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가요사에서 심수봉은 참으로 묘한 존재다.
- 그는 대중음악계를 지배한 기라성 같은 스타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가수왕, 경이적인 음반판매량, 오빠(언니)부대 같은 말들은 그와 별 인연이 없었다. 언제나 주류의 한복판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그러나 발표될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깊은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것이 바로 심수봉의 노래다.
은거(隱居)하는 듯하면서도 정상을 점령하는 심수봉의 이런 스타일은 가요계에 전무후무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MBC 라디오의 김정수 부장은 심수봉의 음악을 가리켜 “드러나지 않고도 우뚝 솟은, 단 한 번의 포상의례 없이 슬며시 20년간 우리 정서를 석권한 진정한 대중음악의 승리”라고 말한 바 있다.
심수봉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을 가리켜 “전성기가 없었던 가수”라고 잘라 말한다. ‘그때 그 사람’으로 이름을 얻자마자 6개월 후 10·26사건이 터졌고, 이후에도 제대로 활동 한번 못한 채 훌쩍 25년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다. 남과 다른 방식으로 인기를 얻은 비결을 물으니 “그저 노래를 발표했더니 널리 알려진 것뿐이었고, 그래서 건재한 것에 불과하다”고 답한다.
그는 전부가 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비롭다. 그 신비를 이룬 요체는 말할 것도 없이 독특한 음색과 맛깔스런 노래다.
심수봉을 대표하는 곡들은 대부분 본인이 직접 작사, 작곡했다. 전문 작사자, 작곡자가 만들어준 곡을 부르는 것이 상례인 트로트 음악계에서 자작(自作)의 재능을 발휘한 것은 매우 드문 케이스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에게는 ‘트로트 아티스트’라는 영예로운 수식이 붙었다. 남들은 도저히 흉내내기도 힘든 간드러진 묘미를 작품의 최대공약수로 삼았다는 음악적 특징과, 화려한 무대 앞이 아닌 가려진 뒤편에서 대중의 마음, 이른바 ‘밑바닥 정서’를 사로잡은 전략적 선택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드럼 연주자 심수봉?
감추어진 이미지의 가수답게 심수봉은 인터뷰 요청에 처음엔 “수 년째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는 말로 난색을 표했다.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지고 나서야 “그렇다면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며 자리에 응했다.
서울 강남의 모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심수봉은 여전히 수줍은 인상이었다. 아무리 음악을 하면 쉬 늙지 않는다지만 오십 줄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여려 보였다. 다소곳한 자세와 공손하고 낮은 톤의 어투는 물론 자그마한 체구도 데뷔 때와 다르지 않았다. 6개월 동안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며칠 전 귀국했다는 얼굴에는 다소 피곤함이 묻어있었지만, 묘하게도 심수봉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졌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최근 이문세가 발표한 음반이 화제로 떠올랐다. 이 음반의 타이틀곡 제목은 ‘내 사랑 심수봉’. 자신의 젊은 시절을 관통한 심수봉의 노래에 얽힌 감상과 추억을 풀어낸 가사에는 선배 가수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오지혜가 무드 있게 부른 ‘사랑밖에 난 몰라’가 다시 한번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내 사랑 심수봉’은 들어보셨죠? 아마 노래를 발표하기 전에 이문세씨 측에서 연락을 했을 것 같은데요. 기분이 어떻던가요?
“들어봤죠. 제목을 ‘내 사랑 심수봉’으로 하겠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그러려니 했어요. 그것도 노래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런데 세상에, 그걸 타이틀곡으로 쓸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저 앨범 뒤편에 양념 삼아 들어가는 곡일 거라 생각했죠. (웃으며) 부끄러워 죽겠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전 지금도 쇼핑하러 매장에 들어갔다가 내 노래가 나오면 면구스러워서 그냥 나와버리곤 해요. 성격이 그런 걸요. 후배 뜻은 잘 알지만 쑥스럽더군요.”
