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호

일본의 원자력 정책

세계 유일의 피폭 국가→핵무기 갖지 않고도 플루토늄 보유한 세계 유일의 국가

  • 전진호 광운대 교수·일본학 jeon@kw.ac.kr

    입력2006-12-14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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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폭(被爆) 국가인 일본은 미국의 점령에서 벗어나자마자 원자력 계획을 세웠다. 한국은 비전문가로 구성된 시민단체들이 원자력 정책에 깊이 개입하고 있으나, 일본은 원자력 전문가그룹이 원자력 정책을 이끄는 안정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 일로매진해 일본은 핵주기를 완성했다.
    일본의 원자력 정책
    일본은 미국, 프랑스에 이은 세계 제3위의 원자력발전 대국이다. 2006년 현재 54기(基)의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고 있으며, 전체 발전의 약 30%, 1차에너지 공급량의 약 12%를 원자력이 담당하고 있다. 원자로 제작 기술이나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원자력 수출 등 원자력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함께 최선진국의 지위를 굳혀가고 있다.

    일본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서 얻은 플루토늄을 원자력 발전의 연료로 다시 사용하는 ‘핵연료 리사이클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또 독자적인 재처리 기술을 개발하고 고속증식로를 이용하는 계획을 오랫동안 추진해왔다.

    일본이 추진하는 고속증식로(FBR·Fast Breeder Reactor)는 사용후핵연료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을 원자력발전의 연료로 사용해, 사용한 연료보다 더 많은 연료를 생산하는 원자로이다. 원자력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 몇 나라는 안전성과 경제성 등을 이유로 고속증식로 개발과 재처리에 의한 플루토늄 이용 정책을 폐기하거나 유보하고 있으나, 유독 일본만이 고속증식로 이용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피폭(被爆) 국가인 일본이 세계 제3위의 원자력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걸린 시간은 50년밖에 되지 않는다. 50년 사이 어떠한 발전 과정을 겪었기에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신뢰받는 원자력 대국이 될 수 있었는가? 원자력발전의 급속한 성장과 더불어 안전성까지 확보한 일본의 원자력 정책과 원자력 산업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미일 협력으로 재처리공장 지은 일본



    2006년 3월,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로카쇼무라(六ヶ所村)에 위치한 재처리시설이 가동에 들어갔다. 재처리시설은 사용후핵연료에서 재사용이 가능한 우라늄-235와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시설인데, 핵무기 보유국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일본이 이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핵 비확산 노력이 펼쳐졌는데 일본은 어떻게 재처리시설을 갖게 되었는가.

    그 답을 찾으려면 원자력을 둘러싼 미일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제사회를 향해 원자력 발전을 권유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비롯해 운용에 필수적인 기술과 원료인 우라늄, 원자로 등의 자재를 제공했다. 1977년 가동에 들어간 도카이무라(東海村)의 재처리시설과 올해 시험 가동에 들어간 로카쇼무라의 재처리시설은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으로 실현된 것이다.

    나카소네의 소신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미국과 영국, 독일에서는 핵분열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다. 1939년 ‘네이처(Nature)’ 등 과학잡지에 핵분열에 대한 논문이 여러 편 게재되면서 일본에서도 육군의 요청을 받은 ‘이화학(理化學)연구소’가 원자핵실험실을 운영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이뤄진 이 연구는 이론 계산과 기초실험 단계에 그쳐,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1940년대 일본에서는 부분적으로 우라늄 농축실험이 행해졌지만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1945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미군)은 일본의 원자력 연구를 전면 금지했다.

    1952년 미 군정이 끝나고 독립을 회복한 일본은 1954년부터 원자력 개발과 관련한 예산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정계와 전력업계에서는 피폭의 경험으로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하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훗날 총리가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등 보수 3당의 몇몇 의원은 예산 수정안에 원자력 관련 예산을 추가함으로써 전후 처음으로 일본 정부 예산에 원자력 부문이 들어가게 하였다.

