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호

떠나자! 와인과 함께

[황승경의 Into the Arte]

  • 황승경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2-02-0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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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망에서 피어나는 희망 이야기

    • 미각·시각·후각·청각 움틔운다

    영화 ‘와인 패밀리’ 스틸컷. [해피송 제공]

    영화 ‘와인 패밀리’ 스틸컷. [해피송 제공]

    코로나19가 일상을 바꾼 지 2년. “가족 빼고 모두 멀어졌다”는 말이 나올 만큼 ‘집콕’에 익숙해졌다. 예전 일상은 아득하기만 하다. 올해도 해외여행은 ‘그림의 떡’일 듯하다. 집에서 와인 한 잔을 놓고 색과 향, 맛을 그윽하게 음미하며 퍽퍽해진 감성을 영화로 촉촉이 만들어보면 어떨까. 와인 관련 영화 2편이 우리를 해외여행으로 이끈다. 영화 ‘와인패밀리’(2021), ‘구름 속의 산책’(1995)과 함께 겨울을 아늑하게 보내보자.

    와인 통해 느끼는 삶의 철학

    와인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술이다. 포도는 기원전 5000~6000년 중동 지역에서 재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와인이 물을 대용하던 고대 그리스 시대 이탈리아반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포도 농사를 강요받았다. 억지로 시작한 포도 농사지만 이내 이탈리아반도 사람들도 와인에 흠뻑 매료됐다. 이는 로마제국의 문화로 이어졌고 전 유럽으로 진출한 로마인은 와인을 만들고자 농장을 건설했다.

    이탈리아는 현재 명실상부 와인 종주국으로 전 세계 와인 생산량 1위, 소비량 3위다. 영화 ‘와인 패밀리’는 와인에서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맛과 멋을 이탈리아 특유의 감성으로 풀어낸다. 영화엔 자연의 섭리, 수확의 기쁨, 숙성 과정의 인고를 느끼며 깨우치는 남다른 철학이 드러난다.

    이탈리아 남부의 해발 800m 산악마을 아체렌차가 영화의 공간 배경이다. 주인공 마크(조 판톨리아노)는 유복자로 태어나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아체렌차의 작은 포도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960년대 엄마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마크는 캐나다 국적의 아름다운 그래픽디자이너 마리나(웬디 크로슨)를 만나 행복한 결혼을 하고,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한다. 변호사로 성공가도를 달리다 자동차 회사 CEO가 되지만 실상은 빛 좋은 개살구다. 회사일이 바빠 아내와는 각방을 쓴 지 오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딸 라우라(폴라 브랜카티)와는 의절한 지 3년. 어느 날 수익에만 혈안이 된 회사 이사회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구상한 친환경 프로젝트를 단번에 거절한다. 모든 것에 염증을 느낀 그는 훌쩍 사표를 내던지더니 귀국일 미지정의 이탈리아행 티켓을 구매한다. 아무 의논도 없이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에 아내 마리나는 불같이 화를 내지만 마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캐리어 하나 달랑 가지고 비행기에 오른다. 고향을 떠난 지 45년 만의 귀향이다.

    영화로 ‘떠나는’ 이탈리아 남부

    영화 ‘와인 패밀리’ 스틸컷.  [해피송 제공]

    영화 ‘와인 패밀리’ 스틸컷. [해피송 제공]

    아체렌차는 인구 2500명의 작은 산악마을이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지만 알려지지 않은 10곳’에 선정할 만큼 매혹적인 곳. ‘언덕 위 구름도시’라는 점이 눈길을 끌지만 이것이 아체렌차가 지닌 매력의 전부는 아니다. 국토의 75%가 산지인 이탈리아는 적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고산 지역에 도시를 형성했다. 그래서 이국적 풍광을 가진 산악도시는 아체렌차 외에도 많다. 아체렌차의 아름다움은 주변을 둘러싼 포도밭으로 완성된다. 계절과 빛에 따라 변하는 포도의 색조는 보는 이들을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다.



