 땐 도시락을 먹고 싶다. 도시락이라면 식은 밥도 좋다. 반찬은 계란과 함께 부친 분홍색 소시지, 계란말이, 참치, 불고기, 메추리알, 시금치, 콩자반, 김, 샐러드가 아닌 ‘사라다’, 오징어실채볶음, 김치 중에 두세 가지 정도면 좋겠다. 



    학창 시절에는 도시락이 왜 그리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에는 햄이나 동그랑땡같이 맛있는 반찬을 가져오는 친구들이 반찬통을 꺼내놓자마자 그 반찬을 노린 무수한 숟가락 젓가락이 식인물고기 피라니아 떼처럼 습격하곤 했다. 반면 내 도시락은 창피했다. 반찬이 맛이 없었고 깔끔하게 담겨 있지도 않았다. 김치 국물이 새어 나와 냄새가 번질 때도 있었다. 세련되지도 섬세하지도 않은 어머니에게 어린 마음에 감사보다 불만이 더 쌓였다.

    ‘농촌급식’의 추억

    그 시절 도시락통은 다양했다. 아버지 시대에 쓰던 철제 직사각형 납작한 밥통을 그대로 쓰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플라스틱으로 된 밥통과 반찬통을 쓰는 친구도 많았다. 길쭉한 원통형 보온 도시락통도 유행했다. 아내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흉을 볼 때 들고 나오는 레퍼토리 중 하나도 오빠가 쓰던 남자용 원통형 보온 도시락통을 자신에게 물려줬다는 것이다. 

    그 도시락통을 우리 학창 시절에는 많이들 목에 걸고 다녔다. 3층으로 이루어져 가장 밑바닥에는 국통이 들어가고, 그 위에 길쭉한 밥통이 올라가고, 다시 그 위에 반찬통이 올라가 있는 모양이었다. 국통의 온기가 밥통으로 전해져 밥통을 꺼내면 그 표면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처럼 송글송글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 세 가지 통을 철로 된 원통형 보온통이 감싸고 있었다. 그 모양 때문인지 2010년 연평도 포격이 있었을 때 어느 정치인이 보온통을 북한이 쏜 포탄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구설에 오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따뜻한 밥과 국을 먹으려고 그렇게 무거운 보온통을 들고 다닌 건 지혜롭지 못했던 것 같다. 중년이면 몰라도 10대 시절에는 찬밥, 더운밥 차이를 모를 때다. 우리 아버지처럼 밥상에 반드시 국이 있어야만 하는 나이도 아니었다. 

    내가 처음 들어간 ‘국민학교’는 논밭 한복판에 있었다. 학교를 가려면 논밭 사이로 난 울퉁불퉁한 길을 10여 분 걸어야 했다. 우리 학교는 ‘농촌급식시범학교’로 지정돼 어머니들이 돌아가면서 학교로 와서 점심을 만들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우리 반 당번들이 식당으로 가서 밥통, 국통, 반찬통과 식판이 가득 담긴 노란 플라스틱 상자를 직접 들고 왔다. 힘도 별로 없는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밥통이나 국통을 나르다가 손을 데기도 하고 철제 식판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다가 손에 자국이 나기도 했다. 

    밥은 맛있었다. 보리밥이 조금 섞인 쌀밥이었다.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과 친구들 먹이려고 만든 음식인 만큼 반찬도 좋았다. 감자가 듬뿍 들어간 ‘고로케’나 잘 튀겨진 돈가스가 아직도 기억난다. 

    국민학교 3학년 때 시내 학교로 전학을 갔다. ‘농촌급식’ 학교는 아니었기에 도시락을 싸가야 했다. 전학 첫날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함께 먹었다. 나는 아는 친구가 없어 혼자 내 자리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그때 등 뒤에서 “어이, 일루와. 같이 먹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우리 반에서 가장 잘생기고 키도 크고 리더십이 있던 친구였다. 지금 같았으면 허허 웃으면서 “그럴까” 하며 합석했겠지만 그때는 내 성격이 지나치게 내성적이었다.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 말이 “어, 내일부터 같이 먹을게”였다. 굳이 내일부터 같이 먹을 이유가 없었다. 너무 말이 안 돼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가 열 살 때였다.

    캔맥주와 쥐포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초등학교 5학년생인 아들은 학교에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는다. 학교에서 무상급식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농촌급식시범학교’를 다닐 때처럼 교실에서 배식을 한다. 다만 아들 말을 들어보니 우리 때와는 달리 국통, 밥통, 반찬통, 과일통을 아이들 말로 “급식 아주머니님”들이 교실로 넣어준다고 한다. 