    일본의 원자력 정책

    초년 정치인 시절 일본 원자력계 부활에 적극적으로 나선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

    나카소네 의원은 1950년대 말 원자력 연구와 개발을 담당하는 과학기술청(이하 과기청) 장관에 올라 일본 원자력 발전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일본에서는 ‘원자력의 대부’로 불린다. 1954년 당시 나카소네 의원 등이 삽입한 원자력 관련 예산은 원자로 예산(원자로 관련 연구보조금) 2억3500만 엔, 우라늄 자원 조사비 2500만엔, 원자력 관계 도서 구입비 1000만엔 등 도합 2억 7000만엔이었다. 이 중 원자로 예산 2억 3500만엔은 핵분열 물질인 우라늄-235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음 해(1955년)에 일본 의회는 원자력 연구개발 및 이용에 관한 기본원칙을 정한 ‘원자력 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원자력 기본법은 ‘원자력의 연구개발과 이용을 평화적인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였고, ‘민주·자주·공개’라는 ‘원자력 평화이용 3원칙’을 기본방침으로 명시했다.

    1956년 일본은 국가의 원자력 정책을 결정하는 중추기관으로 ‘원자력위원회’를 설치하고, 총리부(지금의 내각부) 안에 원자력 개발을 담당하는 행정기구로 ‘원자력국’을 설치했다. 원자력 예산을 만든 후 ‘원자력 기본법’과 ‘원자력위원회 설치법’ 그리고 ‘원자력국 설치에 관한 법률’이라는 원자력 3법을 만들어 원자력 개발 체제의 골격을 완성했다.

    그 후 총리부 산하의 원자력국이 과기청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과기청 설치안은 과기청을 원자력을 포함한 과학기술 관련 산업의 연구개발을 총괄하는 ‘성(省)’급 기관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기청으로 업무를 이관하게 된 통상산업성(이하 통산성)과 문부성이 영역 다툼을 벌여, 일본의 원자력 산업은 과기청, 통산성, 문부성이 모두 관여하는 구조가 되었다.

    그 결과 과기청은 권한과 규모가 작은 ‘청(廳)’으로 발족되었다. 과기청은 원자력의 연구개발과 우주개발정책 추진을 전담하고, 통산성은 원자력 산업계에 관련된 업무를, 문부성은 대학에서 추진되는 원자력을 포함한 기타 연구의 개발과 진흥을 담당하게 되었다.

    원자력산업이라는 거대 조직은 통산성이 관할하고, 대학의 원자력 연구는 문부성이, 대학 이외의 연구기관이 하는 원자력 연구와 우주 개발은 과기청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1년 중앙정부 조직개편을 통해 문부성과 과기청을 ‘문부과학성’으로 통합해 45년 만에 원자력 연구 개발업무가 통합되었다.

    과기청과 통산성의 대립 구도

    일본 원자력계는 정부기관 사이의 이해 충돌뿐만 아니라 전력업계와 통산성의 이해도 충돌하는 것이 특징이다. 원자로 도입이 결정되면, 누가 원자로를 도입하는 주체가 될 것인지를 놓고 전력업계와 과기청이 한 편이 되고 통산성이 다른 편이 돼 대립한다.

    전력업계와 과기청은 “원자력 발전은 머지않은 장래에 경제성을 획득할 것이므로 민간이 창의력을 갖고 운영력을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민간 체제가 원자력발전을 담당해야 한다”며 민영론(民營論)을 주장했다. 반면 통산성은 “원자력발전처럼 중요한 기술은 기술 자립을 할 때까진 채산성을 확보할 수 없어 민간이 담당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국가 자금으로 추진해 경제성과 안전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국영론(國營論)을 내놓았다.

