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진료비 대신 내주는 실손보험
환자는 의료 쇼핑, 병원은 과잉 진료
개원의 월급, 대학병원 교수의 2~3배
의료 인력은 저위험·고수가 진료로 몰려
보험 고쳐야 필수 의료 인력 늘어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와 전국의과대학교수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가 10월 3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인근 용산전쟁기념관 앞 광장에서 ‘전국 의과대학 교수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동아DB]
양측의 주장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면 참 이상하다. 의사가 부족하다는데 번화가엔 편의점보다 많은 것이 의원이다. 수가가 낮다는데 의사 연봉이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는 거의 매년 나온다. 결국 한정된 의료 자원이 잘못 배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핵심 원인에는 실손(실비)보험이 있다. 단언컨대, 실손보험은 대한민국 의료를 왜곡되게 만든 장본인이다.
과잉 진료 시발점 된 실손보험
실손보험은 왜 도입됐을까. 급여 본인부담금이 높아 질병에 대비하려는 사람이 많아졌고,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비급여 의료비에 대한 수요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에 보험업계는 비급여 진료는 물론 건강보험 급여 진료의 자기부담금까지 보장해 주는 1세대 실손보험 상품을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3년 당시 보건복지부와 의료정책 전문가들은 “가입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반대했지만 보험업계는 비급여 진료만으로는 시장 규모가 작다고 주장해 결국 금융위원회가 허가해 줬다. 환자들은 명의로 소문난 의사와 좋다는 치료를 마음껏 쇼핑하기 위해, 의사들은 저수가에 허덕이는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실손보험이라는 ‘선악과’를 따 먹었다.
실손보험의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계약 건수가 2006년 1000만 건, 2009년 2000만 건, 2022년 4000만 건을 돌파해 사실상 ‘전국민 사보험’ 즉 ‘제2의 건강보험’으로 자리 잡았다. 실손보험은 그렇지 않아도 병원 문턱이 낮았던 대한민국에서 병원 접근을 더욱 쉽게 만들어 평균수명과 각종 질병의 치료 성공률 항목에서 세계 수위권에 들게 만들었고, 의료 시장의 성장이라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명보다는 암이 컸다. 환자의 의료 쇼핑과 병원의 과잉 진료라는 도덕적 해이가 나타났다. 환자들은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았다. 병의원에서는 백내장 수술이 필요 없는 환자에게도 수술을 하고 시력교정용으로 비싼 비급여 인공수정체 삽입술을 감행했고, 실손보장금으로 자기공명영상장치 MRI 같은 고가의 비급여 검사를 하기 위해 입원하는 일도 흔하게 벌어졌다.
심지어 병원과 짜고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뒤 환급받은 비용을 병원과 나눠 가지거나 실손보험으로 보장되지 않는 미용 진료를 하고 도수치료를 했다고 청구하는 보험 사기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실손보험은 필수 의료 인력의 이탈도 불러왔다. 실패 확률이 있는 수술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는 비급여 시술로 통증만 줄이는 방식이 돈을 더 벌었기 때문이다. 특히 개원의는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게 됐다. 필수 진료를 주로 하는 대학병원 교수 월급과 비급여 진료가 많은 개원의의 월급이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했다. 실손보험이 생기기 전에는 개원의의 월급이 대학병원에 비해 대략 1.5배 높았다. 하지만 실손보험이 생긴 뒤로는 2~3배까지 차이가 벌어졌다. 그렇게 ‘개원 러시(rush)’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개원이 늘었다.
저위험·고수가 진료로 몰린 의료 인력
대한의사협회(의협)가 6월 18일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를 열어 일부 병원이 문을 닫은 모습. [동아DB]
의사들의 소득도 늘어갔다. OECD 집계에 따르면 한국 봉직의 연간 소득은 2010년 약 13만6000달러(약 2억 원)에서 2020년 19만3000달러(약 3억 원)로 증가했다. 이러니 의사들이 “필수 의료 수가를 올려달라” “법률 리스크 개선해달라”고 하소연해도 돌아오는 국민 여론은 “너네 돈 잘 벌잖아”라는 반응일 수밖에 없었다. 그 여론을 따를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다가서지 못했다. 결국 왜곡된 의료 체계는 고쳐지질 않았다. 의사의 소득이 다른 직군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는 인식은 결국 의대 증원 갈등을 불러왔다.
실손보험은 건강보험 재정도 축낸다. 비급여 진료 횟수가 늘어나면서 급여 진료도 같이하는 동시 진료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장염으로 급여 진료를 보며 비급여 영양주사를 맞는다든지, 관절 통증으로 급여 진료를 보고 비급여 MRI를 찍는 식이다. 2016년 대한예방의학회에서 발표된 ‘실손보험 가입이 의료비에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에서 실손보험 미가입자 집단이 의료비 20만7227원을 쓸 때 실손보험 가입자는 84만8426원, 즉 4배 이상을 쓴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건강보험만 가입한 사람들이 실손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의 의료비를 대주고 있는 꼴이다.