-미국엔 왜 다녀오신 건가요?
“아이 교육문제도 있었고, 제 음악공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힘들었지만 혼자 생활하느라 고생한 아이 아빠에게 더 미안했어요. 대신 열심히 공부해서 뜻 깊은 시간을 보내려 애썼지요. 라틴과 아프로-쿠반 계열의 리듬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이유가 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외국 음악인들이 우리 리듬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에도 약간 놀랐습니다. 과연 우리 사물놀이 리듬이 라틴 리듬을 능가할 수 있을까 등등의 생각에 골몰했습니다.”
사실 팬들의 입장에선 다소 당혹스런 대답이다. 유려하게 멜로디를 타고 넘어가는 ‘묘하게 노래 잘 하는 가수’로만 기억되는 것과는 달리, 심수봉은 열 다섯 살부터 노래와 함께 드럼을 쳐온 ‘음악가’다.
리듬에 대해 고민하는 연주자로서의 자세는 그의 노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음악이 독특한 컬러를 갖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음색과 멜로디 외에 드럼 연주에서 획득한 탁월한 리듬감각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콘서트 때마다 어김없이 드럼 연주를 선사해 관객을 놀라게 한다. 그는 “이번에 미국에 가서 보니 지금까지 제가 콘서트에서 했던 드럼 연주는 ‘구닥다리’였다”며 크게 웃어 보였다.
대중들이 기억하는 심수봉의 첫 번째 모습은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그때 그 사람’을 부르던 장면일 것이다. 포크와 록이 주름잡던 당시의 대학가요제에 트로트를 들고 나온 그를 두고 한편에선 신선하다고 했지만 느닷없다는 느낌을 받은 사람이 더 많았다. 당시 대학가의 음악 풍토를 감안했을 때 트로트 곡으로 본선 무대에 진출한 것 자체가 하나의 이변이었다.
1979년 12월 10·26사건 관련 군사재판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하고 있는 심수봉(왼쪽 모자쓴 이)
“아뇨,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 그 시절 오로지 트로트만이 가요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가요’라는 말은 ‘트로트’와 동의어였어요. 다른 장르는 다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트로트는 원래부터 있던 것이다, 그런 의미였죠. 당시 다른 출전자들도 절 이상하게 대하거나 특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에게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이미 오랫동안 노래를 해왔고 음반취입과정도 거쳤다는, 다른 친구들이 아마추어라면 나는 프로라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때 TV를 보셨다면 제 얼굴에서 그런 걸 느꼈을 텐데요(웃음).”
-대학가요제 전에 이미 음반작업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요. 한참 전인 1970년대 중반부터 명동에 있던 도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아르바이트로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물레방아 도는데’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나훈아씨가 손님으로 온 적이 있었어요. 제 노래를 귀담아 들은 나훈아씨가 레코드사에 ‘가수 할 사람 놔두고 뭐하냐?’며 절 음반사 사장들에게 소개해 주었지요. 피아노 한 대 값을 계약금으로 받았습니다. 나훈아씨와 듀엣으로 부른 ‘여자이니까’를 그 때 녹음한 거예요.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음반이 흐지부지돼버렸죠.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음반을 내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대학가요제에 나가기로 마음 먹었어요. 본선에만 가면 대학가요제 음반이 나오니까요. 그 음반에 낄 욕심으로 출전을 감행했던 겁니다. 비록 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나중에 지구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됐어요. ‘건질 것은 심수봉밖에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계약금으로 20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로는 꽤 큰 액수였어요.”
1979년 정식 음반을 낸 심수봉은 그해 6월 ‘그때 그 사람’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 그토록 고대했던 스타덤 행진에 들어선다. 그러나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그날 궁정동 회식에 참석했던 심수봉의 앞길 또한 흔들렸다. 수 차례에 걸친 보안사에서의 취조와 군사재판을 거치면서 막 점화된 가수활동은 이내 불길이 꺼져버렸다.