    민영론과 국영론의 대립은 일본 원자력산업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 문제는 곧 정치문제로 비화했는데, 여당인 자민당의 조정을 받아들인 내각에서 민간이 8할, 정부가 2할을 출자하는 관민 공동의 ‘일본 원자력발전 주식회사’를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러한 갈등과 균점이 일본 원자력계의 특징적 요소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통산성과 과기청, 민간(전력업계) 3자의 경쟁과 갈등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3자는 원자력발전이라는 거대한 이익을 지키기 위해 협력과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세 기관은 원자력에 관한 국가정책의 결정권을 독점하는 ‘2원체제적 이익연합’을 형성한 것이다.

    ‘2원체제적 이익연합’이란 과기청과 통산성이 원자력 정책에 관한 결정권을 독점함으로써, 원자력 공동체 외부에선 원자력 문제에 개입할 수 없게 한 구조를 말한다. 원자력 공동체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총리 등 상위 기관이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타협으로 해결한다.

    그로 인해 일본의 원자력 정책은 두 기관의 협의에 의해 결정되는 ‘내부자 거래’ 성격을 띤다. 따라서 일본의 원자력계는 일치단결해 원자력 공동체 외부의 공격에 대응하는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체제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956년 재처리 계획 확정

    1956년 원자력 개발과 이용에 관한 정책을 기획·심의·결정하는 기관으로 발족한 원자력위원회는 원자력 행정의 기본정책인 ‘원자력 개발이용 장기기본계획(장기계획)’을 수립했다. 장기계획에는 고속증식로의 개발과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플루토늄 연료의 이용이라는 핵연료사이클 정책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유일한 피폭 국가인 일본이 원자력 개발 초기 단계에서 이미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서 얻은 플루토늄을 준(準)국산 연료로 이용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1971년 일본은 고속증식로 실험로인 ‘조요(常陽)’를 건설하고, 1994년에는 상업용 고속증식로인 ‘몬주(文殊·석가여래의 왼쪽에 있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에서 유래)’가 임계(臨界)에 도달했다(임계는 연속적으로 핵분열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원자로가 임계 상태를 유지해야 발전할 수 있다).

    몬주가 임계에 도달함으로써 일본은 플루토늄을 연료로 하는 발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핵연료사이클은 플루토늄을 이용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전세계가 안전성과 경제성 등을 이유로 핵연료사이클 계획을 중단하는 사이 일본은 ‘꿈의 원자로’라고 불리는 고속증식로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일관성이 일본의 힘이라 할 것이다.

    카터 행정부 시절 미국은 엄격한 핵 비확산 정책을 택해 재처리 금지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흔들리지 않고 재처리시설 공사를 계속했다. 1977년 실험시설 성격인 도카이무라의 재처리시설을 가동하고, 올해는 본격적인 재처리시설인 로카쇼무라 시설이 시험가동에 들어갔다. 일본의 10개 전력회사가 공동 출자해서 만든 로카쇼무라의 재처리시설은 연간 800t의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다.

    1968년부터 플루토늄 도입 가능

    미국의 지원과 협력은 일본의 원자력 발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미국으로서는 일본 내부를 안정시키고 서방세계의 정치·경제적인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일본은 미국 원자력 산업계의 거대한 시장이었다.

    미일 원자력 협력은 1953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원자력 평화이용 제안’에 따라 시작되었다. 일본은 1955년 미국으로부터 연구용 원자로를 공급받기 위해 ‘미일 원자력 연구협정’(이하 연구협정)에 조인했다.

