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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⑥

목마른 소녀 정윤희

눈부신 외모로 스크린 장악한 1970년대‘트로이카’의 전설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목마른 소녀 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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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그녀는 가수로도 데뷔한다. 데뷔곡은 ‘목마른 소녀’. 음정이 미묘하게 뒤틀린 그녀의 노래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욕망을 좇는 여주인공은 대개 부정적으로 보이기 일쑤인데, 정윤희는 전혀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고 연민을 자아낸다. 이른바 굿 캐스팅이었던 셈. 정윤희는 악녀도 아니고 팜 파탈도 아닌, 작은 체구로 남자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기 인생의 성공을 꿈꾸는 목마른 소녀였다.

짧은 전성기, 빠른 은퇴

영화배우로 5년 차에 접어들 무렵. 그녀는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에 출연한다. 1970년대 초 ‘으악새 영화’나 찍는다며 무시를 당하던 이두용 감독이 작심하고 만든 걸작이다. 제작사는 감독의 재능을 믿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으며, 감독도 쫓기지 않고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이 영화에서 정윤희는 빨치산 대장의 딸로 기구한 인생을 사는 여인으로 나와 그럴듯한 연기를 해낸다. 요란한 술집 작부 화장을 한 정윤희가 방석집의 벽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는 대목은 기구한 운명을 산 여성의 절망이 설득력 있게 표현된 장면이다. 이쯤 되면 “어라 정윤희도 연기를 하네”라며 놀랄 수밖에 없다. 정윤희도 자신이 남성 관객의 눈요깃감으로 소모되는 그런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즐긴 모양이다. 오대산 정상에서 촬영할 때의 일이다. 자신의 촬영분을 모두 마친 정윤희가 산 아래에서부터 갖고 올라온 꽁치통조림을 까서 불을 피워 꽁치를 굽고 술 한잔을 준비한 뒤 촬영에 지친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어여쁘고 귀여운 목소리로 “자 와서 꽁치 한 점과 술 한잔 하세요”라고 청해 모두를 기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때는 1980년. 이두용 감독의 야심작이며 한국 영화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인 ‘최후의 증인’은 갈가리 찢겨져 2시간 30분짜리 영화가 1시간 30분으로 잘리고 도려내졌다. 극장에서도 일주일을 못 채운 채 내려져 관객과의 만남을 원천 봉쇄당하고 만다.

이듬해 정윤희는 다시 임권택 감독과 만난다. 이번엔 ‘만다라’를 만들고 물이 잔뜩 오른 임권택 감독이었다. 영화 제목은 ‘안개마을’ 시골 학교의 여선생으로 출연한 정윤희는 마을의 바보이며, 이상한 남자 안성기에게 강간을 당한다. 안성기는 바보지만, 여성이 섹스에 목말라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는 여성의 욕구를 해소해주는 이상한 남자다. 그의 존재에 대해 마을 남성들도 여성들도 모두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정윤희가 약혼자와의 약속이 어그러지면서 히스테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 안성기가 따라와 그녀를 강간한다. 정윤희는 처음엔 반항하지만, 그와의 섹스로 뭔가가 해소되는 것을 느낀다. 임권택 감독은 마을을 떠나게 된 정윤희를 클로즈업해 여러 가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다. 정윤희는 몇 해 전 ‘임진왜란과 계월향’을 찍을 때 인기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찍었던 그런 배우가 아니었다. 아직 성에 차지는 않지만 임권택 감독이 주문하는 복잡한 감정을 미묘한 표정의 변화로 전달하는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뿔사! 그녀가 슬슬 연기자가 되어 가려던 그때. 그녀에게 들어온 영화는 ‘벌레 먹은 장미’였고, 몇 해 뒤 간통 사건이 터지고 그녀는 결혼을 하며 스크린에서 사라지고 만다.

아름다웠던 여인



나는 정윤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를 극장에서 동시대에 관람한 기억이 없다. 그녀가 조연으로 출연한 ‘고교 얄개’와 ‘고교 우량아’가 그녀를 극장에서 본 작품의 전부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거나 중학생이던 내 나이 또래의 남자 중 정윤희가 출연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애간장을 졸인 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 이야기에 낄 자리가 없다. 정윤희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정진우 감독, 1980)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정진우 감독, 1981)를 본 그들의 경험담을 듣다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를 보이면 그들은 대개 나를 깔보곤 했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오승욱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조소학과 졸업

영화 ‘킬리만자로’ 각본·연출

1999년 제36회 대종상영화제 각본상 수상


고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때, 버스를 타고 이태원 앞을 지난 적이 있다. 신호에 걸린 버스가 잠시 멈춰 섰을 때, 나는 인도에 사람들이 모여서 한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내 눈길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곳에 한 여자가 담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작고 까무잡잡하지만 아름다운 인형 같은 여자. 영화 촬영 중인 정윤희였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창가로 몰려들어 그녀를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신호가 바뀌고 차는 떠났다.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몇 해 전 DVD로 나온 정윤희 주연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를 보고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영화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정윤희의 얼굴이 예쁘다는 기억만 남은 것이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여배우 정윤희는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지만, 미처 세상을 태우는 불꽃이 되지는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신동아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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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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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소녀 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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