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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 황승경 |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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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음악·대중음악 융합한 ‘미국식 크로스오버’ 기수 레너드 번스타인

미국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탱글우드 음악축제. 번스타인은 이곳에서 스승 쿠세비츠키를 만났다.

1951년 번스타인은 FBI(미 연방수사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아야 했다. 1953년에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 그의 진보적 예술가 동지들이 출두했다.그들은 동료들에게 죄를 떠넘기기에 여념 없었다. 비록 번스타인은 청문회에 소환되지 않았지만 유럽 연주여행을 위해 필요한 여권 갱신이 거부됐다.

유럽 연주회에는 미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스칼라극장에서 지휘하는 영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지휘하는 오페라 ‘메데아’의 주연은 전설적인 마리아 칼라스로 예정돼 있었다. 번스타인의 입지를 유럽에 구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당국의 불편한 심기를 달랠 만한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하고서야 새로운 여권을 발급받아 이탈리아로 떠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원칙과 신념을 부정하고 폄하했다는 비난에 갇히게 됐다.

급진파의 변신

번스타인은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과 활동이 왜 전통적 노동자 계층으로부터도 외면받았는지 생각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경제공황이 끝나고 찾아온 풍요 덕분에 소득이 늘어나 소비 문화를 만끽했다. 단란한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달콤한 맛을 아는 미국인들에게 계급투쟁이니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니 하는 케케묵은 말은 거부감만 일으킬 뿐이었다.

더구나 가장 중요한 국익을 외면하는 지식인들의 ‘기계적인 반대’는 나와 내 가족의 번영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낳았다. 이에 번스타인은 ‘국익을 저해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주는 사상은 자유주의 기업경제를 추구하는 미국 사회와 공존하지 못하고 배척당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변신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번스타인은 가장 미국적이고 미국인에게 사랑받는 지식인이 됐다. 진보당 인사에서 민주당의 열혈지지자로 변모한 뒤인 1956년 그는 하버드대 은사인 미트로풀로스와 뉴욕 필하모닉의 공동 상임지휘자가 됐다. 그의 높은 지적 수준과 유창한 언변, 젊고 호감 가는 외모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더욱이 유료 티켓 판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대인들의 구미도 만족시킬 수 있는 안성맞춤 지휘자였다.

1960년 민주당의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번스타인의 정치적인 입지는 더욱 넓어졌고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미국에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팝아트 등으로 상징되는 개인주의, 자유방임주의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번스타인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지지하는 셀마 대행진에 참가하는 등 여전히 정치적인 언행을 이어갔지만 대중은 과거처럼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펠레의 저주와 같은 것이었을까.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그는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을 지휘했다. 그러나 뒤이어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했고, 번스타인이 적극적으로 지지한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 유진 매커시, 뉴욕 상원의원 후보 폴 오뒤어 등이 줄줄이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럼에도 번스타인은 베트남전 종전시위와 같은 각종 사회적, 정치적인 현안에 적극 참가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소수파요, 약자였다. 유대인이었고 급진적 진보주의자였으며 동성연애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강력한 소수’였기 때문에 항상 이슈를 몰고 다녔다. 번스타인은 칠레 출신 여배우 펠리시아와 결혼한 뒤 세 자녀를 얻었지만 그의 동성연애 행각으로 부부는 냉각기 끝에 별거에 들어간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숨기기 위해 결혼을 감행했다는 의심을 받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아내가 암으로 투병하자 집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성껏 간호하며 곁을 지켰다.

‘강력한 소수파’

급진적 좌파였던 번스타인은 나치당원 출신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음악적으로 보면 두 사람에게서 반대 성향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다만 지휘 스타일에서 번스타인이 열정적인 행위예술가였다면, 카라얀은 절제되고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였다. 작곡자 번스타인이 음악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려 했다면, 피아니스트 출신인 카라얀은 음질과 소리로 음악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미국과 유럽 두 대륙을 대표하는 최고의 거장이었고, 서로에게 긍정적 시너지 효과를 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 크리스마스에 번스타인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베를린에서 연주했다. 그는 폐암과 싸우고 있었지만 역사적 현장의 분위기에 고무됐다. 그는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 나오는 ‘신들의 불꽃보다 더 빛나는 환희여’라는 첫 문장에서 ‘환희’를 ‘자유’로 바꿔 부르게 했다.

번스타인은 얄팍한 순발력과 노련함으로 급변하는 미국 사회의 흐름에 재빠르게 대처한 장사꾼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사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1950년대에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시작한 TV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가 대표적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 오페라를 작곡하겠다는 의지도 충만했다. 걸작 오페라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는 활발한 지휘 활동 와중에도 교향곡 ‘카디시’(1963)와 ‘치체스터 시편’(1965), 뮤지컬 ‘거리에서’(1944)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57), 피아노와 관현악곡 ‘불안의 시대’(1949), 발레음악 ‘팬시 프리’(1944)’ 등을 작곡했다.

그는 풍부한 감성과 정열을 지닌 현대적인 로맨티스트였다. 그의 음악에는 그가 음악에 대해 품은 깊은 애정과 인간에 대한 예의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장례식 때 추도행렬이 지나가자 공사판 일꾼들도 모자를 벗고 경건하게 애도했다고 한다.

신동아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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