    이 협정은 미국이 일본에 연구용 원자로를 제공하고, 20% 농축 우라늄 30kg(핵분열을 일으키는 우라늄-235는 6kg)을 5년간 대여하며, 미국은 관련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사용후핵연료는 일본에서 재처리하지 않고 미국에 반납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1958년엔 발전용 원자로를 도입하기 위해 미일 원자력 일반협정을 조인했다. 이 협정으로 일본은 우라늄-235를 2.7t까지 미국에서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64년 미국에서 우라늄 농축사업이 민영화함에 따라 새로운 원자력협정 체결이 요구돼, 1968년 새로운 미일 원자력 협력협정이 조인되었다. 신협정에 따라 일본은 미국에서, 발전 목적으로 연간 161t의 농축 우라늄과 연구 목적으로 플루토늄 365kg을 공급받게 되었다. 이후 규모가 커진 일본 원자력계는 농축 우라늄 수입량을 확대하기 위해 1973년 이 협정을 개정했다. 개정된 협정에 따르면 일본은 연간 335t의 농축 우라늄을 미국에서 수입할 수 있고, 플루토늄 공급량의 상한선은 삭제되었다. 플루토늄의 일본 밖 이전 금지도 해제되었다. 일본은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한 국가에 대해서는 플루토늄을 수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게 했다.

    사용후핵연료를 영국과 프랑스로 보내 재처리한다는 일본의 정책은 1977년 발표된 카터 행정부의 핵 비확산 정책과 1978년 제정된 미국의 핵 비확산법(NNPA)과 충돌하게 되었다. 양국의 갈등은 미국이 ‘상업용 재처리도 반대한다’는 방침에서 후퇴해 ‘사용후핵연료의 보관 장소가 부족하고, 이를 처분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에 한해 이전을 승인한다’고 함으로써 풀렸다.

    1977년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에 위탁 처리해오던 사용후핵연료를 일본에서 처리하기 위해 이바라키(茨城)현 도카이무라에 재처리시설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 시설에서 재처리할 사용후핵연료는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미국의 사전 동의가 필요했다. 도카이무라의 재처리시설은 프랑스의 설계와 기술로 건설됐는데, 이 시설을 지으라고 권유한 것은 미국이었다.

    그런데 카터 행정부가 출범한 후 미국 스스로 발전(發電) 목적의 재처리를 중단한 까닭에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사전 동의를 얻기 힘들어졌다. 일본은 외교력을 동원했다. 1977년 미국과 세 차례 교섭하고 도카이무라 재처리시설에 대한 미국측의 현장조사를 허가했다. 이 접촉에서 문제가 된 것은 도카이무라 재처리시설의 플루토늄 추출 방식이었다.

    영국 프랑스에 재처리 맡겨

    도카이무라 재처리시설은 플루토늄을 단체(單體)로 추출하는 방식으로 설계됐으므로, 일본은 이 방식으로 재처리시설이 가동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은 ‘플루토늄을 단체로 추출하면, 효과적인 핵물질 방호가 어렵다’며 플루토늄을 우라늄과 혼합한 상태로 추출하는 혼합추출을 요구했다. ‘단체추출’ 대 ‘혼합추출’의 대립이 미일 재처리 교섭 테이블의 최대 난점이 되었다.

    미국은 카터 대통령의 성명이 발표된 직후였으므로, 일본에 호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혼합추출로 전환하면 재시공에 최소 5년, 금액으로는 500억엔이 더 들어간다는 계산이 나왔으므로 일본은 혼합추출을 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도카이무라 재처리시설 가동 중지 명령으로 이해했다.

    밀고 당기는 교섭 결과 양국은 ‘일본은 단체추출 방식으로 이 시설을 운영하되, 추출한 플루토늄을 우라늄과 혼합하여 보관한다. 일본은 혼합추출 방식에 대한 실험과 연구를 계속해 혼합추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재처리방식을 혼합추출로 전환한다. 플루토늄을 경수로에 이용하는 시기를 2년간 연기한다. 일본은 조건부로 2년간 99t까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한다’는 등의 합의를 보았다.

    재처리 교섭은 일단락됐지만, 일본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에는 여전히 미국의 사전 동의가 필요했다. 일본은 장기간에 걸쳐 미국의 사전 동의를 획득하는 방안(장기적 포괄동의)을 모색했다. 미국은 1978년에 발효한 NNPA에 따라 일본과 맺은 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으므로 양국은 1982년 새로운 교섭에 들어갔다.

