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실험을 한 지난 10월9일 전까지 한국 사회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로 시끄러웠다. 노무현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은 중요한 국가 주권이고 우리가 한반도를 문제를 주도하려면, 이를 유엔군(미군)에게 맡겨 놓을 수 없다”며 적극적으로 환수를 추진, 10월2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장관회의(SCM)에서 거의 모든 문제를 타결지었다.
그런데 합의 직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앞장섰던 장관들이 줄 사표를 냈다. 최전선에서 환수 작업을 펼친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사의를 표하자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이종석 통일부 장관도 사퇴를 표명했다. 노 대통령의 선거 공약사항이고 노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가 마무리됐는데 왜 두 장관은 사퇴한 것일까.
안보장관들이 ‘줄 사표’ 낸 이유
그 이유의 한 자락은 북한 핵실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북한 침공 가능성을 막기 위해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 줬으면 응당 북한도 부드럽게 나와 줘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100% 다른 방향인 ‘배신(背信)’으로 가버렸다. 그렇더라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가 북한 핵실험으로 초래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멋진 카드라면 두 장관은 사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이 위기를 돌파할 묘안도 되지 못한다.
노정부는 ‘주권(主權)’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가치로 모셨다. 그러나 주권은 군사부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외국의 식민 통치를 받지 않고 우리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주권이다. 이러한 주권 가운데 하나가 원자력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핵 주권’이다. 북한이 자력으로 핵개발을 한 것은 핵 주권을 제대로 행사한 경우에 해당한다.
주권을 중시하는 노 정부라면 “우리도 핵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들리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지켜야 한다’는 것뿐이다. 5개 항으로 구성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 선언의 제1항은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바로 이를 어긴 것이다.
제2항은 ‘남과 북은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이고, 3항은 ‘남과 북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이다. 북한은 이 두 조항도 어겼다. 제4항과 5항은 ‘남북은 한 달 후 핵통제 공동위를 만들어 상호 사찰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선언 얼마 후 1차 북핵위기가 본격화했기에 핵통제 공동위는 제대로 가동돼 보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비핵화 선언은 휴지가 된 것이다.
1994년 6월13일, 북한은 IAEA(국제원자력기구)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1차 북핵 위기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대통령이던 김영삼씨는 비핵화공동선언이 파기됐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2002년 10월3일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하자 북한 외교부의 강석주 부부장은 “농축 우라늄 계획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때의 대통령이던 김대중씨는 “비핵화공동선언을 지켜라”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2005년 2월10일 북한이 핵 보유 선언을 하고 2006년 10월9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도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의 공통점
왜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비핵화선언은 파기됐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미 배신해서 떠난 사람을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절개(節槪)의 의지’인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그러고 있는 ‘무능(無能)의 안주’인가?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1994년 10월21일 합의한 ‘제네바합의문’에는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준수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2002년 10월 북한이 농축 우라늄을 만들고 있다고 하자 미국은 제네바 합의는 파기됐다고 밝히고 ‘플랜 B’로 들어갔다. 북한의 위조달러 제조 문제를 거론하고 방코 델타 아시아(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는 등 실질적인 제재를 가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주장한 정권이라면 핵 주권 환수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핵 주권은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제약당하고 있다. 첫째가 1956년 2월3일 체결한 한미원자력협정에 의한 제약이다. 핵 주권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던 이승만 대통령은 재처리와 농축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이 열어준 길 덕분에 한국은 지금 세계 6위의 원자력 발전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평화목적의 농축과 재처리를 못하고 있다. 한미협정을 개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유치원생 때 입었던 교복을 장년이 된 지금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제약은 1970년 발효된 NPT(핵확산 금지조약)이다. 박정희 정부는 ‘대담하게도’ NPT에 가입하지 않고 고리 원전 1호기 공사를 시작했었다(1971년 3월). 그리고 1974년 캐나다로부터 중수로를 도입하려 했는데, 인도가 중수로를 이용해 핵무기를 만드는 바람에 급제동이 걸렸다. 박정희 정부는 NPT에 가입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풀고 중수로는 물론이고 중수로 설계 기술까지 몽땅 도입했다.
