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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연기로 확인된 존재감 전도연

한국 여성의 욕망과 불안 뿜어내는 ‘칸의 여인’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연기로 확인된 존재감 전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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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하의 촬영 첫날, 시나리오 작가였던 나는 현장에 있었는데 나이 드신 스태프 한 분이 심은하 옆으로 다가가 예의를 갖추면서 “전작처럼 연기를 하면 안 된다.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았다. 스태프 모두가 심은하의 연기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랬던 심은하는 자신의 촬영분 3회 만에 “아, 다림이는 저런 여자였구나!”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며 현장을 설득하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여배우로 거듭났다.

전도연의 재발견 ‘해피엔드’

1990년대 중반 이후 심은하가 한국 영화계 최고 여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할 무렵 그늘에 가려 있던 여배우가 있었다. 1990년 존슨앤존슨 화장품 CF에서 청순한 소녀 이미지로 눈길을 끌고 뒤이어 TV 드라마 몇 편에 출연한 전도연이었다. 넓고 시원한 이마와 밝은 웃음이 매력적인 배우였지만, 너무 아기 같은 얼굴이었고 작아 보였다. 심은하, 고소영, 김희선 같은 미모의 여배우들이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고 있을 때 전도연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전도연의 첫 영화 출연작은 ‘접속’(장윤형 감독, 1997). 당시 전도연은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배우였다. 아무도 그녀의 연기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놀랍게도 전도연은 한 남자를 짝사랑하는 역을 설득력 있게 해냈다. 그러나 ‘접속’은 분명 전도연보다는 한석규에게 더 관심이 쏟아진 영화였다.

전도연의 두 번째 출연작은 ‘내 마음의 풍금’(이영재 감독, 1998)이었다. 전도연은 선생을 짝사랑하는 소녀 역을 맡았다. 전도연은 외모에서 풍기는 소녀 같은 이미지 때문에 두 편의 영화에서 성공했지만, 연기 폭은 너무나 좁게 느껴졌다. 그녀에게는 미성숙의 느낌이 강했다. 그것은 독특한 개성이면서 동시에 한계로 비쳤다. ‘약속’(채희주 감독, 1998)에서도 전도연은 조폭 두목과 사랑에 빠진 여의사 역을 맡아 미성숙의 이미지를 버리려 애를 썼지만, 모두들 박신양의 영화로만 생각했을 뿐 전도연에게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때까지 그녀의 연기에서 기억나는 것은 그저 활짝 웃거나, 수줍은 듯 웃거나, 큰 눈에서 수정 같은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지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이듬해, 전도연은 모험을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저 멀리 아파트 복도 끝에서 한 여자가 카메라를 향해 걸어온다. 활동적인 전문직 여성들이 즐겨 입는 고급 양장 바지 차림이다. 당당하게 걷는 그녀는 전도연이다. 그때 화면의 왼쪽에서 한 여성이 들어온다. 뒷모습이지만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투피스 차림이다. 성숙한 여성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녀가 전도연을 지나쳐 간다. 전도연과 그녀가 비교된다. 성숙해 보이려 눈 화장도 짙게 하고 옷도 차려입고 심지어 키도 비슷했지만, 전도연에게선 뭔가 미성숙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전도연이 들어간 곳은 내연의 남자 주진모의 집이다. 장면이 바뀌면 뒤엉켜 서로의 혀를 탐닉하는 두 남녀가 화면에 가득 찬다. 영화가 시작하자 마자 관객들의 눈앞에 섹스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미성숙하고 청순할 것만 같은 전도연을 떠올리던 관객들의 허를 찌르며 영화가 시작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신인 감독 데뷔작의 첫 장면에서 여배우의 가슴을 보여주고, 돈벌이를 위한 섹스신이 아니라 남녀 사랑의 밀도를 표현하기 위한 농밀한 섹스신을 성공적으로 담아낸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여배우 전도연의 연기였다. 소녀 같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연기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과감하게 도전한 그녀의 배우 정신 때문이었다. ‘해피엔드’(정지우 감독, 1999)를 보는 순간 나는 그녀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

어둠과 빛을 연기한 여배우

영화 속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의 스토리를 관객에게 설득하기 위해 여배우는 섹스신을 연기해야 한다.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섹스신이 필요하다면 감독은 연출하고 여배우는 연기해야 하는 것이다. 1970~80년대에 여배우들을 이용해 불필요한 섹스신을 찍어댔던 한국 영화계의 트라우마가 영화 일을 하는 우리들의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신인 정지우와 전도연은 그것을 과감하게 걷어내버렸다.

영화 속 전도연은 더 이상 나무 뒤에 숨어 짝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을 훔쳐보곤 수줍게 미소 지으며 달콤한 사랑을 꿈꾸는 소녀가 아니었다. ‘해피엔드’에서 전도연은 두 남자, 남편 최민식과 내연의 남자 주진모를 자기 앞에 세워놓고 둘이 서로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서 오랜 세월 거세돼온 여성의 권력의지를 각성하고 미소 짓는 여자를 연기했다. 다가올 2000년대 한국 여성들의 욕망과 결핍을 표현하는 여배우로 거듭난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의 변화와 자각이 두드러졌다. 서비스산업이 발전하면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잘하는 일이 생겨났고, 여성들은 그 분야에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남성보다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똑같은 일을 해내는 여성 노동자를 자본도 선호했다. 출근길 전철에 탄 남성과 여성의 수가 대등해졌다. 여성 전용칸만으로는 여성을 수용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오랫동안 남성들의 세계였던 이곳에서 돈을 번 여성들이 자기계발서를 사 읽고, 나는 무엇이고 뭘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요가를 하고 헬스를 하고, 성형수술을 하고, 멋진 남자들과 섹스를 한다.

하지만 뭔가가 채워지지 않는다. 그녀들의 욕망과 불안은 뭘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해피엔드’에서 전도연은 이러한 2000년대 한국 여성의 욕망과 불안을 처음으로 설득력 있게 연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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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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