1981년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10·26사태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방송출연 금지조치라는 수난을 당했다. 1983년에 쓴 드라마 주제곡 ‘순자의 가을’은 하필 영부인과 이름이 같은 탓에 제목이 바뀌기도 했다. 한참 후에 방미가 다시 불러 히트한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가 바로 그 곡이다. 당시 한 남자 가수는 ‘순자야, 문 열어라’라는 제목의 곡을 내놓았다가 자취 없이 사라진 일도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10·26? 훌훌 털어버렸다”
심수봉에게는 당시 정치상황의 ‘피해자’, 혹은 ‘희생자’라는 이미지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10·26사건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했다지만, 막상 대놓고 물어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심수봉은 한치의 부담이나 괴로운 표정 없이 담담하게 웃으며 그때를 회상했다. 공연히 걱정한 필자가 오히려 겸연쩍을 정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은 궁정동에서 처음이었습니까? 노래에 대해서 뭔가 말을 건넸을 법도 한데 어떤 얘기를 들으셨나요?
“아닙니다. 세 번째였어요. 첫 번째는 한남동 고급 비밀요정에서였죠. 연주를 하게 된 한 클라리넷 주자가 ‘높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인데, 피아노 반주가 꼭 있어야 한다’고 사정사정하길래 따라갔어요. 거기서 우연히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보게 됐습니다. 두 번째는 국무총리 관저 증축 기념 연회였을 거예요. 저말고도 연예인 여러 명이 버스를 빌려 타고 갔지요. 박대통령이 저에게 직접 건넨 말은 ‘자네 노래를 들으니 눈물이 나더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상 외로 자상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짓궂은 질문입니다만 당시 궁정동 사건을 두고 세간에 퍼져 있던 소문을 혹시 알고 있습니까?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심수봉이 촌스럽고 못나서 회식 때 병풍 뒤에서 얼굴을 가린 채 노래만 했다’는 내용의 소문이 돌았다. 그게 사실이었는지 궁금해 이야기를 꺼냈더니 채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병풍 얘기요?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날 수 있는 건가요? (여유 있게 미소지으며) 그런 못된 루머를 만든 사람은 벌받아야 합니다. 어쨌든 그때야 정말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이야 뭐….”
10·26사건은 심수봉 본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에게 신비로운 이미지를 심어주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정치적 사건과 관련되면서 평범한 가수 이상의 중량감이 그에게 쌓인 것이다. 과연 그는 이 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당시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홀가분해 보입니다. 전혀 후유증이나 부담이 없는 듯한데, 지금은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몇 년 전 책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을 털어놓았더니 방송계 한 어른이 저더러 ‘그런 얘기를 다하면 신비감이 없어진다’면서 무게를 잃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지만 솔직히 빨리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 사건은 저를 짓누른 무시무시한 짐이었습니다. 훌훌 털어내기 위해서라도 여기저기 털어놓아야 했어요. 대중이 그 일 때문에 느끼는 신비감이 있다면 그 또한 벗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그 날에 대해 묘사한 글 가운데도 현장을 목격한 제가 볼 때는 잘못 알려진 게 많아 답답했어요. 가려지는 것도, 사람들이 곡해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제가 홀가분해 보인다면 그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겁니다.”
-역으로 그 사건이 다른 가수에게 찾아볼 수 없는 묘한 힘을 본인에게 주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바가 저를 더 부담스럽게 했습니다. 가수는 음악으로 평가받아야지, 누구에게 또는 어떤 사건에 기대어 이름을 높이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런 시각이 존재한다면 저로서는 억울합니다.”
그동안 심수봉이 발표한 앨범들.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1980, 1984, 1986, 2001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노래방에서 불러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곡을 쉽게 여기고 덤볐다가는 호흡을 쫓아가지 못해 허덕일 만큼 심수봉의 노래는 만만치 않다. 그가 호흡에서 그만큼 뛰어나다는 증거다. 자신의 음악은 어릴 때부터의 관심과 재능, 그리고 무대를 향한 끝없는 열정이 가져온 결과라고 그는 설명했다.
