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고 나를 소개하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 한동안 그게 싫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역사학자가 무슨 옛날얘기나 해주는 사람인 줄 아느냐,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 귀여운 자부심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니 재미있는 얘기를 해달라는 분들의 말이 타당했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기념작 에펠탑. 당시 에펠탑보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식민지 인종을 전시하던 식민지관이었다. 시대의 야만이 부끄러웠던지 어딘가로 몸을 숨겼고, 에펠탑만 기억을 왜곡하고 있다.
“역사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서부터 나온다. 역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가 재생된다 해도 그것은 그저 소설 정도일 것이다. 역사가의 손에서 나온 체험은 행위자들의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서사(敍事·narration)이다.”(‘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폴 벤느, 이상길·김현경 옮김, 새물결, 2004, 21쪽)
남아 있는 사실들은 원인, 목적, 기회, 우연, 구실 등의 역할을 한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 뭔가 조직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변화시킬 수 없는 조직, 구조다. 역사는 ‘실측도(實測圖)’처럼 존재하지 않지만, 상대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렇게 역사적 진실은 존재한다. 그리고 ‘줄거리’가 있음으로 해서 이야기가 있다.
역사가 대부분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좋은 역사가는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대한 역사가는 그가 가진 관심 주제나 과제 안에서 가장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다. 이야기(서사)는 역사가가 사실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가장 일반적이고 특징적인 역사 형식 중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벤느는 역사는 우리가 ‘줄거리’라고 부르는, 물질적(=객관적) 원인(≒조건)과 목적(=자유의지)과 우연의 매우 인간적인 혼합체라고 정의했다.
복습 : 세 요소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다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가 여자였다는 것, 이집트 여왕이었다는 사실이 상황을 어떻게 만들어갔는지부터 이해했어야 한다.
인간은 맨땅에 태어나지 않는다. 타고 나면서 주어진 조건이 있다. 벗어나기 어렵다. 어려운 게 아니라 아예 바꿀 수 없다. 남자/여자라는 것, 왕이라는 것, 학자라는 것, 농민이라는 것…. 때론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것, 협잡꾼 집안이라는 것, 이도저도 아닌 집안이라는 것…. 충청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전라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얼굴이 누렇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 무엇보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물학적, 경제학적 조건 등. 이는 모두 객관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어진 조건대로 살지 않는다.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때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뭔가 비전을 만들고 추구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실천한다. 이런 자유의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왕의 지위도 버릴 수 있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다. 이것이 역사의 둘째 동력인 자유의지이며, 목적의식을 가진 존재로서의 삶이다.
셋째, 우연이라는 변수가 있다. 우연이란 콩 심은 데서 팥이 난다든지, 주사위를 던졌을 때 앞서 던져 나온 숫자와 뒤에 던져 나온 숫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과 같은 임의성과는 다르다. 최근에 내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우연이란 서로 원인이 다른 여러 사건의 만남이다.
객관적 조건은 역사를 해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함에도 환원론의 우려가 있다. 어떤 하나의 이유로 역사 전개를 설명하려고 한다. 경제결정론, 지리결정론, 환경결정론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사람들은 반도(半島) 근성이 있어서 누구를 섬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고 선전했던 것이 하나의 사례다. ‘여자(남자)는 원래 그래!’ 하는 식의 발언도 객관적 조건을 절대화하는 사유방식에서 나온다. 객관적 조건만 고려하면 설명이 됐다고 위안을 받을지는 몰라도, 그 위안 뒤끝은 허전하다.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해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앞으로 그런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질 수도 없다.
객관적 조건의 맞은편에 의지만 강조하는 목적론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뭔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자유의지의 강조는 ‘하면 된다’는 구호에 담긴 무조건성과 통한다. 무조건성은 말 그대로 객관적 조건의 무시다. 이 자유의지의 극단에는 신이 있다. 신의 뜻대로, 목적의식만 강조하면 도덕적 요구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사건이나 사태를 설명할 때 빈곤해지고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취약하다.
