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호

물들이지 않은 명주처럼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혼란의 시대, 노자老子에게 길을 묻다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6-24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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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할 줄 아는 데서 느끼는 만족이 영원한 만족이며, 낳았으되 소유하지 않는 어머니처럼 자애하며, 갓난아이처럼 담박하게 살면서 세상보다 앞서려 하지 말라고 노자는 가르친다. 이념, 신념처럼 마음속 하나의 기준을 가지면 딱딱해질 것이나, 산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뻣뻣하다.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물들이지 않은 명주처럼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국무총리가 비웃음 대상이 됐다. ‘한 박스의 활력, 총리도 반한 맛’ ‘이완구 효과, 광동제약 주가 급상승!’ 같은 비아냥거림이 SNS에서 나돌았다. 조롱하는 댓글이 꼬리를 물었다. 총리는 결백을 주장하며 사임했다.

    ‘이참에 콩밥 좀 드시오. 대신 밥값은 당신이 내고’ ‘무상 콩밥 먹으려면 가난 입증해야’ 같은 촌평도 나왔다. “학교는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라며 무상 급식을 철회한 경남지사가 비리 의혹에 휘말리면서다.

    “정치가 길을 잃었어요. 노자가 구분한 기준으로 보면 한국 정치 지도자는 여·야 구분 없이 ‘비웃음거리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조롱 대상이 돼버렸어요. 화내는 게 아니라 비웃습니다. 최악의 리더인 거죠.”

    백성이 통치자 비웃는 단계

    최진석(56, 서강대 교수·철학) 건명원(建明苑) 원장은 노자가 산 시대와 현재가 닮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전국시대 초기(기원전 570~479년)를 산 인물로 알려진다. 주나라가 쇠락해 생산수단, 세계관, 계급 질서가 밑바탕부터 흔들리던 혼란의 시대다. 노자는 무위(無爲)의 통치와 관련해 ‘도덕경(道德經)’에 이렇게 썼다.

    “최고의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지도자가 있다는 것만 안다(1). 그다음 단계에선 백성이 통치자에게 친밀함을 느끼고 칭송한다(2). 그 아래에선 백성이 지도자를 두려워한다(3). 그보다 못한 것은 아랫사람이 통치자를 비웃는 것이다(4).”

    1은 백성이 통치자를 지지하는 것조차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다. 3은 독재정치를 가리킨다. 국무총리, 도지사를 향한 조롱은 4에 가깝다.

    광복 70년 만에 가난을 극복하고 선진국 그룹 말석을 차지하는 성취를 이뤘는데도 왜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가 많을까. 미래는 왜 불안할까. 채우지 못한 욕망에 목말라하고, 경쟁의 강박에 시달리는 까닭은 뭘까.

    가지 않은 길 ‘생각’하는 힘

    최진석 교수는 2500년 전 노자가 쓴 200자 원고지 25장 분량의 길지 않은 글(도덕경)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가 안은 문제를 완화하거나 풀어낼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5월 11일 서강대 정하상관에서 그를 만났다.

    ▼ 노자에게 “잘사는 나라가 됐는데도 왜 행복하지 않을까요?”라고 물으면 뭐라 답할 것 같습니까.

    “굳어버린 신념과 이념, 가치관에 ‘너’를 맡겨서 그렇다고 말할 듯해요. 춘추전국시대를 혼란기라고 표현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기존 질서가 새 질서로 바뀌는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철기가 산업에 투입되면서 질서가 재편됐거든요. 현재는 정보기술 발달로 인해 산업혁명 이후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춘추전국시대와 변화의 내용은 다르지만 구조는 비슷해요.

    한국은 광복 이후 70년간 열심히 땀 흘렸습니다. 어느 나라나 시대적 조건과 국가의 의제(agenda)가 일치해야 발전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독립 후에는 건국, 건국 후에는 경제적 토대를 갖춰야 했기에 산업화, 산업화로 변화한 계급구조의 재조정이 필요했기에 민주화에 나섰습니다. 사회적 조건과 국가의 의제가 잘 맞은 터라 지금과 같은 번영을 이뤄냈습니다. 국가 의제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소란과 잡음이 있었으나 어찌됐든 완수했습니다.