-심수봉씨 노래의 가사는 상상으로 꾸며낸 언어가 아니라 마치 실제로 경험한 것 같아서 대중들이 더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지어낼 수 없는 ‘체험의 가사’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노랫말이 본인의 연애나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까?
“저는 노래를 만들 때 감정을 꾸며내거나 상상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을 싫어합니다. 달리 말하면 그렇게 할 줄 모른다고도 할 수 있어요. 당연히 노래를 만들 때의 제 실제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도 그 무렵 저를 야박하게 버린 사람을 두고 만든 곡이에요. 사랑이란 감정도 모르던 시절이긴 했지만요.
다른 노래에도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삶이 녹아 있어요. 다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1994년에 발표한 곡 ‘비나리’의 경우 지금 남편과 결혼하기 전 짝사랑의 감정을 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를 잘 아는 친구나 친지들은 ‘노래를 들으면 네 근황을 알 수 있다’고 하더군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도 실제 경험담입니까?
“그 곡의 경우는 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간접 경험이라고 할까요. 당시 저와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외항선을 타고 떠나 이별을 하게 됐지요. 친구와 함께 인천 연안부두까지 배웅했는데, 배가 출항하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순간까지 친구가 차 안에서 줄곧 애처로이 울더라고요. 너무 절절하고 마음이 찡해서 그 느낌을 곡으로 옮겼습니다. 물론 가사를 쓰다 보니 남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게 표현되긴 했네요(웃음).”
-심수봉씨 노래에서는 남자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가사도 남녀관계가 주를 이루고 있고요. 때문에 평단 일각에서는 심수봉씨의 노래를 성적 암시가 강한 ‘섹스 음악’으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래요? 다소 외설적이란 얘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곡을 쓸 때 그런 의도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겠죠. 남자가 저의 중요한 화두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 음악에서 표현되는 남자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남자가 아니라 나를 감싸주고 내가 기댈 수 있는 보호자를 의미합니다.
전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채로 더러는 과부의 딸이라는 놀림까지 받으며 컸어요. 돌이켜보면 상당한 고통이었죠. 그래서 유일한 분출구인 음악을 통해 나를 보호해주는 큰 그늘로서의 남자, 아버지와 같은 남자를 찾아 나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아버지 품이 그리웠던 거겠죠. 실제로 남자를 만나기만 하면 먼저 ‘아버지 상’을 찾았습니다. 내 음악의 뿌리는 그런 어린 시절의 ‘지독한 외로움과 괴로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장 환경이 절 그렇게 만든 거예요.”
심수봉은 충남 서산에서 민속학 이론가로 명망을 얻은 아버지 심재덕씨와 어머니 장형복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60세였고 어수선한 통에 미처 호적에 이름도 올리지 못한 어머니는 26세였다. 게다가 세 살 때 부모가 헤어진 뒤 아버지는 바로 사망했다. 그러나 가야금 명인인 심상건씨(심수봉의 큰아버지)를 배출한 ‘민속학의 바하 집안’이라는 혈통은 그에게도 고스란히 남았다. 어릴 적부터 심수봉은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피아노를 사준 것도 ‘뭔가 가르치지 않으면 나중에 원망을 들을까봐서’였다는 것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음악은 걸핏하면 고뇌에 잠기기 일쑤였던 어린 심수봉에게 영혼의 울림이자 희망의 메신저였다. 그는 흡사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었던 피아노를 통해 고급스럽고 화려한 선율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좀더 커서는 업소에 나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재야의 가수’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가발을 쓰고 야간 업소와 비밀요정에 나가 노래와 피아노는 물론 드럼을 연주했던 것이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이때 이미 그 분야에서는 ‘음악수재 소녀가 나타났다’는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오직 노래하는 것이 좋았던 소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연주를 위해 비밀요정을 드나들었다. 하루 저녁만 일해도 일반 업소에 며칠을 나간 것보다 훨씬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 가난한 그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매력이었다. 이때의 비밀요정 출입이 훗날 그가 본의 아니게 정계 인사들과 연결되는 불행의 씨앗이 되기는 했지만.
