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것이 TV시리즈물 ‘섹스 앤 더 시티’. 카메론 디아즈가 주연한 영화 ‘당신이 그녀라면(In Her Shoes)’과 김혜수 주연의 공포물 ‘분홍신’도 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는 강도를 만나자 ‘시계, 반지 다 가져가도 내 마놀로만은 안 된다’고 말한다. 아이 돌잔치를 연 친구 집에 갔다가 마놀로를 잃어버린 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결혼인지, 자신의 삶인지를 놓고 고민한다. 물론 결론은 결혼이 아니라 마놀로다.
그녀에게 마놀로는 독신, 자유, 뉴욕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구두 ‘마놀로 블라닉’에 대해 한 패션평론가는 ‘영혼이 담긴 구두굽’이라 했으니 과연 신발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 ‘당신이 그녀라면’과 ‘분홍신’의 여주인공들은 억눌린 욕망을 하이힐 쇼핑으로 푼다. 하긴 안데르센의 동화 ‘분홍신’처럼 구두의 마력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당신이 그녀라면’에 나오는 ‘지미추’-요즘 전세계 슈어홀릭이 열광하는-는 다이애나 비가 생전에 무척 좋아했다고 하니 구두와 여성적 판타지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긴 있나 보다.
그러나 구두의 역사를 살펴보면, 슈어홀릭의 역사는 남성이 먼저 썼음을 알 수 있다. 여자 구두는 남성의 구두를 뒤쫓아갔을 뿐이다. ‘풀렌’이라는 긴 신발은 남성의 권력과 부를 상징했다. 구두가 성적 의미를 갖는다는 건 여기서 유래한 듯하다. 패션브랜드 구찌를 키운 것도 남성 슈어홀릭들이다.
왜 슈어홀릭이 생겨날까. 신발은 안목과 취향, 경제력을 한눈에 보여준다. 알랭 드 보통 소설에서 애정에 금이 가는 건 ‘웨지힐’(일명 통굽)에 대한 남녀의 취향 때문이다. ‘당신이 그녀라면’의 주인공은 “예쁜 옷은 뚱뚱한 내게 어울리지 않지만, 하이힐을 신은 내 발은 섹시해 보인다”고 고백한다. 확실히 구두는 거울이 없어도 힐끔힐끔 ‘나’를 보게 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이란 병의 원인이 된다.
슈어홀릭은 ‘다른 건 몰라도 신발만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변의 슈어홀릭을 보면 다른 건 몰라도 가방만은, 속옷만은, 청바지만은, 시계만은, 심지어 와인잔만은…이라고도 말한다. 유독 신발 쇼핑하는 실력만 발달할 리가 없다. 억눌린 욕망 따위는 우아한 변명일 뿐이다. 패션브랜드의 마케팅 전략은 향수-화장품-스카프-구두-백-옷-주얼리-홈데코용품 순으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나와 주변의 쇼퍼홀릭들에게 구두는 충동구매에서 심리적 승인 혹은 한계선이 된다. 모든 쇼퍼홀릭이 슈어홀릭인 한 가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