    이탈리아 와인에 쓰이는 포도 품종은 300개가 넘는다. 이탈리아 북부 ‘네비올로’, 중부 ‘산조베제’, 남부 ‘알리아니코’ 3가지가 대표적이다. 이탈리아 와인 중에서 한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바롤로(Barolo)는 네비올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와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는 산조베제다.
    개마고원, 제주도 날씨가 천지차이인 것처럼 반도국가 이탈리아의 지역 기후 또한 천차만별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이글거리는 여름 햇빛은 10분만 걸어 다녀도 피부가 벌겋게 벗겨질 정도로 강력하다. 장화 모양 이탈리아반도의 복숭아뼈 위치쯤에 있는 아체렌차에선 충분한 일조량으로 타닌(떫은맛과 쓴맛을 느끼게 하는 페놀 화합물)이 무르익을 수 있게끔 늦게(10월 혹은 11월) 포도를 수확한다. 그 덕분에 이곳의 와인은 농밀한 과일 향과 깊은 색, 균형감 있는 산도가 조화를 이룬다. 영화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이탈리아 남부 포도밭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영화는 갑자기 포도나무들이 대화한다거나 도시 곳곳 각종 동상이 윙크하고 표정을 바꾸는 장면을 CG(컴퓨터그래픽)로 익살스럽게 그려낸다. 혹자는 ‘옥의 티’로 유치한 CG를 거론하지만 오히려 이 덕분에 관객은 다른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아체렌차의 2600년 역사를 체험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걷는 골목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고대 궁전, 중세 대성당, 근대 소작농의 허름한 주택 등 이탈리아반도의 역사가 묻어나는 건축물이 구석구석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감독은 고대 로마가 연상되는 수도꼭지조자 허투루 넘기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 관객이 아체렌차 여행객이 된 것처럼 도시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잃어버린 ‘여행 감각’ 일깨우다

    영화 ‘와인패밀리’ 포스터. [해피송 제공]

    영화 ‘와인패밀리’ 포스터. [해피송 제공]

    마크의 귀환을 축하해 주는 마을 사람들의 아코디언 댄스파티는 실제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단역배우들도 실제 마을 사람들이다. 캐나다인 숀 시스터나 감독은 아버지가 태어난 나라 이탈리아 와인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친근함을 스크린에 담았다. 마크는 고향 땅이 주는 순수함에 큰 감동을 받고 도망치듯 이탈리아로 날아온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간 시도하지 못한, ‘의미 있는 사람 돼보기’를 결심하고 포도밭을 되살리기로 다짐한다. 직장에서 일할 때 노후를 위해 알뜰살뜰 부어온 연금을 해약한 마크는 할아버지 사후 체납한 세금을 모두 갚고 본격적인 포도 농사에 돌입한다.

    마크의 다짐과 달리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탈리아 남부는 산업 기반이 취약해 50% 넘는 청년실업률에 허덕인다. 아체렌차도 예외는 아니다. 포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마르첼로(토니 나르디)는 마을 경제에 헛된 희망을 안겨줄 것을 염려해 마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마리나와 라우라가 마크의 결심을 되돌리기 위해 캐나다에서 찾아오지만 가족들도 이내 와인에 매료되고, 그동안 소 닭 보듯 서먹하던 가족관계는 돈독해진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살았음을 깨달은 가족은 한마음으로 포도 농장을 살리는 데 주력한다. 마르첼로도 마크의 진심을 깨닫고 의기투합한다.

    영화엔 마크가 포도 농장에서 새참으로 바구니에 수북이 담긴 빵에 와인을 곁들여 먹는 모습이 나온다. 새소리 가득하고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포도밭에서 마크는 와인 한 모금에 빵 한 조각을 집어 들고 덥석 뜯어 먹는다. 이 장면은 침이 꼴깍 넘어가는 ‘먹방’과는 다른 차원의 감각을 선사한다. 이탈리아 빵은 밀가루와 올리브유로만 발효시켜 만들어 ‘무(無)맛’에 퍽퍽하다. 투박하고 담백한 이탈리아 빵과 산도가 높아 달짝지근 쌉싸름한 이탈리아 와인의 풍미는 둘을 곁들여 함께 먹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나는 와인과 빵을 먹으며 잔치를 하고, 잔치란 와인과 빵 그 자체”라고 말한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말은 지당하다.

    고즈넉한 포도밭에서 마르첼로는 알리아니코 품종은 관개시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신이 내리는 빗물만으로 자라게 하며 자연의 섭리로서 충만한 인내와 사랑을 따르는 것만이 최고의 풍미를 얻는 유일한 길”이라 설명한다. 영화의 원제 ‘From the Wine’은 와인으로부터 알아가는 고통, 갈망, 희망, 희생, 행복을 의미한다. 와인은 누군가의 손톱에 끼인 흙과 얼굴에 쏟아지는 강렬한 빛이 만들어내는 예술작품이다. 가격이 비싸다고 좋은 와인이 아니다. 와인으로부터 감동이 느껴져야 한다. 눈으로 보는 색, 코로 마시는 향, 그리고 삼켰을 때 와인이 탄생하기까지의 여정이 느껴진다면 좋은 와인이다. 영화를 보면 이 말의 뜻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남부의 소박한 목가적 전경, 소리, 맛을 전해 주는 운치 있는 영화 ‘와인 패밀리’가 마비된 여행의 감각을 일깨워 줄 것이다.

