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DI의 지식경제부 용역보고서가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소동만 일으켰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정책이 될 수 있다”고
- 지경부 관계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뭣하러 KDI에 연구를 발주한 걸까. 정부는 KDI에 연구비를 주면서 국민 혈세를 썼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전 본사. 한전은 전남 나주시로 본사를 옮긴다.
경주시민 300여 명이 토론회에 참석하고자 관광버스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들은 “정부가 사기극을 벌인다”면서 토론회장 단상을 점거했다. 김일환 경주시의회 의장이 성명서를 읽었다.
“경주시민의 의견을 무시하고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 통합을 논의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이해집단 간에 몸싸움도 벌어졌다. 고성이 오갔으며, 소화기 분말이 발사됐다. 경주시민과 발전노조 조합원이 충돌한 것.
경주시는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을 유치하면서 한수원 본사 이전을 약속받았다. 한전 경영진과 노조는 발전사 재통합을 주장해왔다.
지경부가 전력산업 구조개편과 관련해 KDI에 용역을 맡겼고, KDI는 이날 토론회에서 연구결과를 공개했다. ‘대내외 여건변화에 부응한 전력산업구조 정책방향’이란 제목이 붙은 이 보고서의 요지는 이렇다.
① 한전 한수원 통합은 원전 수출 역량 강화 측면에선 바람직하지만 한수원 경주 이전 문제가 걸린 만큼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
② 한전과 5개 발전회사(남부발전, 동서발전, 남동발전, 서부발전, 중부발전) 재통합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존의 경쟁체제가 득이 많다.
③ 발전회사 독립성을 강화하고, 판매경쟁을 도입하는 게 바람직하다. 화력 3사로 재편하거나 현행 5개사를 유지한다.
“발전 경쟁을 유지하고, 판매 경쟁을 도입하라”고 제안한 KDI 보고서가 공개되자 한전 본사를 유치한 전남도가 발끈했다. 한전 본사는 나주시에 조성 중인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로 2012년 이전한다. 박준영 전남지사는 성명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한전 판매부문의 경쟁체제 도입과 관련한 정부의 전력산업구조 개편안을 수용할 수 없으며 당초 계획대로 한전을 온전하게 이전하라. 정부의 전력산업구조 개편안은 반쪽짜리 한전을 이전시키기 위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발전노조도 “정부가 한전 분할 및 민영화를 강행하면 전면적인 파업 투쟁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해를 공유한 각 집단이 서로 다른 이유로 반발하자 최경환 지경부 장관은 7월16일 정부의 의견을 밝혔다.
최 장관은 “한전과 한수원은 현 체제가 바람직하다”면서 경주시민의 손을 들어줬다. 판매부문 경쟁체제 도입에 대해서도 “중장기적 방향은 맞다고 보지만, 당장 판매 경쟁을 도입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거다.
KDI의 제안 중 한수원 남동발전 중부발전 서부발전 남부발전 동서발전의 독립성 강화만 살아남았는데, 지경부는 발전회사를 한전으로부터 독립시키거나 시장형 공기업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저울질하고 있다.
도대체 그간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영국 모델의 흥망
7월9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전력산업 구조개편안 토론회에서 한전과 한수원의 통합을 반대하는 경주시민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성명서를 낭독했다.
한국은 1999년부터 전력산업 구조개편에 나섰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신자유주의식 개혁은 일종의 복음처럼 통했다. 민영화, 시장화는 세계사적 흐름이었다. 정부는 민영화를 목표로 한전의 발전부문을 6개 회사로 쪼갰다. 해외매각을 통해 외자를 확보하겠다는 뜻도 있었다. 2000년 12월 국회가 전력산업구조개편촉진법을 제정하고, 전기사업법을 개정하면서 전력산업 구조개편이 본궤도에 오른다. 발전 부문을 6개 회사로 나누고 전력거래소를 설치하는 1단계 구조개편은 2001년 4월 완료됐다. 배전부문도 발전부문과 마찬가지로 분할한 뒤 민영화, 시장화하고, 2009년 소매 경쟁(판매 경쟁)을 도입하겠다는 게 당시의 계획이었다. 소매 경쟁은 소비자가 라면을 살 때 브랜드를 저울질하듯 다수의 전력회사 가운데 한 회사의 전기를 골라서 구입하는 것이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추진한 국가 중 판매 경쟁을 실시하지 않은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문제는 한국이 선택한 정책이 실패한 모델을 바탕에 뒀다는 점이다. 2004년 5월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개혁특별위원회 공동연구단은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기대이익이 불확실한데다 예상위험이 상당하다”면서 정부에 중단을 권고했다. 정부는 이 같은 권고를 받아들여 배전분할 계획을 접었다. 2006년 9월을 기점으로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사실상 중단됐다.
