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박근혜는 더 말해야 한다

  • 입력2011-04-20 16:5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박근혜는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는 아니었다. 부모의 후광(後光)이 그녀를 비추었을 뿐이다. 아버지 박정희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다. 산업화와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대통령’이자 비(非)민주 반(反)인권의 ‘개발 독재자’였다. 한편에서는 그를 찬양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비난한다. 우리사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 갈등의 저변에는 여전히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쟁점이 자리하고 있다. 박근혜로서는 운신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았을 강인함과 신중함으로 자신을 얽어맬 수 있는 조건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대중의 감성은 ‘박정희의 딸’에 대한 연민으로 치환되었고, 그녀는 어머니 육영수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화답했다. 미소와 짧은 말이 빚어내는 ‘공주의 아우라(aura·특수하고 미묘한 분위기)’는 그녀에게 일정한 신비감을 안겨주었고, 어느새 그녀는 ‘박정희의 딸’에서 국민으로부터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정치인 박근혜’로 자립했다.

    당대표로서 만신창이가 된 ‘차떼기 당’을 살려냈던 박근혜 의원은 ‘보통 의원’이 아니다. 그녀는 현재 거의 유일하게 청와대를 긴장시킬 수 있는 여당의원이다. 친박계의 수장이자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인 그녀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대통령도 자신의 소신을 접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6월, 이명박 대통령이 정운찬 총리를 앞세워 드라이브했던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됐다. 친박계의 수장인 그녀의 반대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국민에게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치는 바로 설 수 없다는 ‘공자 말씀’이었다. 기존의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옳은 것인지, 수정안의 교육과학중심도시가 옳은 것인지를 떠나 그녀는 ‘신뢰의 정치’라는 무형의 가치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의 이미지에 충청권의 지지를 예약했다. 도랑 치고 가재 잡은 격이다.

    언제부터인가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박근혜 의원의 입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언론 역시 늘 그녀의 말에 주목했다. 그녀의 발언은 대체로 짧았으나 무게는 내용에 비해 무거웠다.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그녀는 혹시 스스로 차별화된 존재감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녀의 집권의지가 분명하다면 이제 국민은 그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아우라의 베일을 벗겨내야 한다.

    동남권 신공항 논란에서 박 의원은 예의 국민과의 약속이란 화두를 꺼냈다.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아야 예측가능한 나라가 되지 않겠느냐”는 명징한 논리다. 그러면서 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계속 추진되어야 할 사업이라고 했다. 현재의 예상대로 그녀가 한나라당의 차기 대선후보가 된다고 가정한다면 첫 공약을 내놓은 셈이다.

    이 대통령은 동남권 신공항 건설계획을 백지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나라 살림을 책임진 대통령으로서 경제적 타당성이 결여된 경우 국가와 지역의 부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한 사람 편하자고 국민에게 불편과 부담을 주고 다음 세대까지 부담을 주는 이런 사업을 책임 있는 대통령으로서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남권 신공항을 경남 밀양에 건설하든, 부산 가덕도에 세우든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결론은 이미 2009년 9월에 내려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발표를 그해 연말로 미루더니 다시 6개월을 연장했다. 왜 그랬을까?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고려한 정치적 계산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고도 다시 9개월이 더 지났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에 밀양과 부산 간 갈등이 증폭되고, 지역구 표에 목을 걸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과 지자체장들이 앞장서 이전투구를 벌이게 됐다.

    애당초 지키지도 못할 공약(公約)을 왜 했느냐는 소리는 하나마나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든 당장 표 되는 일이라면 죽은 사람 살려내겠다는 말 빼놓고는 다 할 수 있는 것이 선거판 아니던가. 또 후보 공약 따져보고 투표한 유권자가 도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다들 빤히 아는 얘기들을 놓고 여야가 정색을 하고 삿대질을 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다. 오히려 다음 선거에서부터라도 표 모으기 가짜 공약은 하지 않겠다는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어쨌든 “선거 때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는 공약(空約)이었으면 빨리 정리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 데서 이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이 없는 사업이라면 늦게라도 접어야 한다. 그 점에서 대통령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결정은 옳다. “대통령 한 사람 편하자고 다음 세대에 부담을 줘서 되겠느냐”는 말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대통령의 바른 소리다.

