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30일 전야제 겸 디너쇼에 참석한 호주 각계의 저명인사들.
이에 힘입은 소피아스포렌은 2008년 중순 호주대학과 공동으로 한국포럼을 개최했다. 호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로위연구소에 의뢰해서 ‘호주 주류사회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위상과 한국 문화 선호도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를 책자로 만들어서 한국 정부에 전달해 해외 문화정책을 수립할 때 활용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녹음기술자의 실수로 포럼의 기록을 남기지 못해 책 출간을 포기하는 아픔을 겪었다.
“모든 생물은 힘들어한다”
이후 소피아스포렌의 그래프에 완만한 하강곡선이 그려졌다. 각종 공연 성공과 스포츠 팀 승리로 상승세를 탄 여세를 몰아 호주 주류사회로 진입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 더욱이 수입 한 푼 없이 수십만달러를 쏟아 부은 월드컵 응원전 준비과정에서 발생한 일부 한인동포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힘이 빠지던 상황이었다. 문미영 대표의 탄식 어린 독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헛소리 마라! 삶이 한두 번 박살나지 않으면 인생이 뭔지도 모르고 짐승처럼 죽어야 한다. 울지 마라! 사랑에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헛사랑에 불과하다. 나라사랑과 동포사랑은 연인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엄살 피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힘들어한다.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다. 아무리 시드니가 아름답다고 해도 마음속에서 비가 내리면, 그저 비 내리는 항구에 지나지 않는다. 기어이 사막을 건너가고야마는 낙타처럼 천천히 걸어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문미영 대표는 일본 법정대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와세다대 대학원에 개설된 심리학 과정을 2년 동안 수료한 다음, 연세대 교육대학원에서 아동심리학을 전공했다. 사업가 집안의 딸로 태어나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했지만 마음고생이 많은 소녀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전형적인 사업가 집안의 분위기가 작가와 연극배우를 꿈꾸면서 문화적 인간으로 살고 싶었던 그를 끊임없이 억압했다.
그렇게 참으면서 살아야 했던 문미영이 마침내 돌파구를 찾았다. 1년 동안 일본 교환학생으로 가게 된 것. 1970년대 말, 기독교방송에서 주관한 1년짜리 교환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서 당시로서는 여권조차 내기 힘들었던 17세 고등학생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스스로에게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우리 집안이 부럽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풍요롭게 사는 것만으로는 존재감을 가질 수 없었어요. 1년간 교환학생 생활을 하고 돌아온 다음 1983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문학과 심리학에 천착한 것도 그런 상실감을 보상받기 위한 노력이었을 겁니다.”
유학생 문미영은 와세다대 대학원에 개설된 후카자와 교수의 심리학 과정을 이수하면서 새로운 정신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정신의학인 줄 알았던 심리학이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도구임을 알게 된 것. 더욱이 일본 유학 기간에 겪은 두 나라 간의 문화적 갈등을 통해서 ‘지구인’이라는 평생 화두를 얻었다.
“일본에 건너가보니 다수의 일본인과 소수의 재일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는지 ‘국화와 칼’ 같은 일본의 문화가 좋았어요. 그럼에도 ‘시계 같은 일본인’한테서는 거부감이 일기도 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낳은 아들을 키우면서 겪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차별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지구인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런 과정에 아들을 일본학교에서 한국인학교로 전학시켰고, 그걸 계기로 일본인과 재일한국인말고도 한국인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그때까지는 일본에 한국학교(조총련계 학교가 아닌)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