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호

조선의 마지막 국새에 누가 낙서를 새겼나 [명작의 비밀]

국난마다 국민과 함께 상처받아 온 문화재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1-08-08 10: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일본과 미국이 훔쳐간 국새·어보

    • 일제강점기, 6·25 거치며 대거 불법 유출

    • 2014년 본격적으로 국내 반환 시작했지만

    • 유출된 유물, 훼손된 경우도 많아

    문화재청은 6월 28일 ‘국새 대군주보’를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6월 28일 ‘국새 대군주보’를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문화재청 제공]

    국새(國璽) 4점이 보물로 새로 지정된다. 1882년에 제작한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와 대한제국 시대에 제작한 ‘국새 제고지보(制誥之寶)’ ‘국새 칙명지보(勅命之寶)’ ‘국새 대원수보(大元帥寶)’. 모두 조선의 국운이 쇠하던 시기에 만들어졌고, 해외로 불법 반출됐다가 돌아온 것들이다. 제고지보, 칙명지보, 대원수보는 1946년 일본으로부터 돌아왔고 대군주보는 2019년 미국으로부터 돌아왔다.

    행방불명된 국새 8점

    한일강제병합 7개월 후인 1911년 3월 조선총독부는 그동안 빼앗아둔 대한제국 국새 가운데 8점을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상납했다. 그러나 광복 후인 1946년 8월 15일 미군정(美軍政)은 국새를 되찾아왔고 1948년 정부 수립 후 우리에게 인계했다. 이승만 정부 총무처는 되찾은 국새들을 1949년 1월 국립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했다, 전시명은 ‘구 한국 옥새와 조약문서 전람회’였다.

    하지만 환수의 기쁨도 잠시, 국새 8점은 6·25전쟁을 거치며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어떤 기록도 없었고 정황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 1954년 제고지보, 대원수보, 칙명지보가 부산의 경남도청 금고에서 발견되었다. 이것들이 바로 이번에 보물로 지정되는 국새다.

    사라졌던 국새의 이동 경로에 대한 기록은 없다만,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수도를 옮긴 정부는 1950년 8월부터 1953년 8월까지 경남도청(지금의 동아대 석당박물관 건물)을 임시청사로 사용했다. 그때 국새 8점을 경남도청으로 옮겨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1953년 환도하면서 그 중요한 국새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3점이 금고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부산으로 가져가 나름대로 보관하려고 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도 서울로 돌아올 때 이를 빼먹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총무처의 나태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1954년 6월 국새 3점은 국립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1911년 일본 도쿄로 불법 반출된 이후 1946년 서울로, 1950년 부산으로, 1954년 다시 서울로 옮겨 다녀야 했던 3점의 국새. 한국 근대사의 수난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물이 아닐 수 없다.

    1954년 경남도청 금고(현 부산 사하구 동아대 석당박물관)에서 발견된 제고지보. [문화재청 제공]

    1954년 경남도청 금고(현 부산 사하구 동아대 석당박물관)에서 발견된 제고지보. [문화재청 제공]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거치며 대거 유실

    국새와 어보(御寶)는 같은 듯 다르다. 국새는 왕권 국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외교문서나 행정문서 등 공문서에 사용한 실무용 인장이다. 이와 달리 어보는 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거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 인장이다. 조선시대(대한제국 포함)에 제작된 국새와 어보는 412점. 하지만 현재 73점은 행방불명 상태다. 대부분의 국새와 어보는 종묘와 덕수궁 등에 보관했으나 그중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빼앗겼고 6·25전쟁 전후에는 미국에 도난당했다.
    동아일보 1952년 4월 27일자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서울지구 계엄민사부에서는 24일 4시경에 또다시 세 번째의 옥새를 발견하였다. 시내 모 은방에서 미군 관계자의 부탁으로 옥새를 감정 중이라는 정보를 얻은 서울계엄민사부에서는 즉시 동 은방으로 출동하여 옥새를 압수하였다 한다.”

    국새와 어보는 과거 왕실 즉 정부의 소유물이다. 개인이 소유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이것이 시중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매매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미군이 금은방에 국새(옥새)를 들고 와서 감정을 받고 있다니…. 이 기사를 통해 종묘와 덕수궁 등에서 보관해 오던 국새와 어보 가운데 일부를 미군들이 훔쳐갔음을 알 수 있다. 6·25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부 미군들이 국새와 어보를 훔쳐 미국으로 가져간 것이다. 우리의 국새와 어보가 미국에 많이 있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미군들이 국새와 어보를 한국인에게 팔아넘겼을 수도 있다. 동아일보 1952년 5월 21일자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서울지구에 옥새 두 개가 또 발견되어 방금 한국은행 서울분실에서 보관하고 중이니…하나는 왕인(王印)이고 하나는 왕후인(王后印)인데…한편 의뢰를 받은 문교부 당국에서는…개인집에서 미군이 발견한 것이니만큼 과연 새로 발견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과거 국립문화시설에서 보관 중이던 것이 6·25사변의 와중에 시장으로 흘러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속속들이 귀국 중인 불법 반출 국새·어보

