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9월 부안 주민들이 핵폐기장 건설 반대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바람이 몹시 불 때만 출렁일 뿐 얌전히 오가는 파도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는 섬에서 태어나 평생 바다를 가까이 두고 지내온 저에게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변산의 가을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바다의 아량과 지혜와 덕을 배우고자 함도 있지만, 아직도 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회한과 설움과 분노를 다스리고자 함이 더 솔직한 이유일 것입니다.
‘부안사태’, 벌써 3년3개월이 지났습니다
혐오시설은 우리 동네에는 안 된다는 님비현상을 넘어 ‘어디에든 아무것도 짓지 말라’는 바나나(BANANA·Build Absolutely Nothing Anywhere Near Anybody) 현상이 일어나 모든 환경단체의 집합지가 되었던 부안. 그로 인해 연일 ‘죽음의 땅으로 바뀌어간다’는 저주 어린 연설과 전단이 난무했던 부안. 그리고 이젠 정부의 방치 속에 잊히고 있는 부안….
깊이와 색깔을 알 수 없는 가을 바다처럼 눈에 띄게 변한 것은 없지만, 웃음이 가시고 말수가 적어지고 믿음이 줄어든 것은 부안사람들만이 느끼는 상처입니다. 아직도 부안에는 빨간 옥도정기가 발라졌던 생채기가 남아 있어 잔인하고 모질던 시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남시장의 역발상에 박수를 보냅니다
며칠 전 신문에 ‘하남시장의 역발상’이란 제목으로 하남시장이 ‘하남에 광역 폐기물 처리장과 화장장을 유치하는 대신 정부에 대해 전철 건설비와 지역개발비를 부담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하남시장은 과거 부안이 방폐장 유치 신청을 한 것을 보고 그런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저는 하남시장의 결단을 말리고 싶었습니다. 외롭고 힘든 싸움이 벌어질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 지역발전이 먼저다”라고 외치겠지만 막상 그 일을 시작하면 넘어야 할 산이 부지기수로 닥쳐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남시장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부안의 이웃인 군산을 보십시오. 군산은 경주에 방폐장을 뺏긴 후 주한미군 사격장인 직도 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여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군산이 주한 미공군 사격장을 허가하기 위해 주민투표를 실시했던가요? 군산은 ‘선(先) 추진, 후(後) 대화’라는 방침으로 별다른 갈등 없이 문제를 마무리지었습니다.
부안사태와 같은 일을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한다고 도입한 게 주민투표제인데, 주민투표제는 방폐장 유치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나 봅니다. 억울하고도 억울하지만 저는 군산을 향해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정치인과 사회단체의 이기심
두려운 것은 기업과 정치인, 그리고 사회단체의 이기심입니다. 이것이 사라진다면 주민들의 의식은 변할 수 있고, 그 변화는 지역의 미래 비전과 조화를 이뤄 좀더 나은 도시를 만들게 할 수 있습니다.
경주는 방폐장 유치에 성공했지만 한수원 본사 이전을 놓고, 한수원 노조와 경주시 사이, 그리고 경주 안에서의 지역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저로서는 부럽기도 한, 웃지못할 갈등입니다.
하남시장이 광역 화장장 유치를 선언하자 그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은 “인구 13만의 하남에 광역 화장장이 유치되면, 과거의 벽제처럼 ‘하남=화장장’의 등식이 성립한다. 그로 인해 하남의 부동산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하락할 것이다”라며 주민을 선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