    물들이지 않은 명주처럼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시대의 반역자 키워낼 터”

    물들이지 않은 명주처럼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사실 선진국에서 세운 틀, 기준을 수행하기만 해도 민주화 단계까지는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의 틀에 갇히기도 합니다. 한국은 지금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민주화 너머의 단계로 나아갈 다음 의제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죠. 다음 의제를 선진화라고 해봅시다. 선진화는 창의적 단계죠. 생각하는 힘을 갖춰야 합니다.”

    그는 선진국을 ‘생각을 선도하는 나라’라고 정의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하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선진국 여부가 갈라집니다. 새로운 생각이 선도력(先導力)이 돼 선진하게 되는 거죠. 한국은 패스트팔로어(fast follower)로서 남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은 잘해왔지만, 더는 이런 식으로 해선 안 되죠. 굳어버린 신념과 이념, 가치관을 따르는 ‘일반명사’로 살지 말고, ‘고유명사’로 살아야 자신만의 독립적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건명원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다. 올해 3월 4일 문을 열었다. 원장인 그와 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 김개천 국민대 교수(건축학) 등이 교육과정을 짰다. 19~29세로 지원 자격을 제한했는데도 10개월(3~12월) 과정 1기 모집에 900명 넘게 원서를 냈다. 에세이, 압박면접 등을 통해 30명을 선발했다. 수업료, 교재비는 없다. 오정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이 사재를 내놓았다.

    建明苑을 풀어 읽으면 ‘밝은 빛을 세우는 터전’이다. 명(明)은 해(日)를 해로만 보거나 달(月)을 달로만 보는 분리의 시각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하나의 사건으로 동시에 장악하는 능력이다. 구획된 공간을 뜻하는 ‘園’ 대신 열린 공간을 가리키는 ‘苑’을 썼다.

    ▼ 계획대로 잘 이뤄집니까.

    “잘됩니다. 당장 효과가 날 일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우리가 가진 답답함이나 혼란은 남의 생각을 좇는 일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방증입니다. 창조력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 다시 말해 인문(人文)을 파악하는 능력으로부터 발휘됩니다.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삶의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세계를 들여다보는 방식이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궁금해하는 데서 창의력, 상상력이 발휘됩니다. 건명원이 배출한 ‘창의 전사’가 대한민국을 견인할 날을 꿈꿔봅니다. 시대의 반역자를 키워내는 게 가능하냐고요? 가능성은 대개 기존의 틀을 근거로 따지게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꿉니다. 우리의 꿈은 기존의 틀을 벗어난 미래에 있습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에요”

    배움에 빠지지 말라

    ▼ 건명원이라는 명칭에서 노자의 향기가 납니다. 노자는 ‘내 밖’을 아는 것을 지(智), ‘나’를 아는 것을 명(明)이라고 했습니다. 지(智)는 덜어내거나 버릴 것으로 비판했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립면의 상호 관계와 변화로 이뤄졌습니다. 지(智)는 일단을 도려내 그것만 아는 겁니다. 해를 해(日)로 알고, 달을 달(月)로 아는 게 ‘지’예요. 해와 달을 하나의 사건으로 동시에 장악하는 능력이 명(明)입니다. 사랑을 사랑으로만 이별을 이별로 만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이별을 하나의 사건으로 동시에 장악해야 진실에 더 깊이 있게 다가가고 성숙한 태도를 취합니다.”

    ▼ 노자는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絶學无憂)”고 했습니다. “성(聖)을 절(絶)하고 지(智)를 버리면 민리(民利)가 백배(百倍)하리라”고도 했고요.

    “무식해지라는 게 아니라 배움에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맹자도 서경을 완전히 믿는 것은 차라리 서경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말합니다. 세계를 단편적으로 포착해 진리화한 지적 체계, 남이 만들어놓은 신념·이념·가치관에 갇히면 그것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정지해 멈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헤겔이 말한 대로 철학은 그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체적 세계와 움직이는 삶을 관념으로 포착할 자질을 갖춰야 창의력, 상상력이 발휘됩니다. 이데올로기화한 체계를 고정적으로 신봉해선 안 된다는 게 배움을 끊으라(絶學)는 말에 담긴 뜻이라 하겠습니다.”