    미국으로 불법 반출된 국새와 어보가 처음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87년이었다. 미국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던 민속인류학자 조창수는 당시 어보가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포들과 힘을 합쳐 돈을 모았고 고종 어보 2점, 명성황후 어보 1점, 철종비 철인황후 옥책(玉冊) 1점을 구입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2008년엔 고종의 ‘황제어새(皇帝御璽)’가 돌아왔다. 1901~1903년 제작된 것으로, 고종이 주로 비밀 외교문서에 날인했던 국새다. 문화재청이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했으며 이듬해인 200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011년 6월엔 성종비 공혜왕후 어보(1496년 제작)가 국내의 미술품 경매에 나오기도 했다. 미국으로 불법 유출되었다 국내의 한 소장가가 198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8만 달러에 구입한 뒤 국내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당시 경매는 화제와 함께 뜨거운 논란이 되었다. 불법 유출 문화재가 국내 경매에 나오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경매에 참가해 4억6000만 원에 낙찰받았다. 해외로 빠져나간 국새와 어보를 되찾아오는 것이 쉽지 않던 상황에서 이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것이다. 공혜왕후 어보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2014년경 국새와 어보 환수는 전기를 맞이했다. 2014년 9점, 2015년 1점, 2017년 2점…. 적잖은 양의 국새와 어보가 미국으로부터 속속 반환됐다.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면서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이 압수해 소장하고 있던 국새와 어보, 왕실 사인(私印) 등 9점을 우리에게 반환했다. 국새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제작한 ‘황제지보(皇帝之寶)’였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덕수궁에서 불법 반출한 것으로, 2013년 11월 HSI에 압수된 상태였다.

    2017년 8월 국립고궁박물관은 환수한 국새·어보를 모아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특별전을 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2017년 8월 국립고궁박물관은 환수한 국새·어보를 모아 ‘다시 찾은 조선 왕실의 어보’ 특별전을 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도난당한 문화재 되찾을 법적 근거 있어

    2015년에 4월엔 덕종어보(1471년 제작)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미국 시애틀미술관 한 후원자가 1962년 뉴욕에서 구입해 1963년 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이 어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외에 반출될 수 없는 유물이란 점을 들어 2014년 7월부터 시애틀미술관 측에 반환을 요청했다. 시애틀미술관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협상에 참여했고 이사회와 기증자 유족의 승인을 얻어 9개월 만에 반환이 성사됐다.

    2017년 7월엔 중종비 문정왕후 어보(1547년 제작)와 현종 어보(1651년 제작)가 돌아왔다. 이 어보들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 미국인이 일본에서 구입해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정왕후 어보는 2000년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이 구입해 소장해 왔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0년부터 문정왕후 어보 반환운동을 펼쳤고 3년간의 노력 끝에 2013년 9월 LACMA로부터 반환 약속을 받아냈다.

    또한 문화재청은 미국 HSI에 현종 어보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고 이에 따라 2013년 HSI는 현종 어보와 문정왕후 어보를 모두 압수해 보관해 왔다. 두 어보에 대한 수사 절차는 2017년 6월 마무리됐고 한 달 후인 7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길에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다른 나라에 약탈당한 문화재를 돌려받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국새와 어보가 미국으로부터 속속 돌아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미국에서는 특정 물품이 불법 점유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이의 소유권이 박탈당한다. 따라서 국새와 어보가 불법 유출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만 하면, 국새를 가지고 있던 미국인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2014년 문화재청이 미 국토안보국(DHS) 소속 이민관세청(ICE)과 ‘한미 문화재 환수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한 것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법 반출 문화재 수사를 하는 HSI는 이민관세청 소속이다. 이에 따라 불법 반출 문화재로 확인되면, 모두 한국으로 반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군주보의 뒷면에는 ‘W.B.Tom’이라는 글씨가 음각돼 있다. 대군주보를 소유했던 미국인이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대군주보의 뒷면에는 ‘W.B.Tom’이라는 글씨가 음각돼 있다. 대군주보를 소유했던 미국인이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2019년 12월에도 국새 한 점과 어보 한 점이 돌아왔다. 한 재미교포가 국새 ‘대군주보’와 효종 어보(1740년 제작)를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그는 이것들을 1990년대 경매에서 구입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한 점인 대군주보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되는 것이다. 대군주보는 1882년 제작됐고 높이 7.9cm, 길이 12.7cm이다. 외교 문서, 법령 등에 날인했던 국새로, 통상조약 업무 담당 전권대신을 임명하는 문서(1883년)에 실제 날인된 예도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제작 시기인 1882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해 고종은 국기와 국새를 만들도록 명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 상징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영효는 태극기를 만들었고 새로운 국새를 6점 제작했다. 중국으로부터 조선국왕이란 글자가 들어간 국새를 받는 대신 ‘대(大)조선국 군주’라는 의미로 대군주보를 만든 것이다.

