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하이힐 위에서 사는 법

  • 동아일보 방송사업본부 기자

    입력2009-12-09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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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힐 위에서 사는 법

    하이힐의 시련

    이런저런 사정으로 요즘 여유 있게 쇼핑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 11월에 서울 시내 각 백화점이 성탄과 연말연시를 위한 외관 장식을 선보이자 난 막장 드라마의 기억을 상실한 여주인공처럼 불현듯 내가 쇼핑했던 시간들을 기억해냈다.

    원더풀 월드! 브뤼겔의 풍경화처럼 이렇게 몽롱한 풍경 속에 내가 있었는데!

    백화점이 해마다 연말이면 머리를 싸매고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건물 전체를 ‘크리스마스 트리’로 만드는 건 사람들에게 ‘뭔가 사야 할 때’임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추운 밤, 환하게 빛나는 백화점 조명은 머릿속에 땅땅 울리는 종소리 같은 거다. 꼭 쇼퍼홀릭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백화점 외벽에 붙은 별 모양의 눈결정 장식을 보면 앗차차, 사야 할 것들이 있고, 감사해야 할 분이 있고 그중 몇 분은 감사하지 않으면 뒤끝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나는 막 불이 켜진 백화점의 야간 조명을 보며 지독한 금단 현상에 시달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나는 틈틈이 패션지와 인터넷을 뒤져 이번 겨울의 ‘머스트 해브’가 무엇인지를 공부했다. 전엔 ‘다 아는 내용’이라며 바로 재활용품통으로 던져버리던 백화점 전단지도 들여다보았다.



    ‘역시 이번 겨울 머스트 해브는 오토바이에 어울릴 것 같은 라이더 가죽 재킷이군. 라이더 재킷에서는 특이하게도 국산 브랜드가 더 우세한데? 어깨가 강조된 파워슈트와 어깨와 목 부분을 반짝거리는 비즈로 장식한 주얼 재킷과 니트도 한번 뒤져봐야겠어. 어디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네. 연예인들은 모조리 입어주셨고. 올해도 유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피 베스트(조끼)는, 가격도 많이 착해진 거 같은데 하나 질러? 가만, 이게 동그라미가 몇 개야, 허걱. 후드만 있는 머플러도 많이 나왔네.’

    태풍의 중심처럼 휘몰아치던 일 더미가 잠깐 짧은 진공 상태를 만든 어느 푸르른 점심시간에 나는 빛의 속도로 명동으로 질주했다. 저녁 때 일이 끝나면 노점상들도 문 닫고 들어갈 시간인 경우가 많아 군사작전 식으로 쇼핑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쇼핑리스트의 실물을 확인하는 아이쇼핑을 1차 목표로 했다. 남들은 점심시간에 성형 수술도 한다는데, 아이 쇼핑쯤이야.

    ‘백화점까지 빠르게 걸어서 15분, 지하도에서 연결된 입구로 들어가 식품매장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서 1층은 바로 패스하고 중앙 에스컬레이터로 2층으로 올라가 A,B,C매장 세 곳만 확인하고, 곧바로 3층 D매장으로 가야지. 거기선 10분 정도 내서 쇼핑리스트 목록을 후다닥 보고 간 김에 E매장도 한번 들러봐? 1층에서 선물로 목욕용품 세트를 사고 12시45분에 출발하면 1시까지는 무사히 사무실에 들어올 수 있겠군.’

    그러나 광고카피가 시킨 대로 ‘생각대로’ 했는데, 그대로 되는 일은 현실에서 별로 없다. 군사작전하는데 군화가 아니라 이름만 용맹한 ‘킬힐’을 신은 게 문제였다. 워낙 높은 굽의 구두를 자주 신어서 ‘하이힐 신고 달리기’대회가 서울에서도 열리면 한번 출전해보리라 자만했던 나는 서울 한복판의 광장에서 놀부가 제비 다리 분질러먹듯 야만적으로 하이힐의 뒷굽을 박살내버리고 말았다.

    살다보면 하이힐의 뒷굽이 부러지는 일은 밥 먹다가 혀를 깨무는 일만큼 간혹 일어난다. 그 순간은 당황스럽지만, 뒷굽을 수거해 수선점에 가져가면, 감쪽같이 회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날 내가 신고 뛰었던 힐은 반짝거리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부러지는 순간 유리처럼 깨져버렸다. 확신하건대 그 구두 값의 94%는 굽의 가격이었을 것이다. 내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나는 굽이 사라진 구두의 밑바닥을, 틀니가 빠져 휑하고 시커먼 입속을 들여다보듯 쳐다봤다. 석순 같던 뒷굽은 다시 붙어주지도, 그 자리에서 솟아나지도 않았다.

    나는 최대한 중심을 잡고, 빠르게 백화점 내 단골 구두수리점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봤으면 굉장히 기괴한 모습이었겠으나, 적어도 정면에서 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세계 최고의 명품 수리’라고 했으니, 수리점 아저씨가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거야, 혹시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이 구두는 더 신으실 수 없습니다.”

    수리점 아저씨는 ‘세계 최고의 명품 기술자’답게 냉정한 표정으로 산산조각난 굽을 본드로 얼기설기 대충 붙여줄 수는 없다는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대신, 평범한 나무힐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모든 쇼핑 일정을 포기하고, 슬리퍼에 발을 꿰고 수리점 앞에 앉아있으려니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구두는 카펫 위에서나 살살 신으셔야죠. 우리나라처럼 울퉁불퉁한 도로에서 신으면 안 돼요.”

    그렇다. 불행의 원인은 점심 쇼핑도, 나의 질주도 아닌 서울의 길이었던 거다. 광화문에 있는 광장들만 해도 그렇다. 말이 광장이지, 멀쩡한 길에 물길이 폭폭 파여 있어서 엎어질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물길의 폭이 넓어서 하이힐의 굽이 끼진 않는다. 가장 나쁜 건 보도블록 사이의 틈이 상당한 요철을 이루고 있고 하이힐이 끼기에 딱 좋은 만큼씩 떨어져 있다는 거다. 걸을 때마다 블록 사이에 힐이 끼는 구조인 것이다. 사방이 여자들의 덫이다.

    페미니스트일 것으로 보이는 서울시장님이 2007년에 시작한 ‘여행(女幸)프로젝트’는 나처럼 사회에 불만 많은 여자들을 위해 만든 정책이다(하이힐을 든 여성 모델이 등장하는 서울시 광고를 보고, ‘왓 위민 원트’란 영화에서 여성을 알기 위해 스타킹을 신던 멜 깁슨의 모습에 잠시 시장님 얼굴을 오버랩해봤다). 힐을 신고도 여자들이 성큼성큼 걸어다닐 수 있는 도로를 만들겠다는 건데, 도로를 파헤쳐 공사하는 모습은 몇 번 봤지만 딱히 실감이 나진 않는다. 단지 나 같은 여자가 적지 않구나 하고 위로를 받았을 뿐이다.

    수리가 끝난 구두를 신고 회사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백화점의 장식등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의 쇼핑 목록 마지막줄에 운동화를 등재했다. 백화점 외관 장식등이 사라지기 전에 반드시 겨울 쇼핑을 떠나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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