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게 들여와 싸게 팔겠다’ 선언적 계획뿐
- “마진 포기해도 그 가격엔 공급 불가능”
- 구매, 운송, 저장 등 주요 계약 미체결 상태
6월 21일 이태복 대표가 국민석유주식회사 설립을 발표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기름값을 20% 낮추겠다는 회사가 나타났다.‘경제민주화 1호 기업’을 자칭하는 국민석유주식회사다. 국민석유는 값싼 착한 기름을 공급하겠다며 10월 18일~11월 15일 국민을 대상으로 1000억 원 규모의 주식 공모를 실시했다.
1장짜리 사업계획서
정유업계는 국민석유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경쟁사가 출현해서가 아니다. 국민에게 값싼 기름에 대한 환상만 심어줄까 우려하는 것. 정유업계 한 인사는 “준비도, 실행계획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값싼 기름을 공급하겠다는 약속은 터무니없다. 그렇다고 그런 얘기를 입 밖에 꺼냈다간 ‘독과점 재벌이 가격 경쟁을 방해한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함구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국민석유 공모가 국민 사기극으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 한 전직 관료는 “값싼 기름을 공급하겠다는데 혹하지 않을 국민이 있겠나. 문제는 과연 현실적으로 값싼 기름이 공급될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석유의 사업계획에 따르면, 단기적으로는 싱가포르 국제 현물가 대비 18~20% 낮은 가격으로 휘발유, 경유 등의 석유제품군을 수입해 소비자에게 리터당 200원 저렴하게 공급하겠다는 것. 이 같은 단기 사업이 성공하면 중기에는 저렴한 벙커C유 등을 도입, 혼합정제(블렌딩) 과정을 거쳐 한국 품질기준에 적합한 휘발유와 경유를 생산함으로써 리터당 300원 싸게 공급하겠다고 한다. 이어 장기적으로는 △시베리아,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저유황 완제품과 원유를 수입하고 △국내 중소기업의 촉매제와 정제시설 국산화를 통해 정유사업에 진출하며 △이를 통해 리터당 400원 저렴한 기름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석유가 밝힌 사업계획 내용은 이것이 전부다. 전자공시시스템 투자설명서의 사업계획도 마찬가지다. 단지 ‘기름을 값싸게 들여와 싸게 공급하겠다’는 선언적 내용만으로 사업계획을 채운 것이다. 투자설명서와 사업계획서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값싼 기름을 공급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이 빠져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들은 ‘20% 싼 기름 공급’은 비현실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유업계 종사자는 “원유 도입에서부터 정제, 운송 과정을 거쳐 소비자에게 공급되기까지의 원가를 따져보면 리터당 10, 20원 낮추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석유제품시장 유통구조개선 및 경쟁촉진대책’의 일환으로 알뜰주유소를 확대해 전국 주유소 리터당 평균가격보다 30~50원 인하해 판매하고 있다. 만약 국민석유의 주장대로 리터당 200원 싼 가격에 기름 공급이 가능하다면 정부와 정유사들이 저렴한 기름 공급을 외면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유가 공개 사이트 오피넷 데이터를 통해 기름값 결정 과정을 살펴보자. 올 9월 기준으로 정유사가 공급하는 휘발유 1리터의 세전 공장도 가격은 885.35원이다. 같은 시점 국제 원유가는 리터당 737.80원. 정유사는 이 가격에 원유를 사서, 유조선에 실어 국내로 수송하고, 통관하면서 관세와 수입부과금을 내고, 정유공장에 원유를 보내 정제하고, 정제한 휘발유를 저유소에 수송하기까지 리터당 147.55원의 마진을 붙인 것이다.
배럴당 수송비(1~2달러)와 관세 3%를 감안하면 리터당 30~40원의 비용이 들고, 여기에 부과금 16원이 추가로 붙는다. 즉 정유사가 원유 도입가에 더 붙인 147.55원 중 50원 가까운 비용이 수송비와 관세, 부과금으로 지출된다. 정유사들은 정제비와 저유소까지의 수송비, 감가상각비, 이자비용 등 모든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리터당 최대 100원의 이윤을 붙인다.