    노자는 절학무우(絶學无憂)가 담긴 장에서 이렇게 썼다.

    나 혼자 조용하구나,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혼돈스러운 모습이구나. 마치 웃음도 아직 배우지 못한 갓난아기 같다. 축 처져 있구나,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 나만 홀로 부족한 듯하다. 나는 어수룩한 마음을 가졌구나! 우매하고도 우매하다! 세상 사람들은 분명한데, 나만 홀로 어둑하구나. 세상 사람들은 자세히도 살피는데, 나만 홀로 어눌하구나. 고요하도고 깊구나, 마치 바다와 같다. 바람결 같구나, 어디에도 매임이 없다.

    ‘고유명사’로 살아가기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갓난아기 같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수수하다.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素)과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樸)을 가졌다.

    ▼ 다들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합니다. 이념 다툼도 거세고요. 욕망을 채우려는 경쟁의 강박도 심합니다. 물들이지 않은 명주,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사는 게….

    “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적 체계가 이데올로기화한 것이 유위(有爲)입니다. 이념에 매이는 순간 생각은 고정됩니다. 이념으로 세상을 보면 변화하는 세계를 만나지 못합니다. 이념에 의해 조정되고 그것에 지배당하는 겁니다. 기존의 이념이나 신념에 따라 봐야 하는 대로 봐서는 안 됩니다. 보이는 대로 보라는 것이 노자의 가르침이에요. 갓난아기는 봐야 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그것이 무위(無爲)입니다. 노자는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면서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했습니다. 창조력은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을 때 발휘됩니다.”

    노자는 세계를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관계’로 이뤄진 것이라 봤다. 세계는 관계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화하므로 생각을 틀 안에 가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묻는다.

    “당신은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입니까. 자기 꿈의 실현자입니까. 당신은 바람직함을 수행하며 삽니까. 바라는 걸 실행하면서 삽니까. 당신은 우리 중에 한 명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

    그러고는 조언한다.

    “나는 내 윤리적 행위의 고유한 입법자다, 내 윤리적 삶은 나로부터 나온다, 내 삶의 원동력은 내가 작동시킨다, 나는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살아가겠다, 사회가 이런 결심을 한 개별자들의 총합일 때 역동적이고 건강해진다는 게 노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지혜입니다.”

    흑묘백묘에 담긴 노자 철학

    ▼ 건명원은 이념의 수행자가 아닌 꿈의 실현자, 역동적인 ‘창의 전사’를 키워내겠다고 밝힙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를 의제로 내놓았는데, 대통령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도 ‘창조경제’의 뜻을 잘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국방부는 ‘창조국방’을 한다더군요. 창조경제를 두고 선언은 있으나 처방은 없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창조력,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입니다. 발휘하는 것이라면 내일부터라도 맘먹고 그렇게 하면 되겠죠. 하지만 발휘하려고 해도 발휘되지 않는 것이 창의력입니다. 그래서 난도가 높은 거예요. 창의력은 발휘될 수 있는 준비가 됐을 때 내면에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산업화 시대의 사고로는 발휘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민주화 시대의 사고로도 발휘되기 어렵습니다. 민주화가 민주적 자발성에 근거하기보다는 이념화했기 때문입니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모두 앞선 나라를 따라가는 일이었지요. 창의력이 튀어나오는 문화적 조건, 철학적 환경, 자유로운 기풍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창의력이 발휘되는 수준에 도달하면 그게 바로 선진화 단계입니다. 기존의 단계와는 차원이 달라요. 창조력이 발휘되려면 내면이 독립적 자발성으로 꽉 차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대답은 잘하는데 질문은 잘 못해요. 궁금증, 호기심이 적은 겁니다. 독립적 자발성은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인 궁금증, 호기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창조력은 선언이나 구호가 아니라 세상을 예민하게 바라보면서 궁금증, 호기심을 발동할 때 발휘됩니다. 산업화나 민주화 시대의 이념에 갇혀서는 창의력이나 창조성이 발휘되는 미래를 열지 못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공자의 철학은 산업화 시대에 걸맞고, 노자의 사상은 21세기와 잘 맞는다”고 말했다.