    미국은 NNPA가 요구하는 신(新)규제를 적용하기 위해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재처리 문제의 항구적인 해결과 제2재처리시설의 건설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협의가 되어야지,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을 위한 협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으로 교섭에 임했다. 일본은 미국의 NNPA가 요구하는 대로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면 일본의 원자력 개발과 이용은 미국의 통제를 받을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3년간 회담을 거듭했지만 양국은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다.

    이 시기 일본은, “카터 대통령의 제안으로 전세계적인 핵확산 금지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제회의인 핵연료주기 평가회의(INFCE)는 ‘원자력의 평화 이용과 핵 비확산은 양립할 수 있다’는 내용의 결론을 도출하였다. 일본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추구하므로 미국은 핵 확산 금지를 이유로 일본을 제약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또 일본은 “미국의 국내법인 NNPA를 근거로 국제조약인 미일 원자력협정의 개정을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1985년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이 교섭과정에서 일관되게 요구해온 몇 가지 주장을 철회한 것이다. 미국이 직접 일본의 플루토늄 관련시설을 사찰해야 한다는 요구를 철회하고, 일본의 플루토늄 저장을 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1985년, 건설을 추진 중이던 민간의 제2재처리시설에 대해서 건설 예정지의 지방정부가 이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제2재처리시설을 건설하고 운용하려면 미일 합의가 필요하므로, 협상을 재개할 이유가 있었다.

    미국과 일본은 협상을 거듭했다. 미국은 신규제 도입을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의 최대 목표로 삼았고 일본은 반대했다. 회담을 오래 끌 수밖에 없었다. 이 갈등은 일본이 요구한 대로 신규제의 대부분을 포괄동의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미국이 행사하겠다고 한 인허가 및 통제권을 장기간에 걸쳐 일괄적으로 일본에 부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협정 개정에 성공하고, 일본은 포괄동의를 획득함으로써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형식적인 성공을, 일본은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미 의회도 비준 동의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 과정에서 로카쇼무라에 건설하려는 재처리시설이 쟁점사항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일본이 NNPA가 요구하는 신규제를 신협정에서 받아들이면, 신규제의 대부분을 사전에 포괄동의하는 형태로 부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 결과 미국과 일본은 로카쇼무라 재처리시설의 건설 및 운전 문제를 포괄동의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일본은 건설이 시작되지도 않은 제2의 재처리시설에 대해서도 건설 및 가동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이 합의는 미국 의회의 조약 비준과정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미 정부기관인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제2 재처리시설에 대한 보장조치의 기술적 문제를 지적하며, 제2재처리시설을 포괄동의에 포함시키는 협정 개정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NRC는 일본이 건설할 예정인 제2재처리시설은 완벽한 핵물질 방호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 사항을 충실히 이행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포괄동의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NRC의 반대는 비준권을 쥔 미 의회를 자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반대를 무릅쓰고 국무부로 하여금 일본과 원안대로 조인해 의회에 동의를 구하게 했다.

    미 의회에서도 동일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의회는 국무부와 타협해 신협정을 승인했다.

    1988년 미일 원자력협정의 개정으로 일본은 원자력 프로그램 운용의 자율성을 확보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일본 원자력산업은 큰 시련을 맞았다. 1995년의 고속증식로인 몬주에서 나트륨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나고, 1997년 도카이무라 재처리시설에서 화재와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40년간 유지해온 ‘원자력 이용의 안전성 최우선’ 원칙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일련의 사고는 관계자의 안전의식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처리 및 고속증식로의 기술적인 완성도 부족에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세계 최초로 고속증식로를 완성한 프랑스가 1998년 고속증식로를 폐기한 것이 선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원자력위원회도 고속증식로 계획 및 제2재처리시설의 건설 등 플루토늄 이용을 축으로 하는 원자력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행운과 불행

    1990년대 미국은 핵 비확산을 최우선 국정과제의 하나로 유지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핵무기용 플루토늄과 우라늄 제조 반대, 플루토늄의 상업적 이용에 반대하는 정책을 유지하여, 미국은 핵무기용 및 상업용 재처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유럽과 일본의 상업용 재처리는 용인한다는 태도를 밝혔다.