저소득층과 고령층의 의료 소외 현상도 심화됐다. 노인층은 기저질환 때문에, 저소득층은 나날이 오르는 실손보험료 때문에 가입 자체가 힘들다. 이런 상태에서 정부에서 응급실 경증 진료 시 본인 부담금을 90%로 상향해 버리면 실손보험 가입자는 아무 상관없이 응급실을 방문할 수 있다. 반면 정작 의료가 필요한 노인층과 저소득층은 자신의 상태가 경증인지 중증인지 모르니 응급실 이용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의료비 통장’ 등 실손보험 대안 내놓아야
상기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의 근원인 실손보험을 고쳐야 한다. 먼저 신규 실손보험 상품의 급여 진료 본인부담을 늘리고 비급여 보장 범위와 수준을 줄여야 한다. 정부에서도 늦긴 했지만 2003년 처음(1세대) 실손보험 도입 당시 자기부담금이 전혀 없는 시스템에서 본인부담금을 점차 올리거나, 갱신 주기를 줄이거나, 도수치료 등의 비급여 항목에 특약을 걸게 만들어 남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개선해 왔다. 최근에는 의료 이용량에 따라 보험료가 할인/할증되는 ‘보험료 차등제’가 적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보험사의 손해율이 급증하는 것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진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다.
실손보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품 설계 단계부터 손을 대야 한다. 금융당국의 허가를 거쳐 시장에 판매되기 전에 비급여 기준·가격 설정 구조에 의료기관이 심사에 참여해야 한다. 의료 시장의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필수 요건이다. 보험 제도의 중요 사항을 결정할 때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의 사전 협의를 제도화하는 등 정부 부처 간 협업 체계도 강화해야 한다.
해외 비급여 관리 사례를 본받자는 의견도 있다. 독일이 1965년부터 도입한 ‘민영 건강보험 급부 수가제도’가 대표적이다. 이 제도는 연방의사조합이 비급여 의료행위의 난이도 등을 감안해 공적 건강보험 수가 수준의 가중치 기준을 정하는 방식이다. 난이도가 평균일 경우 1~2.3배, 난이도가 평균 이상일 경우 의료진이 사유를 설명하고 보험사와 서면 합의를 한 뒤 2.3~3.5배의 가중치를 적용해 수가를 받는다. 이를 통해 고위험 치료 회피 현상을 막을 수 있다. 과잉 진료를 막는 방안도 있다. 대만은 비급여 처방 시 예상 진료비와 사유 부작용 유사 급여 항목 등을 먼저 설명해 동의를 받게 한다. 환자가 이의를 신청할 경우 환불해 주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최근 1년간 실손보험 가입자 중 27%는 진료를 보고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73%는 1년간 단 한 번도 청구하지 않았다. 소수가 과도한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이 상황에 불합리함을 느낀 사람들의 대안이 바로 ‘의료비 통장’이다. 적금에 가입해 매달 일정 수준을 저축하고, 의료비가 필요하면 인출해 사용하거나 의식이 없을 때는 자동으로 결제될 수 있게 해놓는 방식이다. 어떤 병에 걸려도 의료비로 충당할 수 있고, 병에 안 걸리면 저축한 원금·이자는 목돈이 된다. 보험금을 받지 못하면 낸 보험료는 모두 손해 보는 실손보험보다 효율적이다.
미국에서는 ‘의료비 통장’을 구체화한 건강저축계좌(Health Saving Account)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가입자는 1년 동안 건강저축계좌에 최대 3650달러(한화 약 500만 원)를 납입할 수 있고, 의료비 목적으로 인출해 사용할 수 있다. 납입한 금액만큼 소득공제도 받는 혜택이 있고, 중도 인출하더라도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사용하지 않고 남은 금액은 내년으로 이월된다. 매년 복리 이자 혜택을 받고, 투자 소득에 대한 추가 세금도 없어 은퇴를 대비한 장기 저축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바보야 문제는 실손보험이야”
문재인 전 대통령은 3800여 개 비급여 진료 항목을 급여화하는 ‘문재인케어’를 실행했으나 현 정부 들어 대부분 백지화됐다. [동아DB]
이를 해결하기 위해 3800개 항목의 비급여를 급여화하는 ‘문재인케어’가 시행됐다. 하지만 실손보험의 폐단을 그대로 둔 채 급여화를 하니 MRI와 초음파 진료비가 2018년 1891억 원에서 2021년 1조8476억 원으로 오르는 등 과잉 진료로 건강보험 재정만 축내다 폐기됐다.
소득 하위 50% 이하 중심으로 연간 5000만 원 한도 내에서 본인부담 비급여의 80~50%를 지원해 주는 ‘재난적 의료비 지원’도 대상과 규모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우리나라 급여 수가가 싸게 돼 있어도 개인이 가진 의료비 통장으로는 부족할 수 있고, 이런 상황을 정부가 잘 대비해 준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실손보험의 과도한 성장을 막을 수 있다.
의료 체계 왜곡의 주범 중 하나인 실손보험의 부작용을 바로잡지 않고 의료 인력만 늘린다면 실손보험금 공유지를 쟁탈하기 위한 전쟁만 더 심해진다. 국민의 의료비는 더욱 치솟을 것이다. 전문가는 수요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늘어나면 소송이 증가하는 이치와 같다. 그 와중에 필수 의료는 더욱 외면받을 것이다. 그 결말은 건강보험 재정의 고갈로 미국처럼 의료 민영화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건강보험은 대한민국이 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에서 발표한 세계번영지수의 보건의료 분야에서 2위를 차지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미국 전 대통령 오바마를 비롯한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자랑스러운 제도다. 단점이 있지만 조금만 개선하면 1등으로 올라설 수 있다.
그 핵심 과제들이 바로 필수의료 분야의 저수가와 고위험(사법리스크) 그리고 실손보험 문제의 해결이다. 핵심을 비켜나가 ‘의대 교육과정을 5년으로 축소하자’는 등 헛된 땜질 처방만 반복하는 분들께 말하고 싶다. “바보야. 문제는 실손보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