    “유가는 국가권력을 강화해 민간을 이끌어가는 이념입니다. 노자는 국가 권력을 줄이고 민간의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지방자치는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과 잘 맞습니다.”

    ▼ 놓아둠의 다스림?

    “그렇죠. 규율과 규제를 최소화하는 겁니다. 이념적 지배를 거부하죠. 덩샤오핑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 전형적 노자 사상이에요. 반면 마오쩌둥은 전형적으로 유가적이었죠.”

    ▼ 도덕경을 읽다보면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보드리야르 같은 포스트모던 철학자가 떠오릅니다.

    “맞아요. 동양의 유학과 서양의 모더니즘이 실체론 혹은 본질론에 가깝다면 노장(老莊) 사상은 관계론에 속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불교가 노자의 생각과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가치론적 판단 기준을 걷어내고 세계를 사실 그대로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입니다. 가치가 사라지면 사실만 남습니다. 불교는 만물이 서로 관계돼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고통스러운 이유를 집착에서 찾는데, ‘더 좋은 것’ ‘진짜’라고 가치판단을 하기에 집착하는 겁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사실을 가치관이나 이념의 틀에 가두는 것이 소유(所有), 그런 틀을 벗어버리는 것이 무소유(無所有)입니다.”

    노자가 공자를 꾸짖다

    맹자는 사단(四端)을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본성으로 여긴다. 사람이 이런 본성을 가진 터라 인의예지를 실현하고 완성할 수 있다고 봤다.

    ▼ 노자는 공자가 강조한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비판적이더군요.

    “중국 역사는 노장(노자·장자)과 공맹(공자·맹자)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호 긴장을 통해 발전해왔습니다. 유가에서 예(禮)는 공자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여긴 인(仁)을 확장하고 보편화하는 수단입니다. 예라고 하는 체계를 틀로 삼아 백성을 통합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고 한 것이죠. 노자는 인의예지 중에서도 특히 예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노자의 시각에서 예는 누구나 지켜야 하는 사회적 기준입니다. 보편적 이념으로서 예가 기준으로 작용해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별자들의 자발적 생명력이 발휘되기 힘들어져요.”

    노자는 공자의 기획이 비록 인간성을 바탕으로 하는 도덕적 선으로 채워져 있어도 보편적 이념을 기준으로 삼아 구성원들을 통합하려고 시도하는 한 차등, 갈등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형태라고 봤다. ‘도덕경’을 통해 공자를 이렇게 꾸짖는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조선왕조 통치 이데올로기이던 주자학의 시조 주희(朱熹·1130~1200)는 공자의 사상을 극기복례(克己復禮) 4자로 압축한다. ‘나’를 극복해 ‘예’로 돌아간다, 요컨대 인간의 본성(仁)을 바탕으로 보편적 기준(禮)을 확보해 백성을 통합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고 봤다.

    물들이지 않은 명주처럼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최진석 교수가 건명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틀을 섬기지 말라

    최진석 교수의 표현을 가져오면 극기복례로 사는 삶은 ‘일반명사’로 사는 것이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다. 진영논리에 매몰돼 사안을 들여다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진영은 ‘우리’라는 집단이 만든 울타리다. 원효(元曉·617~686)의 화쟁사상을 민중 속에서 실천하려는 도법(道法) 스님은 “한쪽은 무조건 나쁘고, 한쪽은 무조건 옳다는 건 관념이다. 한국 사회는 실제가 아닌 관념을 두고 편을 나눠 다툰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한다. 노자는 극기복례에 대항해 거피취차(去彼取此·#129;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하라고 역설한다. ‘저것’은 예(禮)로 상징되는, 문화적으로 설정된 체계다. ‘이것’은 체계의 영향이 닿지 않은 ‘순전한 자기 자신의 자발적 영역’을 가리킨다.

    ▼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의 뜻은 뭔가요. ‘하지 않음을 함’ 정도로 해석하면 됩니까.