-가수에게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음악적 스승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이나 가수를 꼽는다면….
“우선 피아노와 클래식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고요, 칸초네의 여왕 밀바나 한국 혈통을 지닌 일본 여가수 미조라 히바리의 음악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가수 중에선 나훈아씨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나훈아씨를 통해 가요를 부르는 법을 배웠다고 할까요. 노래를 해석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었지요.
노래의 맛을 내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나훈아씨는 사람이나 카메라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잘 아는 분입니다. 가수의 롱런 여부는 ‘TV 카메라 앞에 섰을 때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걸 나훈아씨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배 가수들에게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네요.”
-심수봉씨는 음악 작업에 있어서 매우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힘들어한다는 거죠.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얘기를 듣긴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까다롭지 않습니다. 감히 얘기하자면 까다롭다고 하는 것은 제 음악을 받쳐주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말일 겁니다. 예를 들어 제 노래 ‘그때 그 사람’은 올림 다단조예요. 반음이 많으니 연주하기는 조금 성가시죠. 방송출연을 하면 악단이 더러 그냥 다단조로 연주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밖엔 난 몰라’도 내림 마단조인데 마단조로 연주하는 적이 많았고요.
반음 올리고 내리는 게 뭐 별거냐고 할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되면 노래의 느낌은 죽는 겁니다. 한번은 방송 PD에게 단단히 약속을 받아냈는데도 불구하고 악단이 또 그렇게 연주하는 거예요. 노래를 안하고 그냥 와버렸죠. 당연히 연주자들은 버릇이 없다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흥분했지요. 그렇지만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지 않은 걸 미안해해야지 까다롭다고 험담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걸 두고 뭐라고 한다면 그냥 제 식대로 하겠습니다.”
-1997년 발표해 호응을 얻었던 곡 ‘백만 송이 장미’는 임주리씨가 먼저 불러 발표한 곡이지요. 그래서 심수봉씨가 뒤에 같은 노래를 내놓은 것을 두고 ‘곡을 빼앗은 것 아니냐’는 뒷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아시다시피 ‘백만 송이 장미’는 러시아 곡이죠. 일본에서도 크게 히트했던 노래입니다. 전 임주리씨가 노래를 내놓기 훨씬 전에, 제 곡으로 따지면 나오기 2년 전부터 원곡을 듣고 ‘저 노래를 한번 불러봐야지’ 하고 준비해왔어요. 러시아까지 가서 직접 작사자도 만났고요. 임주리씨가 먼저 곡을 내놓았으니 김이 빠진 게 사실이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취입을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쓴 가사가 너무 맘에 들어서 포기하기가 아깝더라고요. 임주리씨가 노래를 접고 난 뒤 녹음을 했지요. 절대 빼앗은 게 아닙니다.”
1979년 ‘그때 그 사람’과 ‘여자이니까’로 떠오른 심수봉은 1981년부터 2년 남짓한 공백의 위기를 거뜬히 극복하고 1984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필두로 숨가쁜 히트 행진에 돌입한다.
이후 그는 1985년 ‘무궁화’, 1986년 ‘사랑밖엔 난 몰라’, 1987년 ‘미워요’ 등 매년 한 곡씩 굵직한 애창곡을 내놓으면서 음악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90년대 노래방이 등장하면서 그의 노래들은 전국민 애창가요가 됐다. 이후에도 1991년 ‘우리는 타인’, 1994년 ‘비나리’ 그리고 1997년 ‘백만 송이 장미’ 등으로 히트곡은 이어졌다.