우연이라는 숨구멍
객관적 조건과 자유의지는 역사를 설명할 때 동시에 고려할 요소이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역사의 사건을 설명할 때는 곧장 둘 중 어느 하나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유혹이다. 쉽게 설명하려는 유혹. 역사학의 독약 같은.
여기에 우연이라는 요인까지 끼어들면 어떨까.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것이 있다. 역사란 전체적으로 우연의 연속이라는, 우연의 일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가장 뜻밖의 원인에서만 유래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생각이다(‘역사란 무엇인가’, E H 카, 김택현 역, 까치, 1997, 149~156쪽).
‘클레오파트라의 코’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넋이 나가 로마에서 신망을 잃고 악티움 해전에서 패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자살한 사건을 두고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한 치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여기서 세계의 역사는 곧 ‘지중해의 역사’이므로, 파스칼이 생각하는 세계가 매우 협애했거나 다른 세계에 대해 무식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파스칼은 공연히 역사 얘기를 꺼내어 역사학에 대해서도 무지를 드러냈다.
코가 높았다는 우연한 사실이 세계사를 바꿨을 것이라는 그의 말은 종종 역사의 우연을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널리 인용된다. 그러나 파스칼은 코에 앞서 클레오파트라가 여자였다는 우연을 말했어야 한다. 또 이집트 여왕이었다는 사실이 상황을 어떻게 만들어갔는지부터 이해했어야 한다. 우연은 중요할 수 있고 때로 가슴 뛰게 하지만 객관적 조건, 자유의지와 함께 생각하면서 그 우연의 맥락을 검토하지 않으면 한낱 가십에 그치고 만다. 그 결과 파스칼의 말은 숱한 사람이 인용했지만, 악티움 해전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우연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소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 우연은 개인적인 문제라는 뜻도 아니다. 우연이라는 것이 파스칼처럼 역사 현상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도피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거듭, 나는 “우연이란 서로 원인이 다른 여러 사건의 만남이다”라고 정의한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음주운전하는 차에 받혀 죽는 일부터,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던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죽는 일까지, 역사에는 서로 원인이 다른 둘 이상의 사건이 만나는 경우가 많다. 우연은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사소할 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무지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은 사회적인 산물일 수도, 매우 중요할 수도, 알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우연의 복잡성 때문에, 카역시 그랬듯이, 우연이라는 문제를 역사에서 논의할 때 마땅한 가닥을 타지 못하고 더 어렵게 만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의 정의에 따르면 우연은 객관적 조건이나 자유의지에 기초해서 생기는 변주임을 알 수 있다. 이 변주, 날씨 예보만큼이나 예측하기 어려운 변주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길이 엇갈리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이별에서부터, 전쟁이 그친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행운에 이르기까지. 이런 느낌이 과거에 투영될 때, 우리는 아쉬워하고 한탄하기도 하고 안도하고 뿌듯해하기도 하는 것이리라.
이야기의 조건
통상 이야기는 어떤 사건이(what) 어떻게(how) 일어났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도 논란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본교재로 삼고 있는 ‘역사가의 오류(Historian´s fallacies)’의 저자 피셔(D H Fischer)는 ‘왜(why)’라는 질문을 경계한다. 직접적인 원인부터 어떤 행위의 목적에 이르기까지 ‘왜’라는 물음의 함의 자체가 갖는 모호성 때문이다.