국민석유는 단기 계획으로 리터당 기름값을 200원 더 저렴하게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정유사들이 붙인 100원의 이익을 모두 포기하더라도 어디에서 100원을 더 낮출 수 있을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정유사 마진을 없앤다면 정유공장을 지을 수도, 운영할 수도 없다. 이 문제는 차치하고 정유사 마진을 모두 없애더라도 국민석유가 장기 목표로 제시한 것처럼 리터당 400원을 낮추려면 원유를 정유사보다 리터당 300원 더 싸게 사와야 한다. 리터당 300원이면 배럴당 44달러쯤 되니 1년에 3억 배럴을 정제하는 정유사가 원유를 그만큼 싸게 들여오면 연 14조 원의 영업이익을 더 거둘 수 있다고 한다. 결국 국민석유의 주장대로라면 국내 정유사는 10조 원대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원유를 비싸게 들여오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정제설비 없이 블렌딩 불가능
국민석유의 중기 사업계획에도 큰 허점이 있다. 석유제품 반제품을 국내에서 블렌딩하는 것은 ‘정제’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 관련법상 블렌딩은 정제설비를 갖춘 석유정제업자만 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시행령에 따르면 석유정제업자는 상압증류시설, 감압증류시설 등의 설비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 따라서 정제설비가 없는 국민석유는 국내에서 반제품 블렌딩을 할 수 없다.
다만 국민석유는 사업계획서에서 2016년까지 해외 공장에서 석유를 정유해서 공급하는 혼합제조수입을 하겠다고 밝혔다. 국내법 규정을 피해 해외 공장에서 정유해 공급하겠다는 논리다. 그러나 해외 어느 정유공장에서 정제해 들여올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국민석유가 밝힌 장밋빛 청사진의 하이라이트는 2018년 정유사를 설립해 국내 5대 정유사로 20% 인하된 고품질의 저렴한 소비자가를 형성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석유는 정유사 설립을 위한 소요 자금으로 5000억 원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정유업계는 ‘현실을 전혀 모르는 꿈같은 얘기’라고 일축한다. 하루 10만 배럴 생산 규모의 정유사를 설립하는 데 최소 2조 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 더욱이 정유사를 설립하려면 단순 정제설비 외에도 원유 도입을 위한 부두, 원유와 석유제품 저장창고, 제품 출하를 위한 기본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런 시설을 갖추려면 막대한 부지를 확보해야 한다.
더욱이 하루 10만 배럴 생산으로는 채산성을 맞추기 어렵다. 원유를 단순 분리하는 정제설비만 가동할 경우 수지를 못 맞추기 때문에 중질유를 경질유로 전환하는 고도화 설비가 필요한데, 고도화 설비를 갖추려면 추가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유공장 하나 돌리는 데 얼마나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한지 잘 아는 사람들에겐 국민석유의 주장이 허풍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사람에게 현실성이 있다, 없다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결례인 것 같아 말을 아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업 개시 못할 위험’
국민석유가 투자설명회에서 배포한 자료에는 ‘20% 값싼 기름 공급’이라는 장밋빛 청사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어두운 내용들이 실려 있다. 사업 실적과 경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구매, 운송, 저장시설 임차, 주유소 등 기름 공급에 필수적인 주요 계약이 모두 체결되지 않았고, 발행가액 주당 5000원짜리 주식에 대한 외부 평가기관의 주당 평가금액이 -3만8914원이란 대목도 있다. 도입계약이 체결되지 않아 석유제품을 싱가포르 현물가 대비 -18% 가격에 도입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고, 경쟁 정유사가 가격을 낮출 경우 수익성 악화 우려가 있다고도 밝혔다. 더 놀라운 것은 ‘석유수출입업 조건부 등록 상태여서 본등록을 하지 못할 경우 사업을 개시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는 부분.
그럼에도 공모가 한창 진행 중이던 11월 11일 국민석유 이태복 대표(전 보건복지부 장관)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1억5000만 달러(약 1600억 원)의 외자를 유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대표는 “세부사항을 협의 중”이라며 투자 주체가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국민석유가 배포한 투자설명서 한 켠에는 ‘투자위험을 인지하고, 청약자 스스로 청약 여부를 판단할 것’이라는 대목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