내가 감동해야 관객도 감동
-발표한 앨범이 열 장이 채 안 됩니다. 이름을 얻은 곡들은 대부분 자작곡이지만, 따지고 보면 직접 쓴 노래는 스무 곡 정도에 불과하고요. 희소성의 미학입니까? 왜 그렇게 작품 발표에 인색한가요?
“저는 결코 다작(多作) 스타일은 못 됩니다. 한 번도 계산에 따라 곡을 만들거나 발표한 적이 없어요. 단지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하는 것뿐이죠. 앨범을 내기 위해 곡을 쓴 적도 없습니다. 음악적 표현 욕구가 저절로 무르익어 터질 때 자연스럽게 음반 작업에 들어갑니다.
작품을 뚝딱뚝딱 내놓기 어려웠던 것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서투른 제 성격 때문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작품이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직접 작곡한 곡들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한 음반에서도 중요한 몇 곡에 집중한 탓일 겁니다. 예전에는 음반 뒤에 깔리는 곡들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본인의 음악이 은근하고 끈질기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으로는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면서도 약간은 거리를 두는, 한마디로 대중 감성의 저점(低點)을 자극하는 스타일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요.
“사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솔직히 아직 그것을 다 끌어내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음악적으로도 도달하지 못한 부분이 있고요. 그렇지만 기본적인 접근방식은 분명합니다.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들도 아프다는 거지요. 내 기분이 좋으면 듣는 사람도 기분 좋고, 내 스스로 감동하면 관객들도 같이 감동한다는 거지요. 만들고 부르는 사람이 갈구하고 흐느끼고 소망하는 것을 대중들도 함께 느끼기 때문에 제 음악이 어필하는 것 같습니다.”
-‘비나리’ 이후에는 음악의 기조가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트로트에서 스탠더드나 재즈풍으로 약간 전환한 듯 하고요. 가정생활이 안정돼서 그런가요?
“(크게 웃으며) 가정생활은 여전히 험난하지요. 남편이 보호자 노릇을 든든히 잘해주고 있습니다.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성경공부도 저를 키워주고 있고요. 말씀하신 대로 ‘비나리’ 이후 제 정서의 기조도 변했습니다. 변해야만 하지요. 과거를 부정하거나 한스러워하는 비관에서 지금은 긍정적인 낙관 혹은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저는 ‘자기성숙’의 과정에 있어요.”
팬들이 있어 살 수 있었다
심수봉이 데뷔한 지 어느덧 4반세기다. 만년소녀의 외양을 간직하고 있지만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가요계의 까마득한 대선배다. 요즘 브라운관을 주름잡는 젊은 가수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TV에 자주 나가야겠다 싶은 마음”이라는 짤막한 말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본인의 영향을 받은 가수를 꼽아달라는 질문에는 “그런 후배는 없다고 본다”고도 말했다.
심수봉 음악은 대중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그는 ‘위로’라는 한마디로 축약했다. 이후의 설명은 오래 준비한 듯 논리 정연했다. 어쩌면 그가 인터뷰에 응한 것도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대중에게 위로를 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대중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노래를 통해 때로 제 상처를 더 깊게 표현해 밖으로 드러냈고, 결과적으로는 그를 통해 상처를 치유해왔습니다. 대중들은 ‘저 사람은 위로가 필요하구나’ 하는 마음으로 절 좋아해준 겁니다. 그렇게 절 위로해준 거죠.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슬픔을 공유받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전 큰 빚을 진 겁니다. 그래서 심수봉이라는 사람은 대중가요를 떠나 살 수도 없고 떠나지도 않을 겁니다. 비록 설 무대가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내 음악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 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신곡이든 예전 노래를 새로 편곡해서든 노래도 많이 부를 거고 음반도 자주 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음악으로 인생을 다 한대도 제가 대중에게 진 빚을 모두 갚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