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어 라이프<br>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
어딜 가든 발길은 서점으로 수렴되는 버릇대로 안으로 들어가 선 채로 문예지를 후르륵 훑어보았다. 흡사 박완서 선생의 모습을 다시 보듯 부드러운 미소로 비스듬히 정면을 향한 백발의 여성 노작가에 눈길이 멈췄다. 그녀의 사진 위에는 아직도 그녀를 만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듯 큰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먼로를 읽으세요, 먼로를!’
어린 시절 나는 길게 뻗은 길 끝에서 살았다. 아니 어쩌면 내게는 길게 느껴졌던 길 끝에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집으로 걸어 돌아올 때, 내 등 뒤 진짜 타운에는 활기찬 분위기와 보도와 어두워지면 켜지는 가로등이 있었다. 매이트랜드 강에 놓인 두 개의 다리가 타운 끝을 표시했다. (…)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에 두 번 유산을 했다. 그러니 1931년 내가 태어난 그해에는 틀림없이 흐뭇한 분위기가 감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암울해져갔다.
-‘디어 라이프’ 중에서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
3개월 뒤 먼로는 캐나다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82세, 2012년 소설집 ‘디어 라이프’ 출간을 끝으로 긴 작가 인생에 마감을 선언한 1년 뒤였다. 앨리스 먼로는 누구인가. 그날 나는 산책을 마치고 이날코 도서관에서 앨리스 먼로의 책을 찾았다. 동양어대학 도서실이니 그녀의 책이 있을 리 없었다. 가까운 국립 프랑수아미테랑 도서관이나 퐁피두 도서관으로 가든지, 인터넷 서점에서 전자책을 찾아봐야 했다. 한국에는 두 권이 번역되어 나와 있었고, 최근 몇 년 사이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던 캐나다 영화 ‘A way from her’(2007)의 원작이 그녀의 단편 ‘곰이 산을 넘어오다’(2001)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각색된 영화로나마 이미 먼로를 만났던 것이다.
기억을 다 잃고 나면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할까?
“어떤 사람들은 그냥 앉아 있죠. 어떤 사람들은 앉아서 울어요. 또 어떤 사람들은 집이 무너져라 소리를 지르죠. 모르는 게 차라리 나을 거예요.” 크리스티가 말했다.
“일 년 넘게 방을 드나들어도 당신이 누군지 전혀 몰라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인사를 하면서 집에 언제 갈 수 있냐고 묻죠. 갑자기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
“(…) 정신을 찾았네, 라고 생각하지만 원래대로 돌아가곤 해요. (…)”
-‘곰이 산을 넘어오다’ 중에서
영화 ‘어 웨이 프럼 허’의 원작인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그랜트와 피오나라는 노년 부부에게 닥친 치매(알츠하이머)에 대한 이야기다. 전 세계 영화 관객들에게 깊이 각인된 미하일 하케네 감독의 ‘아무르’(2012)와 같은 주제인데,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는 남편(그랜트)이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고 겪는 이야기, ‘아무르’는 요양원을 극도로 거부한 아내를 남편(조르주)이 집에서 간병하며 겪는 이야기다.
위의 인용처럼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피오나는 정상과 비정상을 오가다 비정상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그랜트에게 곤혹스러운 상황을 안겨주는 경우이고, ‘아무르’의 안느는 점점 증세가 악화되는 것을 보다 못한 조르주가 베개로 숨을 멎게 해 최후를 맞는 경우다. 어떤 경우이든 정상 상태에 남겨진 남편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며 천형(天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