이 같은 결정엔 ‘캘리포니아의 실패’가 영향을 끼쳤다. 캘리포니아주는 1998년 미국에서 가장 먼저, 가장 급진적으로 전력시장 자유화에 나섰다. 경쟁을 도입해 시장이 가격을 결정하게 해 전기요금을 내리겠다는 게 자유화의 골자였다. 주 정부는 1998년 3개 독점회사에 발전소 매각을 명령했다. 경쟁과 선택이라는 시장원리를 전력산업에 적용한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실험은 상처만 남겼다. 발전회사들이 시장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전기가격을 조작했으며, 2001년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캘리포니아주는 결국 주민 세금을 쏟아 부어 전력산업을 재건해야 했다.
김대중 정부가 입안한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영국식 풀시장 도입을 근간으로 삼았다. 발전 경쟁-도매 경쟁-소매 경쟁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영국 모델은 캘리포니아 모델의 원조 격이다.
영국은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시행한 최초의 선진국이다. 1990년 발전·송전시장을 독점하던 국영 전력청을 3개의 발전회사와 1개의 송전회사로 나눈 뒤 3개의 발전회사를 민영화했다. 발전부문은 현재 13개 회사로 나뉘어 있다. 민간회사들이 수익을 늘리고자 투자보다 유지비용 절감에 나서면서 공급안정성이 무너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력회사들이 망해나갔고, 전기요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2001년 전력시장 개편의 오류를 인정하고 풀시장 운영방식을 바꾸었다.
값비싼 실험
‘신동아’는 지난해 북미, 유럽을 돌면서 ‘선진국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그 후’를 취재한 적이 있다.(2009년 10월호 ‘전력산업 구조개편 현장을 가다 : 정부실패보다 시장실패가 더 아팠다’ 제하 기사 참조) 샌프란시스코·워싱턴(미국), 런던(영국), 오슬로(노르웨이)에서 만난 관료와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전력산업은 특수하다. 발전·송전·배전의 수직통합 및 독점 체제가 효율적이면서 안정적이다. 전력 대란은 캘리포니아주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전력산업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으로 자유시장이 실패한 것이다. 텍사스 메릴랜드에서도 규제완화 정책이 실패했다. 전력산업에선 정부 규제를 받는 독점기업이 바람직하다. 시장이 무조건 옳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로버트 키노시안, CPUC 에너지 담당 정책 보좌관)
키노시안이 일하는 CPUC는 전력·천연가스·통신·상수도·철도산업을 담당하는 주 정부 소속 기관이다. 그는 2001년 전력 대란 때 위기 극복 담당자로 일했다.
미국 전역의 전력·천연가스·석유산업을 다루는 연방정부 에너지위원회(FERC) 사라 메킨지 대외담당관은 캘리포니아의 사례를 ‘재앙’으로 표현했다.
“캘리포니아에선 전기요금 급등이 재앙으로 불거졌다. 소매시장 자유화는 각 주가 결정할 일이지만 위험하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미국 의회를 감시하는 시민단체 퍼플릭시티즌의 타이슨 슬러콤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기는 상품으로서 거래가 어렵다는 걸 보여준 값비싼 실험이었다. 성과를 꼽는다면 사람들이 전기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점이다.”
영국의 전문가들도 의견이 비슷했다.
“영국 모델을 확산시킨 건 글로벌 컨설팅 회사들이다. 전력시장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자유주의 이념에 따라 잘못된 모델을 퍼뜨렸다. 영국의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비극으로 종료했다. 공공재엔 완전경쟁 모델이 들어맞지 않는다. 공공재는 대체재가 존재하지 않고 수요가 탄력적이지 않아서다. 공공재의 경우엔 규제독점이 경쟁시장보다 안정적, 효율적이라는 게 현재까지의 평가다.”(스티븐 토머스, 영국 그리니치대 교수)
“얼토당토않은 안(案)”
이명박 정부는 규제 철폐, 공기업 민영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했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세계 각국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이명박 정부도 비슷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6월 당·정·청 합의로 전기 수도 가스 민영화를 임기 중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발표했다.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으로 일할 때 발전·송전·배전의 수직통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회 의견도 비슷했다. 지난해 정기국회 때 지식경제위원회 소속 다수 의원이 전력산업 대통합을 주문했다. 지경부가 KDI에 용역연구를 의뢰한 것도 이 같은 의원들의 요구를 반영해 이뤄진 것이다.
KDI가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안을 채택할 것으로 예상한 이가 많았다. 한전 경영진도 그렇게 여겼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KDI가 당초의 예상과 다르게 시장화를 강조한 보고서를 내놓은 것이다. 영국식 모델이 부활한 셈이었다.
지경부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기획재정부와 협의해서 민영화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구조개편 논의가 다시 불거진 건 국회에서 한전을 재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다. 김쌍수 한전 사장도 연료를 통합 구매하는 게 이득이라고 했다. 그래서 매킨지 이런 데 말고 아직 의견을 내지 않은 기관(KDI)에 맡긴 것이다.”