    조선 국새에 새겨진 미국인 이름

    대군주보는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더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19세기말 시대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여기엔 고종의 꿈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조선의 국운은 점점 더 쇠락해져 갔다.

    그런데 우리 품에 돌아온 ‘대군주보’에서 특이한 점이 발견됐다. 뒷면에 ‘W B. Tom’이라는 영문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송곳이나 칼같이 예리한 도구로 글자를 새긴 것이다. 그것은 분명 미국인의 이름이었다. 이 국새를 갖고 있던 미국인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 틀림없다. 국새에 새겨진 Tom이라는 미국인 이름. 치욕의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치욕이 어디 이뿐인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되는 국새 대군주보를 보면 경복궁 자선당(資善堂) 석축과 법천사 지광국사탑이 생각난다. 1915년 일본인 오쿠라는 경복궁 자선당 건물을 해체해 일본 도쿄로 불법 반출했다. 조선총독부의 묵인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도쿄에 자선당 건물을 다시 세운 뒤 ‘조선관(朝鮮館)’이라는 간판을 달고 미술관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때 목조건물이 불에 타버리고 기단부인 석축만 남게 됐다. 그 후 자선당의 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그러던 중 1993년 건축사학자인 김정동 전 목원대 교수가 일본 도쿄의 오쿠라(大倉)호텔 경내에 이 석축이 방치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자선당 기단부 석축은 1996년 국내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석축은 훼손 상태가 매우 심각했다. 자선당 복원에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자선당 복원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뒤편에 외진 곳에 보존해 놓고 있다. 자선당 석축의 돌들은 거의 모든 부위가 깨져 있다. 대지진 때의 충격일 것이다. 특히 계단의 난간석이 두드러진다. 고국 땅에 돌아왔지만 상처는 여전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옮겨져 훼손된 경복궁 자선당 석축. [문화재청 제공]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옮겨져 훼손된 경복궁 자선당 석축. [문화재청 제공]

    국새·어보 말고도 국난 함께 겪은 문화재들

    국보로 지정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11세기)도 비슷한 고초를 겪었다. 지광국사탑은 고려의 승려 지광국사(984~1067)의 승탑으로, 지광국사탑비(국보)와 함께 한 쌍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서로 떨어져 있다. 이 탑은 1911~1912년 일본인 세 명의 손을 거치며 서울로 옮겨지고 이어 일본 오사카로 불법 반출됐다. 우여곡절 끝에 1915년 돌아왔으나 이 탑이 자리 잡은 곳은 원래 장소가 아니라 서울의 경복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경복궁에서 여러 전각을 파괴하고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지광국사탑을 경복궁 행사장에 장식용으로 세워놓았다. 그 후 6·25전쟁 때 폭격을 당해 몸체 일부만 남고 상륜부와 옥개석(지붕돌)이 처참하게 부서졌다. 1957년 시멘트를 이용해 부서진 조각들을 붙이고 시멘트로 채워 넣는 보수가 이뤄졌다. 1950년대 그 가난하던 시절이었으니 보수라고 해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지광국사탑은 상태가 점점 악화되었고 끝내 해체 수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문화재청은 2016년 지광국사탑을 전면 해체했고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수보존 처리에 들어가 현재 마무리 단계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이 승탑을 어디에 세울 것인지를 두고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졌다. 결론은 고향땅 원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식민통치와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지광국사탑. 100년의 수난과 유랑을 마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 원래 한 짝이었던 지광국사탑비와의 재회도 이뤄질 것이다.
    지광국사탑은 이제 그 상처가 조금은 아무는 듯하다. 그러나 자선당 석축은 상처가 여전한 것 같다. 자선당 석축이 현재 위치한 곳은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돼 불태워진 건청궁 녹산(鹿山) 바로 옆이다. 그래서 더더욱 처연한 생각이 든다.

    국새에 남겨진 상처의 의미

    돌아온 국새와 어보. 그것은 왕실과 정부의 권위이지 상징이었다. 우리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와중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모를 겪어야 했다. ‘대군주보’에 예리하게 새겨진 영어 알파벳 다섯 글자, W B TOM. 그것을 볼 때마다 살갗이 에이는 듯하다. ‘대군주보’의 상처는 참으로 깊지만 끝내 살아남아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아 보물이 됐다. 저 상처는 언제쯤 아물 수 있을까. 100년이 흘러 저 상처가 잘 아물게 된다면, 그때는 우리에게 더한 감동을 줄 것이다.

    #국새 #문화재환수 #명작의비밀 #신동아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