    1940년대 포도농장

    [GettyImage]

    [GettyImage]

    영화 ‘구름 속의 산책’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 포도 농장을 배경으로 한다. 1860년대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미국의 포도 농장은 1919년에서 1933년까지 시행된 금주법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45년은 포도 농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때다. ‘구름 속의 산책’에선 마치 한 편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 같은 안개 자욱한 포도밭 풍경과 함께 전통적인 와인 제조 방식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폴(키아누 리브스)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징집당해 4년 동안 전장을 누비다 샌프란시스코 집으로 돌아온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아내 베티(데브라 메싱)의 등쌀에 전직인 초콜릿 외판원으로 생업 전선에 뛰어든다. 캘리포니아 내파밸리 지역을 지나던 폴은 우연히 기차에서 곤경에 처한 빅토리아(아이타나 산체츠 기욘)에게 도움을 준다. 그런데 얼마 후 한적한 시골 오솔길에서 울고 있는 빅토리아와 재회한다. 사실 도시 유학 생활 중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빅토리아는 그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림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엄격한 아버지가 무서워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었던 것. 딱한 사연의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던 폴은 ‘일일남편’으로 하루만 그녀의 보호막이 돼주기로 한다. 빅토리아의 집안은 1580년에 포도나무만 가지고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이민 와 포도 농장을 일궜다. 이후 다시 미국 서부로 이주해 대대로 ‘구름농장’이라는 이름의 방대한 포도 농장을 운영해 온 유서 깊은 가문이다.

    빅토리아의 아버지 알베르토(지안카를로 지아니니)는 딸의 혼전 임신만으로도 화가 치미는데, 딸이 남편감이라며 데리고 온 폴이 고아에다 변변찮은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에 언짢은 마음만 가득하다. 한편 그날 밤 서리가 내려 농장에 비상이 걸린다. 수확을 목전에 둔 포도가 얼면 당도가 떨어져 양질의 포도즙을 추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농장 인부들은 모두 양팔에 커다란 날개를 단 채 날갯짓을 하며 포도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휘영청 밝은 달밤에 ‘이게 웬 달밤의 체조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 장면은 영화를 대표하는 명장면 중 하나다. 사실 이는 최고의 와인을 만들 수 있게 한 가문의 오랜 비법이었던 것.

    잠옷 바람으로 함께 포도밭을 누비며 폴과 빅토리아 사이엔 미묘한 감정이 흐르지만 아침이 밝자 폴은 ‘일일남편’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선다. 빅토리아의 할아버지 돈 페드로(앤서니 퀸)는 폴을 붙잡고 “이제 한 가족이 됐으니 더는 고아가 아니다. 가려거든 수확이 끝난 다음에 가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폴에게 여전히 건재함을 자랑하는, 스페인에서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가져온 가문의 400년 된 포도나무를 보여준다. 폴도 이제 가족의 일원이 됐다고 생각한 그는 “이 나무는 단순한 구름농장의 뿌리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라고 설명한다.

    영화 ‘구름 속의 산책’ 포스터. [20th Century Fox 제공]

    영화 ‘구름 속의 산책’ 포스터. [20th Century Fox 제공]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포도를 수확하자 축제가 열린다. 치마를 걷어 올린 마을 여인들이 포도가 담긴 큰 오크통 안으로 뛰어들어 맨발로 포도를 으깨며 흥겨운 춤을 춘다. 경쾌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한 폴과 빅토리아는 꽁꽁 숨겨둔 속마음을 내놓으며 사랑을 확인하지만 아내가 있는 폴은 빅토리아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빅토리아의 남편이라는 거짓말이 그녀의 가족에게 발각되고 폴은 그대로 구름농장을 떠난다. 폴은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며 집에 도착하는데, 베티는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 있다. 폴은 곧장 빅토리아가 있는 구름농장으로 향한다. 구름농장에서 술에 취한 알베르토와 폴은 몸싸움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알베르토는 실수로 불을 낸다. 포도밭에 옮겨붙은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아름다운 포도 농장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다. 모두 ‘다 끝났다’는 허망함에 넋이 나간 가운데 폴은 400년 된 포도나무의 뿌리가 살아 있음을 발견한다. 이에 폴과 빅토리아는 다시금 희망을 품고 서로 사랑을 다짐한다.

    영화 ‘구름 속의 산책’ 스틸컷. [20th Century Fox 제공]

    영화 ‘구름 속의 산책’ 스틸컷. [20th Century Fox 제공]

    끝이라 생각한 절망 속에서도 살아남은 포도나무처럼 와인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와인은 포도 수확 이후 재배-수확-압착-발효-숙성-병입(병에 담는 것)의 과정을 거친다. 마지막 단계 병입도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병 안에서도 와인은 계속 숙성된다. 그렇기에 와인은 항상 가능성을 머금은 존재다. 영화 ‘구름 속의 산책’은 와인을 소재로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스스로의 가능성을 일깨운다. 정리되지 않은 채 구석에 접어둔 감정을 꺼내 생기를 불어넣는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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