    “무위는 위(爲)의 일종입니다. 유위(有爲)적 위는 보편적 이념을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무위적 위는 자연이 ‘스스로 그러하듯(自然)’ 자발성을 근거로 해 행동하는 것이고요. 예를 들어,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죠. 그런데 이 꿈이 기준이 되는 순간, 이 사람은 정치 영역을 넓게 보지 못하고 대통령이 되는 데에 좋은지만 따져서 보게 되죠. 그래서 대중의 뜻과 괴리되는 엉뚱한 짓을 합니다. 무위는 남이 정해놓은 것이든 자기가 정해놓은 것이든 어떤 틀을 섬기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

    ▼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말합니다. 성인은 어질지 않다(不仁)고도 하고요.

    “자연에서 비가 내릴 때 착한 사람 밭에는 비가 더 내리고, 나쁜 사람 밭에는 비가 덜 내립니까. 자연의 운행에는 주관적 편견이 개입돼지 않습니다. 주관적 관념에 따라 화복, 선악, 미추,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노자는 자연의 운행 원칙을 본받아 인간의 길을 구성하려 했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하늘과 땅처럼 무심하게 지켜볼 뿐, 이상적이라고 믿는 자신의 뜻을 강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을 집행하는 통치가 아니라, 세계의 흐름에 맡기는 통치를 하죠. 세계의 흐름은 정치인 머릿속에는 없고, 백성 틈에 숨어 있어요. 한국 정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각자 옳다고 믿는 진영논리에 빠져 진영이 제공하는 시각으로만 무장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데에만 빠져 있습니다. 자신이 믿는 관념에 따라 사안을 재단하고 그것을 남에게도 따르라고 강권합니다.

    노자는 천장지구(天長地久·하늘과 땅은 영원하다)라고 했습니다. 문화적으로 결정된 이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즉 천지자연의 운행 원칙을 따라야 장구(長久)하다는 것입니다.”

    물들이지 않은 명주처럼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최진석 건명원 원장은 “노자 철학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상”이라고 강조했다.

    노자는 천장지구(天長地久)가 담긴 장에서 이렇게 설파했다.

    천지자연은 장구하다. 장구하는 까닭은 그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장생한다. 성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오히려 앞서고, 자기를 도외시하기에 오히려 자신이 보존된다. 그것은 사적인 기준이나 의욕을 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능히 그 자신을 완성할 수 있다.

    ▼ 노자는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도 강조합니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말고, 일이 이뤄졌으면 물러나고, 이루나 거기에 기대려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가 하면, 누구와 겨루거나 다투지 않음으로 세상 누구도 그와 다투지 않는다거나 물러서면 앞서고 숨으면 빛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세상보다 앞서려 하지 말라고도 했고요. 도(道)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한 다듬지 않은 통나무, 물들이지 않은 명주, 어린아이, 물, 계곡, 낮은 곳, 단순하고 꾸밈없는 삶에서는 소극적이거나 현실도피적이라는 느낌도 묻어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예요. 노자의 철학은 그가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상입니다. 담박하고 꾸밈없는 삶을 계속 따라가면 천하를 차지한다는 게 노자의 생각입니다. 대통령병(病)에 걸린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못하지만, 대통령이 되려는 꿈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더 넓고 높은 차원에서 시대의식을 붙잡고 거기에 헌신하려는 사람은 대통령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담박하고 꾸밈없는 행동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런 의미를 종합해 노자는 ‘무위하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고 했습니다.”

    이 구절의 바로 앞 문장은 이렇다.

    장차 접고 싶으면 먼저 펴주어야 한다. 장차 약화시키고 싶으면 먼저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장차 폐지하고 싶으면 먼저 잘되게 해줘야 한다. 장차 뺏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명(微明·미묘한 밝음)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고기는 물을 떠나면 안 되고,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들을 교화하려 하면 안 된다.

    이 단락은 정적이나 경쟁자를 상대할 때의 음모로도 읽힌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은 도덕경 전체를 관통하는 열쇳말 중 하나다.

    ‘1등’ 아닌 ‘1류’ 지향하라

    ▼ ‘다투지 말라, 낮추라, 내세우지 말라, 적당할 때 멈춰라, 선하지 않은 것도 선하게 여겨라, 수모를 당해도 그러려니 하고 칭찬을 들어도 수모를 당했을 때와 똑같이 여겨라’ 등의 내용은 처세술로도 읽힙니다.