    그런데 박근혜 의원은 백지화 결정이 옳지 않다고 반박했다. 당장 경제성이 없더라도 미래를 위해 신공항 건설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래의 초과수요는 근거 있는 예측인가? 그녀는 “국토해양부에서도 2025년이 되면, 인천공항 3단계 확장이 제대로 완료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전체 항공 물동량을 다 소화할 수 없다고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만성 적자로 계륵이 된 지방공항들도 건설할 때는 모두 미래 수요가 충분하다고 예상했을 터였다. 더구나 국토해양부는 2020년이 되면 전국을 거미줄 망처럼 촘촘히 연결하는 고속철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한다. 또 그 무렵이면 인구가 줄고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래저래 국내 항공수요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고속철로 1시간 안팎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조그만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항공편을 이용하겠는가. 국제화와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국제물동량이 늘어난다고 해도 10조원 넘게 투입한 신공항의 경제성을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그렇다면 박근혜 의원의 ‘동남권 신공항 재추진 의사’ 발언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나라당 정몽준 전 대표는 “속으로는 철저한 표 계산을 하면서 국민에 대한 신뢰로 포장하는 것은 위선이다. 신공항 문제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언급은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태도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치인이 국민을 표로만 보면 국정이 어지러워지며 원칙과 신뢰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더 큰 덕목은 정직과 책임”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은 “국가지도자라면 지역의 열망이 있더라도 국민 전체의 이익에 맞는 입장을 용기 있게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에둘러 말했지만 같은 얘기다.

    일리 있는 비판이다. 박 의원이 세종시 원안 고수(固守)로 충청표를 얻고, 동남권 신공항 계속 추진 의사로 영남표를 구하려 한다는 현실적 정치셈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국민과의 약속이란 상위 가치를 표 얻기란 하위 셈법으로 해석하는 것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박 의원은 이제 좀 더 긴 말로 설명해야 한다. 측근이 아닌 자신의 입으로 입장을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일방적으로 던지는 짧은 말의 효용성은 시효가 거의 다 됐다고 봐야한다. ‘미래권력 1순위’를 자임한다면 적어도 국가 미래와 연관된 사안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발언으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안으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이하 과학벨트) 문제가 있다. 당초 이 대통령이 충청권에 세울 것으로 공약했던 과학벨트가 충청과 영호남으로 3각 분산된다는 논란인데,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의 설명이 걸작이다. “벨트는 길지 않으냐, (기니까) 몇 군데 걸칠 수가 있는 것이다.”

    과학벨트가 흔들리게 된 것은 세종시 문제와 연관된 듯하다. 여권 핵심의 복안은 세종시가 행정도시에서 교육과학도시로 수정되면 그곳에 과학벨트를 건설할 계획이었는데, 세종시 수정안이 무산되면서 기본 얼개가 흐트러졌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월 과학벨트 입지 선정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했다. 그 후 여야 가릴 것 없이 국가예산 3조5000억원이 투입되는 과학벨트에 한 자락씩 걸치겠다며 나서면서 혼선이 빚어졌다. 최근에는 과학벨트의 핵심시설인 중이온가속기와 기초과학연구원은 한군데(충청)에 묶어두고 기초과학연구원 분원을 대구와 광주에 설치하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모양이다. 청와대 측은 이럴 경우 분산배치가 아닌 협업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벨트는 한곳에 집중해야 미래 성장동력으로 효과가 있을 것”이란 과학계의 견해에 비추어본다면 억지 춘향이의 기미가 짙다. 이렇다 보니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따른 ‘영남민심 달래기용 선물’이라느니, ‘형님(이상득 의원) 벨트’라느니 온갖 풍설로 시끄럽고, 충청은 충청대로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나라가 갈기갈기 찢긴 형국이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은 아직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발언하면서도, 충청의 과학벨트 공약 파기에는 침묵하고 있다. 한 달 후 최종결과가 나온 다음 코멘트한다면 만날 ‘뒷북 발언’만 하느냐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박근혜는 더 말해야 한다
    全津雨

    1949년 서울 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 초빙교수

    저서 :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현실적으로 여당의원이 모든 국정현안에 시비를 걸고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것이 옳으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현실 권력과 정면승부를 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으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이 또한 일리 있는 얘기다. 하지만 박 의원 스스로 자신이 ‘미래권력 1순위’임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차기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국정현안에 대해 그때그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국민이 자신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검증대 위에 올라서야 한다. 그것은 ‘국민 지지율 1위 정치인 박근혜’의 국민에 대한 도리이자 의무다.

    박근혜는 더 말해야 한다. 자신에게는 단문(短文)이 더 어울리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할지라도 때로는 장문(長文)으로 자신의 내공을 보여줘야 한다. 내공 없는 이미지의 정치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