반면 카는 ‘왜’라는 질문을 중시한다. ‘왜’에 대한 논의가 아예 책의 한 장(章)을 이룬다. 역사가도 다른 과학자처럼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셔처럼 애매한 질문을 경계할 필요도 있고, 카처럼 통상적인 질문으로서의 ‘왜’를 본연의 궁금증(=호기심)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야기(서사)는 꼭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듯하다. ‘무엇이, 어떻게?’라는 질문만으로도 이야기는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해, 이런 식의 이야기(story-telling)가 역사학뿐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인접 분야의 학문에서도 공통된 용법이라는 피셔의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즉 핵심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점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하기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살펴볼 텐데, 이야기는 원래 복잡하다. 우리의 관심은 시간과 이야기의 문제다. 서사에서 나타나는 시간적 정합성(integrity)의 문제다. 혹자는 시간(Time)이라는 것의 성격이 갖는 복잡성을 문제 삼을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쓰는 좋은 탈출구가 있다. 그냥, 지금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간,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대착오(anachronism)의 오류다. 이 오류는 어떤 사건이 실제 일어난 시기(시대)가 아닌 다른 시기에 일어난 것처럼 묘사, 분석,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한 연대(날짜) 착오가 이런 오류를 낳을 수도 있다. 하나의 대상, 사건, 용어가 잘못 쓰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오류 중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현재주의(Presentism)의 오류다. 영미권에서는 현재주의를 ‘휘그 역사학(Whig history)’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현재주의의 용법은 정작 휘그들(Whiggery)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한다. 현재주의는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의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트랙터를 사용하는 현재 농촌의 관점에서 호미와 쟁기를 사용하던 고려, 조선의 농업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가 널리 알려진 ‘실학(實學)’이라는 개념이다.
실학의 현재주의
그동안 실학은 대략 “조선후기의 반(反)주자학 내지 탈주자학적 사상조류로, 주로 17세기에 이수광, 유형원 등에서 태동해 안정복, 이익,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18~19세기 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근대 지향적 사상”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됐다. 그래서 실학은 탈중화(脫中華), 민족주의, 민본주의, 과학주의를 내용으로 한다고 이해되어왔다. 당연히 상공업을 중시했다고 이해했고, 봉건적 신분제 및 지주-전호제 역시 부정하는 사상이라고 해석했다.
실학은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이 주도한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돼 주자학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비실용적 학풍’에 대비되는 학풍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실학은 역사적 실재(實在)가 아니라 만들어진 개념이다. 이후 실학은 주자학의 봉건성을 넘어선 사상, 자생적 근대화를 추구하던 사상으로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말하자면, 우리도 근대화할 수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 ‘근대’가 문제다. 실학 논자들은 그 근대를 ‘보편사’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조선도 근대로 나아가고 있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보편사란, 어느 민족, 지역을 막론하고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근대로 가게 돼 있다는 역사관이다(흔히 이를 대문자 역사, ‘History’라고 부른다).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가 그렇게 배웠으니까! 근대야말로, 사실로나 가치로나 인류사의 귀결점이고 지향해야 할 시대라고 배웠으니까. 민주주의, 자유, 이성, 과학…, 이런 것이 근대를 규정짓는 용어이자 삶의 양식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과연 어느 누가 이들의 가치에 대해 이의를 달 것인가. 자본주의 맹아론과 함께 실학은 이렇게 학계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런 근대는 지구상의 일부분에만 타당하다. 대부분의 나라, 민족, 지역에서는 지금과 같은 근대를 자신들의 미래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감이 빠른 분은 눈치 챘겠지만, 현재주의는 현재의 합리화와 연결돼 있고, 또 결과주의와 연결돼 있다. 자본주의를 역사의 종말로 보든, 사회주의를 역사의 종말로 보든, 다시 말해 어느 쪽을 근대로 보든 근대화를 절대 선(善)으로 생각하는 역사주의가 풍미하던 시절에 실학은 유령처럼 조선 역사를 휘감아 돌았다. 그래서 조선사 연구는 정작 조선사 연구가 아니었다. 근대화를 설명하기 위한, 즉 현대사를 쓰기 위한 자료를 간헐적으로 제공하는 부수적 역사에 불과했다.
무능과 병폐
‘역사는 무엇에 쓰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역사를 위한 변명’. 저자 마르크 블로흐는 역사를 100년 단위로 잘라 보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했다.
뭔가 새로운 사상적 조류라고 이름 붙이려면 존재론적 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실학 논자들은 주기(主氣) 경향의 학자에게서 실학이 싹텄다고 보기도 했다. 그러나 ‘주기론자’의 대표인 율곡 이이의 제자들은 서인-소론/노론으로 이어졌으므로 당초 실학파의 그림에 어울리지 않았다. 소론/노론이 ‘보수적, 반민중적’ 학파로 전제됐으므로, 실학파가 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이 그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아예 주리(主理)-주기라는 구도 자체가 조선성리학을 설명하는 데 무척 무기력하다는 점이었다.