    미국이 일본과 유럽의 플루토늄 이용을 용인한 이유는 이 국가들과 체결한 원자력협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유라톰)가 맺은 원자력협정과 미일 원자력협정은 유럽과 일본에서의 재처리를 승인하고 있다.

    미국이 국내정책을 이유로 일본과 유럽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제어하면, 일본과 유럽은 미국을 배제하고 긴밀한 원자력 협력관계를 유지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자국의 재처리 및 플루토늄 이용은 제한하면서도, 유럽과 일본의 재처리는 용인하는 모순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클린턴 행정부로부터 예외적인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일본은 대응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핵 비확산 정책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면, 일본이 계획하고 있는 원자력 프로그램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핵 비확산정책이 일본의 재처리노선을 제약하지 않게 하기 위해 국제적인 신뢰를 획득하려고 했다.

    그리고 고속증식로 몬주의 사고 이후 중지한 핵연료사이클의 완성 작업과 플루토늄의 이용을 재추진했다. 과기청과 원자력위원회는 재처리로 얻은 플루토늄을 원자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한 MOX 연료(우라늄-235 대신 플루토늄을 혼합해서 만든 핵연료)를 사용하는 신형 원자로와 고속증식로를 일본의 원자력계획의 중추로 재설정하였다. 고속증식로 이용이라는 본래 원자력계획으로 복귀했으며, MOX 연료 제작으로 플루토늄을 소진함으로써 핵 확산의 가능성이 있다는 국제여론을 무마한 것이다.

    재처리의 당사자인 ‘동력로 핵연료 개발사업단(動燃)’과 ‘일본 원연(原燃)’도 대응책을 모색했다. 핵 비확산 문제 전문가를 증원하고 적극적인 국내외 홍보 작업을 펼쳤다. 미일 원자력 협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에 대한 일본의 원자력 이용 프로그램 설명을 강화했다.

    특히 민간의 원자력전문가 그룹은 미국의 학자·관료들과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일본의 원자력 프로그램이 핵 확산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일본의 민관(民官)은 자국의 원자력 프로그램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보조를 맞춘 것이다.

    2006년 3월 로카쇼무라 재처리시설이 가동에 들어갔다. 이 날은 원자력 예산이 책정된 1954년 이래 일본이 추진해온 ‘핵연료사이클 정책’이 완성되는 날이었다. 물론 1977년부터 도카이무라 재처리시설이 가동되고 있었으나, 도카이무라 재처리시설은 일본 정부 소유이고 용량이 매우 작았다. 하지만 로카쇼무라의 재처리시설은 민간 소유이고 대용량의 복합 재처리시설이다.

    로카쇼무라 재처리시설은 2007년 5월까지의 시험가동 기간에 약 4.3t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예정이다. 시험가동을 끝낸 다음부터는 연간 약 8t의 플루토늄을 추출하는데 이는 연간 1000개 이상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또한 로카쇼무라에는 우라늄 농축시설, 저준위 방사성폐기물 매설센터,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센터가 입지해 있어, 이곳은 일본 핵연료주기 시설의 명실상부한 중심지가 되었다.

    비(非) 핵보유국 최초의 재처리시설

    로카쇼무라 재처리시설은 프랑스의 재처리시설을 기본 모델로 하여 설계되었다. 이곳에서는 100만㎾급 원자력발전소 30기가 1년 동안 발생시키는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다. 로카쇼무라 재처리시설은 비(非)핵보유국이 보유한 세계 최초의 상업용 재처리시설이다.