    당번은 6명이 2주일씩 돌아간다. 당번은 밥, 국, 반찬1, 반찬2, 반찬3, 과일 담당이다. 반찬이나 과일이 조금 남으면 당번들이 우선적으로 더 먹는다고 한다. 엊그저께는 호떡이 하나 남아 당번들이 모여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아들이 먹게 됐다. 호떡을 들고 자리에 오니 전학 온 지 며칠 안 된 옆자리 친구가 그 호떡을 달라고 했다. 아들은 호떡만큼은 안 된다면서 다른 반찬을 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함께 듣던 막내딸이 야밤에 호떡을 사달라고 졸랐다. 

    내가 중학생 때 어느 선생님은 알코올중독이었다. 수업에 들어올 때마다 붉게 물든 얼굴에서 술 냄새가 났다. 그래도 뭔가를 가르칠 때는 열정이 있었다. 말을 잘했다. 내용이 있었고 지루하지 않았다. 그의 수업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또 있었다. 수업 시간의 절반만 수업을 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은 아직 공사 중인 위층(3층)으로 올라가서 벽에 페인트도 칠해지지 않은 예비 교실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 술을 반장인 내게 사 오라고 했다. 선생님 말로 “해장 도시락 배달”이었다. 그 도시락이 캔맥주와 쥐포였다. 

    나는 달려서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담을 넘어서 근처 점방에서 해장 도시락을 배달했다. 담을 넘어야 했던 것은 등하교 시간과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교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담을 넘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도둑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찝찝했지만 선생님 지시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줄 알 때였다. 내가 달려왔기 때문에 선생님이 캔맥주를 딸 때마다 거품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선생님은 뻘겋고 큼직한 얼굴을 캔에 대고 그것을 재빨리 흡입했다. 

    ‘해장 도시락’을 배달하고도 선생님이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그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러기를 일주일에 세 번씩 반복했다. 1년이 다 돼 가던 날 해장 도시락을 사 들고 계단을 올라가서 3층 복도를 걷다가 문득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학교 자체가 언덕 위에 있어서 창밖으로 산과 동네의 먼발치가 내려다보였다. 그 창문을 향해 캔맥주를 힘껏 던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락 파는 일을 하던 중년 여인이 이혼 소송을 낸 적이 있다. 남편은 늘 직업이 변변찮았다. 생활비를 여자가 거의 다 벌었다. 남편과는 한집에서 살 뿐 각방을 썼다. 말도 하지 않았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 여자는 자기 통장에 돈을 모았다. 그런데 이혼을 하게 되면 재산분할 제도에 따라 재산을 나누어야 한다. 이것은 이혼에 책임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지급이 결정되는 위자료와는 별도다. 

    부부가 함께 산 기간이 오래됐기 때문에 절반씩 가르는 게 원칙이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절반을 기준으로 조금씩 조정할 뿐이다. 부부 중 어느 한쪽이 주로 돈을 벌어왔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가 무직이었다고 해도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 재산의 증식과 유지에 절반씩 기여한 것으로 보는 게 요즘 추세다. 남녀평등의 관점에서 반대로 아내가 돈을 벌고 남편이 무직이었다고 해서 다르게 볼 수는 없다.

    너 판사 아니지!

    나는 조정실에 아내를 혼자 앉혀놓고(남편은 불출석) 이런 내용을 조곤조곤 설명해줬다. 덧붙여 설사 남편이 그동안 경제적으로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남편 말은 다르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재산분할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 여성은 거의 까무러치려고 했다. 이해할 만했다. 자기가 볼 때 남편은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아무런 기여를 한 것이 없는데 그동안 도시락을 팔아 번 돈의 절반을 내놓으라니. 그는 10원도 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게 삿대질을 하면서 고함쳤다. “너, 판사 아니지!” 

    그 순간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 판사 맞습니다!”라고 하자니 구차했다. 판사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법정 법대 위에 법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면 아마 그도 “너, 판사 아니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조정실에서 양복을 입고 앉아 있으니 판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자기가 볼 때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판단을 내리고 있으니. 나도 그 순간 판사가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사가 아니었다면 그런 매정한 말을 할 필요도 없으니. 판사가 아니었다면 그저 그의 가게에서 도시락을 사 먹으면서 맛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테니까.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전직 판사이자 현 행정부 공무원. ‘사는 듯 사는 삶’에 관심 많은 작가. 쓴 책으로는 에세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보헤미안랩소디’(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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