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엘리베이터 맹신

  • 입력2004-05-03 1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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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베이터 맹신
    “어어, 누르지 마셔요.” 한 젊은 여성이 엘리베이터 안의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철 4호선 이수역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닫힘 버튼을 누르면 또 3분을 기다려야하거든요.” 목소리의 주인공이 덧붙였다. 비슷한 일이 지하철 7호선 살피제역에서도 있었다. 필리핀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말렸다. 갑자기 쏟아진 제동과 간섭에 그 여인은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이런 광경을 접하고 나는 ‘한국 사람들은 참 용감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 너무 쉽게 남 일에 간섭하는 것 같다. 엘리베이터의 제어장치는 누를 때마다 3분을 기다리게 되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잘못된 ‘들은 풍월’로 남에게 제동을 걸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 사람들은 참으로 쉽게 남을 가르치려 든다. ‘마땅히 그렇지 않느냐?’며 자신의 생각을 단호하게 강요한다. 이것은 대단한 신념이다. 신념에서 발로한 이러한 행동은 상대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을 탓하기도 어렵다.

    사람들은 ‘참을성 없이 버튼을 눌러 전기를 낭비하지 말라’고들 하지만 사실 닫힘 버튼을 누른다고 해서전기가 낭비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닫힘 버튼을 누르면 엘리베이터 제어부가 상황판단을 위한 단계(점검 및 확인 과정)를 건너뛰게 되기 때문에 시간이 단축되고, 결과적으로는 전기가 절약된다.

    출발준비가 다 돼 있는 데도 닫힘 버튼을 안 누르고 있으면 제어부의 논리회로는 발생할 수 있는 이상(異常)의 가능성을 확인하느라 여러 경우를 모두 더듬게 된다. 기계는 절망적으로 이런 경우인가 저런 경우인가 암중모색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제 문을 닫아도 된다’고 알려주는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은 참 기이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런데도 이공계 대학의 구내 엘리베이터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버튼 하나가 소비하는 극미량의 전기를 아낀다며 오히려 무수히 많은 논리회로에 전기를 낭비하고 있다. 게다가 ‘참을성 결여’를 비난하는, 따라서 인성(人性)까지 시비하는 분위기가 종종 벌어진다는 것은 더군다나 이상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처분만 기다려라’는 분위기는 억압적 통치자들에게 편리한 사회 환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처분만 기다리는’ 사회 분위기는 지하철 객차 유리창 하나 깨지 않은 채 많은 선남선녀가 죽어간 대구 지하철참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계에 대해서까지 ‘기다림’의 미덕을 가지라는 압력은 실생활 속에서 제법 많이 관찰할 수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려는 층을 누른 다음 닫힘 버튼을 눌렀더니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아낙네들이 나 때문에 늦게 출발하게 됐다며 투덜거리는 것이다. 나는 아낙네들의 반대를 무릅 쓰고 미소를 띤 채 버튼을 계속 눌렀다. 그녀들의 불만과 달리 엘리베이터는 제 시간에 작동했고, 나는 ‘닫힘 버튼을 눌러도 3분이나 더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증명해냈다. 그러나 “저는 엘리베이터 설계에 관여했던 사람입니다”라고 설명해줬음에도 그녀들이 가진 엘리베이터 맹신(盲信), 즉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러선 안 된다’는 생각은 여전한 것 같아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의 앞뒤를 맞춰보아 판단을 내리고 정확한 지식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웃으로부터 들은 얘기에 맹종하면서 ‘소수를 찍어누르는 경향’이 뚜렷하다. 옳은 지식인지 틀린 지식인지 모르면서 살고 있는 셈이니 지난 여러 시대에도 억울한 이유로 사람을 희생시킨 일도 많았을 것이다.

    비슷한 맹신은 세계사에도 있었다. 근대화 이후 서구사회가 전세계에 퍼뜨리고 있는 통념과 달리 아랍, 페르시아, 그리고 우리 동이권(東夷圈)의 문명은 ‘강한 문명’이었다. 그럼에도 무책임한 다수, 즉 서방세계가 우리 동양의 강한 문명에 갖은 악인상을 씌워온 것이다. 그뿐인가. 지난 200년 동안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해왔지만 ‘패자는 나쁜 것, 후진 것’으로 보려는 이들의 맹신은 끝내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였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확인하지 않고 무조건 확실하다고만 생각하면 여러 사람에게 누(累)를 끼치게 된다. 그러니 특히 지성인이라면 남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지식체계와 확신을 구축해야 한다. 공학도들도 그렇게 해야 여러 난관을 뚫고 나라와 사회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본디 정신력과 체력이 강한 민족이다. 그런데 작금에 이르러선 의지박약한 생활에 방치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상업자본은 소비자의 심리조작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그에 따르는 폐단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매스컴은 인기만 뒤쫓을 뿐 젊은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건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려 했는데, 요새는 오히려 정권이 나서서 ‘자유’의 이름으로 ‘방만’을 유도하고 있는 듯하다.

    서구에서 민주주의는 평범한 시민들이 힘을 합쳐 못된 귀족에 대항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결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힘을 합쳤다. 그런 그들에게 몇 세대에 걸쳐 한 정당에게만 지지를 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에게는 성군이 모든 일을 해결해줄 것이며, 신성한 통치이념을 위해서라면 혼자서라도 싸울 수 있다는 정신이 흐른다. 혼자서라도 악의 뿌리를 단칼에 쳐내고 사태를 원상 복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과 서는 다른 것이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는 유연성 있게 흥정할 줄 알고, 매스컴의 선동에 속지 않으며, 그리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그 기반으로 삼는다. 때문에 그러한 기반이 없는 사회에서 무조건 투표 결과를 따른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이룩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기반이 아직 약한 우리에게 동양적인 공동체 질서체계, 즉 도덕과 율법은 버리기 아깝다. 예로부터 내려온 율법이 우리의 사회질서를 유지시켜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내면에 깊숙하게 깔려 있는, 마음을 가다듬으면 훤히 보이는 옛 질서체계를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천천히 서구 기법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 이상의 빠른 속도를 내는 세계화는 일부 사람들의 이해관계에서 나온 위험한 선전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실을 잘 모르는 채 용감하게 이웃을 견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사실을 판단할 정확한 자료를 공급하는 것이 지성이 할 일이다. 물론 여러 주장을 소개할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하는 민주주의적 풍토도 필요하다.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고 주워들은 바를 그대로 되파는 일은 참으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느 정당에도, 어느 상술에도, 어느 심리조작에도 속지 않는 자신을 기르면서 동시에 예의와 충효 등 우리의 아름다운 재래 가치에 대해 자신감을 되찾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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