율곡의 기호학파에 연원을 둔 북학파는 상관이 없지만 성호(星湖) 이익이나 다산(茶山) 정약용의 연원은, 굳이 연결하자면, ‘주리론’인 퇴계에 닿아 있어서(닿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당초 ‘주기-주리’라는 개념은 조선에서 보이는 성리학의 자기화 과정의 역사성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무능을 넘어 병폐가 있는바, 그것은 ‘주기-주리’의 개념을 통해 정치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상사와 정치사의 분리 현상’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주리-주기 학파로 구분하다보니 정치세력과 일치하지 않게 된 것이다. 주기학파라고 생각했던 율곡학파에서 한원진(1682~1751) 같은 주리 계열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주리-주기론자들은 자신들의 구도 자체는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서는 사상과 정치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고 말았다.
사상이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그들의 세계관, 인간관이 정책과 연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정책은 정치가 민생과 사회에 구현되는 다양한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관성이 없다는 말은? 그렇다. 그 사상은 공허하다는 뜻이다. 반면 비전이나 세계관이 없는 정치란 무엇인가. 그렇다. 그 정치는 권력투쟁뿐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일제 식민주의자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주구장창 퍼부어댄 성리학=공리공담론, 정치=당쟁론의 실제였다.
이러한 주리-주기 구도의 창시자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유학사’를 쓴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이고, 이 주리-주기 논리를 이어받은 이가 ‘한국유학사’를 쓴 이병도이다. 이병도가 여러 유보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단칠정논쟁과 호락논쟁을 ‘관념적 독단’ 정도로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 정치사의 흐름을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의 당쟁론 정도에서 이해하게 되는 근원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동안 실학 개념에 대해서는 비판적 논고가 적지 않았다. 실학이란 말이 조선시대에 불교나 도교에 대해 유학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는 지적부터(한우근), 조선성리학이 곧 실학이었다는 논증(지두환), 실학 개념의 근대주의적 성격에 대한 통찰(김용옥), 조선시대 봉건제의 부재와 실학 개념의 비자립성에 대한 문제 제기(한영우, 오항녕), 주자학-반주자학 구도의 허구성(유봉학) 등이 그것이다. 굳이 실학 개념의 ‘해체’를 말하지 않더라도, 부적절한 개념에 담긴 시대착오적 오류를 오래 가져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역사학, 철학, 문학을 막론하고 퍼져 있는 전염병이 있다. 논문(또는 저서)의 대상을 부를 때, 꼭 세기(世紀·century) 단위로 구획하는 병이다. 일종의 헥토-히스토리(hecto-history)다. 역사가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정확히 100년 단위로 잘리는 모양이다. ‘역사는 무엇에 쓰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저서 ‘역사를 위한 변명’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마르크 블로흐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역사는 꼭 100년 단위?
‘우리는 더 이상 영웅의 이름을 따서 시대를 명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척 사려 깊게 매 100년 단위로 각각의 시대를 셈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1년에서 시작해 모든 역사를 그렇게 센다. 13세기의 예술, 18세기의 철학, ‘볼품없는 19세기’ 등등. 산수(算數) 마스크를 쓴 얼굴들이 우리 저서의 페이지 곳곳을 배회한다. 우리 중 누가 감히 이 명백히 편리한 유혹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The Historian′s Craft: Reflections on the Nature and Uses of History and the Techniques and Methods of Those Who Write It, New York’, Marc Bloch, 1964, pp.181~182)’
블로흐의 불만이 아니더라도, 선후배 역사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이런 식의 시기 구분에 대한 비판이 곧잘 도마에 오르곤 한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레고리우스력이라고 부르는 서력(西曆) 기원은 갑오경장 이후에 사용된 역법이다. 따라서 그전에는 아예 이런 연도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60갑자(甲子), 또는 현재 임금의 재위 기간을 중심으로 ‘금상(今上) 몇 년’이라고 하든지, 중국 연호를 써서 ‘숭정(崇禎) 몇 년’이라고 썼을 뿐이다. 그러니까 100년 단위로 인간 사회나 경험을 구획하는 것은 근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주 쓴다. 편의성이 학문적 엄밀성을 압도하는 경우라고나 할까. 이 역시 전형적인 현재주의이며, 시대착오의 오류 중 하나다.