NPT는 유엔 안보리 이사국인 5개 나라에만 핵무기 보유를 인정한다. 이 조약에 가입한 이상 한국은 핵무기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NPT는 새로운 핵연료를 만들기 위한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와 핵연료를 만드는 평화목적의 농축은 허락한다. 그러나 한미원자력협정이 이를 금지하고 있어 한국은 재처리와 농축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에 총력을
세 번째 장애가 1991년 12월 합의된 남북 비핵화공동선언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북한이 핵실험을 함으로써 파기돼 버렸다. 한국으로서는 미국과 맺은 원자력협정만 개정하면 ‘평화적인 목적’의 재처리와 농축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 하여금 북핵 문제를 풀게 하려면 그들을 압박해야 한다. 그러한 압박의 한 방법이 비핵화 선언은 파기됐다고 밝히고 미국과 원자력협정 개정을 논의하자고 요구하는 것이다. 매우 어려운 것 같지만 일본은 이미 이 일을 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戰犯)국가이자 유일한 피폭국가인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끈질긴 협상을 벌인 끝에 1968년 플루토늄 보유를 인정받고, 1988년에는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을 인정받는 쪽으로 미일 원자력 협정을 개정해냈다. 북한은 국제적인 룰을 어기며 핵 주권을 확보해갔지만 일본은 어기지 않고 핵 주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북핵 위기를 해결하고 한국의 핵 주권을 갖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신동아’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이다. 지난 50여 년간 일본이 핵 주권을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고 싶다면 전진호 교수의 글을 정독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속내가 궁금하다면 전성훈·신성택 박사의 글을 꼭 읽어봐야 할 것이다.
0.2g의 우라늄 농축 사실이 공개될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이던 장인순 박사가 쓴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함’은 핵주권을 갖기 위해 이 땅의 과학자들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짐작케 해준다. 핵무기의 세계가 궁금한 독자는 신성택 박사와 황주호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좋겠다.
송명재 박사, 김종순 박사가 쓴 원전 사고와 방사선 사고의 진실도 눈여겨 볼 내용이다. 한필수 박사가 쓴 방사선 이야기는 ‘원자력이 이러한 혜택도 주는가’하는 신비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방폐장 유치 이후의 경주 분위기를 정리한 은윤수씨의 글과 부안사태를 온몸으로 맞았던 김종규 전 부안군수의 글은 가슴을 착잡하고 뭉클하게 한다. ‘한국도 평화목적의 농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양창국 전 한전원료 사장의 글은 원자력인의 진심을 대변하고 있다.
주권 확보를 미덕으로 생각하는 노무현 정부라면 핵 주권 확보에도 노력해야 한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북핵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핵 주권 확보는 북핵 문제의 해결과 함께 통일이라는 선물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역사적인 명패’를 던질 것인가
북핵의 진실은 ‘실패’이다. 북한은 대포동2호 미사일 발사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 개발에도 실패했다(신성택 박사 글 참고). 핵은 그 존재를 공개하지 않는 NCND 정책을 택할 때 그 위력이 배가된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버리고 핵실험을 함으로써 조악한 그들의 실력을 만천하에 노출시켰다. 김정일의 만용에 대한 우리 대응이 핵 주권의 확보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이어 핵 주권을 갖기 위해 노력한 지도자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1989년 12월31일 국회는 마지막으로 5공비리청문회와 광주청문회를 열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세웠다. 이때 만 43세이던 노무현 국회의원이 전 전 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지며 “허위 증언을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거대 권력에 정면 승부를 한 것이다.
이제 60세에 이른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과의 대결에서도 이러한 기백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반도 비핵지대화는 김일성의 유훈이라 여전히 유효하다”는 식언(食言)을 반복하고 있는 김정일에게 ‘역사적인 명패’를 던지는 용기를 보이지 못한다면, 그는 전 전 대통령에게만 명패를 던진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다. 노대통령은 역사 앞에 정면승부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