    로카쇼무라 핵연료사이클 기지의 건설은 일본의 핵연료사이클 정책의 완성을 의미하며, 재처리 이후 재가공된 연료를 고속증식로에서 이용하는 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로카쇼무라의 재처리시설은 플루토늄을 혼합 추출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재처리의 선두주자인 프랑스는 플루토늄을 단체로 추출하는데, 핵비확산조약(NPT)과 IAEA는 5개 공식 핵 보유국만이 플루토늄을 단체로 추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도카이무라 재처리시설은 비핵보유국 중 유일하게 플루토늄을 단체로 추출하도록 허가받은 시설이다.

    일본은 원자력 개발의 초기 단계부터 플루토늄을 이용하는 ‘핵연료사이클’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플루토늄을 연소할 수 있는 고속증식로 등 신형 원자로가 안전성과 경제성의 측면에서 불완전하기 때문에, 핵연료의 재처리에서 발생하는 다량의 플루토늄이 축적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지금과 같은 플루토늄 이용정책을 지속한다면 이는 핵 비확산체제에 불안정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시아의 원자력산업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에너지부는 2010년 세계 원자력발전의 48%를 아시아 국가가 차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이 전체 발전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과 대만 그리고 원자력의 비중이 급속하게 높아지고 있는 중국이 장래에 플루토늄 이용정책을 세운다면, 핵 확산이나 테러리즘의 위험성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한국은 일본을 배워라

    일본은 2004년 말 기준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생산한 37.4t, 자국에서 생산한 5.7t 등 총 43.1t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 로카쇼무라 재처리시설 시험가동 기간에 약 4.3t 플루토늄이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면 연간 8t의 플루토늄이 생산된다. 따라서 2010년이면 일본이 보유하는 플루토늄 총량은 85t에 달하게 된다.

    무기급 플루토늄은 소유하지 않았고 핵 확산의 위험은 없다고 일본 정부는 주장하지만, 일본 국내에 수십t의 플루토늄이 존재하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일본에는 이 플루토늄을 태울 원자로가 없다. 계획에 의하면, 일본은 2009년 고속증식로 몬주를 재가동하고, 2010년부터는 경수로에서 MOX 연료를 사용하게 된다. 또한 2012년에는 MOX 전용 경수로를 가동하고, 플루토늄도 원자력발전의 연료로 사용할 계획이다.

    지난 50년간 지속된 미일 원자력 협력의 전례는 한미 원자력 협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일본은 자국의 원자력 프로그램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제사회와 미국으로부터 원자력발전의 안전성과 투명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도록 노력해왔다.

    과거 일본이 처한 상황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따라서 과거 50년간 일본이 취한 대미 원자력외교는 우리에게는 한미 원자력협정의 개정을 준비하는 점에서나, 원자력발전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점에서도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일본의 원자력 정책
    전진호

    1962년 포항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

    도쿄대 대학원 국제관계전공 (정치학박사)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現 광운대 일본학과 교수


    현재의 한미 원자력협정은 개정 전의 미일 원자력협정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플루토늄의 이용과 저장, 제3국 이전, 플루토늄 및 고농축 우라늄의 저장과 형상 그리고 내용의 변경은 미국의 사전 동의를 얻은 후에야 가능하도록 규제되어 있다. 일본이 협정 개정 교섭을 통해 획득한 사전 동의의 포괄화는 향후 미국과 원자력협정 개정 교섭에 임할 한국 정부의 과제이기도 하다.

    일본은 미국이 중심이 된 국제사회의 통제와 규제를 극복하고, 핵연료주기를 완성하는 에너지의 자립화를 이루었다. 천연 우라늄의 구입에서 재처리에 이르는 핵연료 주기의 대부분에서 공급 국가의 규제를 받고 있지만, 이 규제가 일본의 원자력 개발이용계획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일본이 거둔 성과에 한국은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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