    “처세술이라고 하면 나쁘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이 처세를 못한다면 완숙하지 않은 거죠. 처세술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처세라고 폄하하기보다는 삶의 기술로 봐야겠죠.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성적 높이만큼 사는 겁니다. 선한 사람에게 선으로 대하지만 선하지 않은 것에도 선하게 대한다는 것은 이분법을 부정한 겁니다. 선악을 하나의 기준으로 갈라 보지 않고, 한 쌍의 유동적 관계성으로 파악하는 거죠. 화복, 선악, 미추는 시대와 관념에 따라 기준이 달라집니다. 다투지 않음으로 온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다는 말은, 경쟁구도 속에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안에 갇히는 순간 같은 수준에서 옥신각신할 수밖에 없죠.

    피터 틸이 쓴 ‘제로 투 원’에 ‘경쟁하지 말고 독점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독점이라는 표현이 노자와 맞는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경쟁구도 속에 들어선 순간 모두가 하나의 폐쇄적 체계를 형성해버리죠. 그 안에서 제일로 잘해봐야 1등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1류가 필요합니다. 경쟁구도를 벗어나 자기만의 독특한 게임을 할 때 비로소 1류가 됩니다. 1류가 되려는 사람은 이미 있는 경쟁구도에 들어가려 애쓰지 않고, 새로운 경쟁구도를 생산해요. 경쟁하지 않으니 상처나 허물이 생기지 않죠. 창조경제란 1등이 아니라 1류가 되는 경제 아닐까요.”

    도덕경 66장을 보자.

    강과 바다가 온갖 계곡 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잘 낮추기 때문이다. 이러하기에 백성들 위에 서고 싶으면 반드시 자신을 낮추는 말을 써야 하고, 백성들 앞에 서고 싶으면 반드시 자신을 뒤로해야 한다. (…) 이렇게 하여 그는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 천하가 그와 다툴 수 없다.

    ▼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구도에 들어갔는데, 틀을 벗어나면 두려움이 생기지 않을까요.

    “옹색한 두려움이죠. 내면의 지성을 발휘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노자가 말한 대로, 수준 낮은 선비가 도(道)를 들으면 비웃어버려요. 중급의 선비는 긴가민가하고요. 상급의 선비는 도를 믿고 따릅니다.”

    두려움 감당할 용기

    ▼ 현대사회의 선비를 양성하는 대학이 시대의 변화를 따르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대학은 지식을 관장하는 곳이라 앞서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훈고(訓고)의 기풍에 갇혀 있습니다. 남이 해놓은 것을 따지고 분석하는 일로 잘 먹고 살았습니다. 훈고의 시대에서 창의의 시대로 나아가려면 대학부터 변해야 합니다. 변화하려면 두려움을 감당하는 용기가 필요한데, 대학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학이나 사회나 기업이나 학생까지 모두 변화보다는 안전한 현상 유지를 지향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큽니다.”

    ▼ ‘대중 인문학 열풍’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최고경영자(CEO) 대상의 고급 강좌도 많고요.

    “CEO들이 오히려 철학적이더군요. 절박하게 생존을 고민하고, 인간의 동선을 파악합니다. 지식을 쌓는 형태의 인문학은 또 하나의 훈고일 뿐입니다. 노자가 자연을 관찰하며 세계의 실제를 포착해냈듯 지식이 탄생하는 그 순간의 높이에 도달하는 게 중요합니다. 남이 생각한 결과를 익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져야 해요.”

    돈을 중심으로 한 세속적 성공을 향한 탐닉이 남의 욕망을 좇고 남이 인정하는 삶을 살게끔 한다고 그는 말했다. 부모는 자신이 생명을 선사한 자식에게마저 생명의 활기보다는 사회가 선호하는 욕망을 가르치려 한다.

    노자는 묻는다.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족할 줄 아는 데서 느끼는 만족이 영원한 만족이며, 낳았으되 소유하지 않는 어머니처럼 자애하며, 갓난아이처럼 담박하게 살면서 세상에 앞서려 하지 말라고 노자는 가르친다. 마음속에 하나의 기준을 가지면 딱딱해질 것이나, 산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뻣뻣하다. 일반명사 속으로 용해돼 사라진 ‘나’를 되찾아 고유명사로 살려내라는 게 노자가 들려주는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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