KDI 연구진 구성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용역연구에 참여한 인사의 대다수가 오래 전부터 시장화, 자유화가 해법이라고 주장해온 이들이다. 게다가 연구진 중 전력산업에 천착해온 인사는 이수일 박사가 거의 유일했다.
KDI 안(案)은 기형적이다. 시장화, 민영화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KDI는 발전·배전은 지금처럼 어정쩡하게 둔 채 판매 경쟁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KDI의 용역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한 전력산업 전문가는 “KDI가 얼토당토않은 안을 내놓았다”면서 연구결과를 깎아내렸다.
외국 전문가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중간에 멈춰서 있는 건 어색하다. 시장화가 어렵다면 과거처럼 일원화 체제로 가는 게 차라리 낫다. 나라별 사정에 따라 판단할 문제지만 소매시장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건 성공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에릭 트라네, 북유럽 전력시장 노드풀 CEO)
“어떤 외압도 없었다”
KDI는 발전회사가 경쟁하면서 연료를 구입하면 구입 경비가 줄어든다고 봤다. 그래서 분할체제, 경쟁체제가 이득이라는 것이다. 실무에서 화력발전 원료인 석탄을 구입하는 한전 관계자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현물시장을 모르는 탁상 연구자의 계산이라는 것이다. 김쌍수 사장은 대기업에서 잔뼈가 굵었다. 최고경영자에 오르려면 수에 밝아야 한다. 기업이 돈을 벌려면 경비를 절감하거나 매출을 늘려야 한다. LG전자 CEO 출신인 김 사장은 공동구입이 오히려 이득이라고 여긴다. 화력발전 수출을 위해서도 재통합이 바람직하다는 게 한전의 주장이다.
지경부 관료들도 KDI가 제안한 판매 경쟁 도입이 어렵다는 걸 잘 안다. 8월8일 개각으로 교체가 확정된 최경환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력요금이 원가 이하인 상황에서 판매 경쟁을 하라는 건 밑지고 장사하라는 것밖에 안 된다.”
한국 소비자는 원가보다 전력을 싸게 공급받는다. 한전은 기업 경쟁력의 뒷배 구실을 해왔다. 박후건 경남대 교수(경제학)는 “한전이 없었으면 삼성전자도, 포스코도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경부 고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산업 발전의 근간에 값싼 전력요금이 있었다. 민영화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발전회사들이 덩치를 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다. 판매 분할 그거 안 한다. 지금은 얘기할 상황이 아니다. 중장기적으로 검토한다는 말은 30년, 50년 뒤를 가리키는 거다. 그때는 우리가 없을 때다.”
그렇다면 지경부와 KDI가 죽은 자식 불알 만진 까닭은 뭘까.
한전, 한수원 재통합 논란부터 들여다보자. 신동아가 입수한 KDI 보고서 원안에 따르면 연구진은 당초 재통합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원자력발전소 해외시장 진출과 관련해 원활한 인력 운영을 위해서는 한전, 한수원 통합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지자체(경주시)를 설득할 대안이 우선시돼야 한다.”(비공개 KDI 내부 문건)
KDI의 의견은 최종안에서 둘로 나뉘었다. ‘한전 한수원 재통합’과 ‘한수원을 유지하면서 조정기능을 강화한다’라는 복수의 안을 내놓은 것이다. 경주 방폐장과 관련해 정치적 부담을 느낀 지경부가 입김을 불어넣었다는 말도 나돌았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KDI 측은 “어떤 외압도 없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전, 한수원 재통합이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인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사회는 경제논리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때로는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한다. 지경부가 그랬다.
지경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한전의 화력발전 자회사를 5개에서 3개로 줄이는 것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내부적으로 덩치를 키웠으면 하는 생각은 있었다. 그런데 비용이 많이 든다. 그래서 지금처럼 그냥 가는 것으로 할까 싶다.”
결국 KDI 안 가운데 살아남은 건 앞서 언급했듯 발전자회사를 독립시키거나 시장형 공기업으로 지정하는 게 전부다. 수력, 원자력을 맡은 한수원과 화력을 맡은 5개 발전회사는 한전이란 ‘시어머니’의 간섭을 받고 있다. 독립하거나 시장형 공기업으로 지정받으면 시어머니의 품을 벗어날 수 있다. 대신 정부로부터 직접 통제를 받는다. 한전에 정보가 집중되는 것보다 정부가 책임지는 형태가 낫다는 게 연구진의 논리다.
10년 넘게 전력산업에 천착해온 한 인사는 “KDI 보고서는 한마디로 뒤죽박죽”이라고 꼬집었다. 시장화를 강조하면서도 관료들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거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정책이 될 수 있다”고 지경부 관계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뭣하러 KDI에 연구를 발주한 걸까. 정부는 KDI에 연구비를 주면서 국민 혈세를 썼다. ‘때로는’이라는 관료의 표현을 되새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때로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정책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