아키타이프의 오류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보여주는 어느 원시부족. 이들이 우리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야만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들은 우리의 과거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의 오류에 귀기울일 이유가 있다.
이러한 오류의 고전적인 사례는 A 토인비의 거작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O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이다. 이들은 시간을 초월한 아키타이프 패턴에 따라 모든 ‘문명’을 분류했다. 수메르 문명과 중국 문명의 발생에 대한 고려, 그 방대한 변화, 발전은 무시된다.
아키타이프의 오류와 현재주의의 오류의 결합, 그 전형을 우리는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 문명의 자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명(civilization)’이란 말이 유럽의 자기의식이 된 것은 대략 1850년 전후의 시기다. 다시 말해 문명이란 말도 근대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그 문명인들, 세계 곳곳의 식민지에서 각종 인종들을 끌고 와서 이른바 ‘식민지관’을 만들어 전시했다. 식민지관은 1855년 런던 만국박람회 때 최초로 등장했지만, 파리코뮌 이후의 경영위기 타개책에서 비롯된 동물원의 원주민 전시가 식민지관의 인종 전시로 형식을 바꾸어 제도화한 것은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부터였다. 그때 만들어진 식민지관은 우리 기억 속에 없다. 그러나 같은 박람회 때 만들어진 또 하나의 기념물은 여전히 남아 우리의 기억을 왜곡하고 있다. 에펠탑이다. 당시 에펠탑보다 관심을 끌었던 것은 분명히 식민지의 인종을 전시하던 식민지관이었다. 유럽 문명을 기준으로 여타 문명을 줄세우기 했던 시대의 야만이 부끄러웠던지 그 대목은 어딘가로 몸을 숨겼고, 에펠탑만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착오의 오류를 줄이는 방법은 뭘까. 토마스 쿤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일반적으로 또는 흔히 자신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채, 과학사학자들은 새로운 유형의 질문을 제기하면서 과학에 대한 색다르고, 흔히 말하는 축적성을 떠난 발전 노선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옛 과학이 현재 우리에게 베푼 지속적 기여를 따지기보다는 바로 그 당대에서 그 과학의 역사적인 온전성을 그려내려고 애쓴다. 예를 들면 현대 과학의 관점과 갈릴레오 관점의 관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견해와 그의 그룹, 즉 갈릴레오의 스승, 동시대 학자들, 그리고 과학 분야에 종사했던 직계 제자들의 견해 사이의 관계를 묻는 것이다.’(토마스 쿤, 김명자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2010, 까치, 23~24쪽. 읽기 쉽도록 번역문을 조금 고쳤음)
쉽게 말해, 같은 패러다임이 작동하는 시대의 과학은 서로 연관, 기여, 영향을 설명할 수 있지만, 패러다임이 바뀐 시대의 과학끼리 연속성, 단절성, 영향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에서 현재 한국 사회로 변해온 과정에서 진보, 발달이라는 시계열적 성격을 그려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이 역시 시대착오의 오류 중 하나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는 연대기적 전개의 오류(chronic fallacy)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그렇게 축적, 연속/단절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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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를 목적지와 이정표가 있는 길(路)로 표상할 수 있다면, 정작 역사는 마당의 표상에 가깝지 않을까. 마당이 있다. 그것은 삶의 조건이다. 거기서 먹고 마시고 논다. 무대도 설치하고 한창 흥겹게 논다. 그러다가 서서히 식는다. 그리고 마당은 쓸쓸해진다. 어느 틈엔가 새로운 마당이 열린다. 이 마당은 이전 마당과 다르다. 쿤의 말대로, 패러다임이 바뀐 마당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