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큐 같은 영화를 누가 보나 했는데…미안하고 부끄러웠다
- 정신과 치료 받다 출연한 ‘황진이’로 우울증 치료
- 내 선택 존중한 아들과 날 숨 막히게 했던 아버지
- 췌장암 수술 후 과식과 폭탄주 끊고 ‘꿈의 체중’
- 연하 이성 친구와 3년째 연애 중, 결혼은 안 해
- 가족 부양하느라 평생 가장 노릇, 이제 나를 위해 살고파
김영애는 송강호, 오달수, 곽도원, 임시완 등 남자배우가 대부분인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이나 다름없는 국밥집 주인 순애로 등장한다. 순애는 시장에서 돼지국밥을 팔아 홀로 대학생 아들 진우(임시완 분)를 뒷바라지하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대학에 다니며 야학 교사로 봉사하던 아들이 용공조작사건에 연루돼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간 뒤 순애가 보이는 애끓는 모성애는 객석을 여러 번 눈물바다로 만든다.
특히 그가 아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모진 고문으로 온몸에 피멍이 든 아들을 보고 실신하는 장면과, 단골손님이던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를 찾아가 “내 아들은 빨갱이 아니다. 변호를 맡아달라”며 무릎 꿇고 애원하는 장면은 ‘최루 강도 1급의 명장면’으로 뽑혔다. 송우석이 인권변호사로 변모하는 중요한 계기였던 이런 장면에서 김영애의 호연이 돋보인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처음 보는 송강호 잡고 울고불고”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난 캐릭터를 설정하지 않아요. 그냥 대본을 자꾸 읽어보면서 그 인물을 생각해요. 6개월짜리 TV드라마 같은 경우는 한 달 정도 그러면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죠. 대신 처음엔 많이 헤매요. ‘변호인’에서 처음 찍은 신이 송우석 변호사를 찾아가 애원하는 장면이었고, 두 번째가 면회 신이었죠.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두 장면을 난생처음 보는 배우들과 찍으려니까 내가 잘못해서 영화를 망칠까봐 걱정이 많았어요. 임시완도 ‘해품달’을 찍을 때 붙는 장면이 없어서 못 보고, 송강호 씨도 그때 처음 봤어요. 그런 사람을 붙잡고 울고불고 한다는 게 난감하더라고. 속이 많이 탔죠.”
▼ 완성된 영화는 만족스러웠나요.
“2차 편집본을 봤을 땐 걱정을 좀 했는데 언론시사회 때 보고 놀라웠어요. 너무 고마워서 감독을 안아줬을 정도로요.”
‘변호인’ 촬영은 그가 드라마 ‘메디컬 탑팀’에 출연하기 전인 지난해 5~7월 진행됐다. 중간에 ‘현기증’이라는 영화도 찍었다. ‘현기증’은 2억 원을 들여 만든 저예산 영화다. 그는 “이런 독특한 시나리오의 영화 주인공을 또 언제 할까 싶어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며 “체력을 생각지 않고 스케줄을 무리하게 잡아 지난 1년간은 집과 촬영장만 오갔다”고 했다.
▼ 작품 선택 기준이 캐릭터인가요.
“작품 전체를 봐요. 작품이 좋으면 비중 같은 건 안 따지고 해요. ‘모래시계’도 처음에 2회 나오는데 했어요. 이번 영화도 울림이 커서 좋았고.”
▼ ‘변호인’을 본 소감은?
“30~40대 지인들은 영화 보고 미안했대요. 나도 미안했지. 부끄러웠고. 열심히는 살았지만 내 가족과 자신만 생각하며 살았으니까. 진실이나 정의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싶어요. 난 상고(부산여상)를 나와서 바로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에 데모할 기회도 없었고. 1970~80년대는 먹고 살기 힘든 때잖아. 거기다 집안 형편도 좀 어려워서 내가 가장이었거든. 3남1녀 중 장녀인데 장남 노릇을 지금까지 해왔지. 지금은 다 자리 잡았지만 몇 십 년 동안 그랬지.”
▼ 1000만 관객 돌파, 예상했나요.
“난 시나리오를 보는 눈이 없나봐. 노 대통령 이야기가 70~80%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다큐 같은 영화를 누가 보나 싶었어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했죠. 그래도 시나리오는 감동이 있었어요. 처음에 훅 읽었어. 눈물이 났지. 근데 처음엔 출연을 좀 망설였어요. 한댔다가 안 한댔다가 하면서.”
▼ 왜요?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나는 시끄러운 데 들어가는 게 두려웠어요.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어.”
▼ 그럼에도 출연 결정을 한 이유는?
“세상이 참 공평한 게, 사업한다며 밖에서 딴 짓 할 동안 배우로서의 입지가 많이 좁아져 있더라고요. ‘변호인’의 국밥집 아줌마 순애는 사실 예전에 많이 했던 캐릭터인데도 그걸 다 잊어버리고 최근작인 ‘황진이’ ‘로열패밀리’ ‘해품달’에서 드센 역을 하면서 그 이미지로 굳어져 있었어요. TV드라마에서는 그런 캐릭터만 들어와서 내 나름대로 변화를 주고 싶은 욕구가 강했는데 순애가 딱 좋겠더라고요. 송강호 씨가 출연한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더 기울었고. 송강호 씨 영화는 관계자들이 많이 보니까 이미지 변신에 좋은 계기가 되겠다, 했지.”
잔재미와 큰 감동
‘변호인’은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맡았던 부림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여서 개봉 전부터 논란이 많았다.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의미인 부림사건은 1981년 발생한 부산지역 최대 용공조작사건. 영화가 개봉하자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누군가 영화 티켓을 대량 예매했다가 상영 직전 취소하는 일도 벌어졌다.
▼ 영화 평점을 0점 처리하는 ‘평점 테러’도 있었는데.
“신경 안 썼어요. 그런 사람이 전체의 100분의 1도 안 되더라고. 영화를 보지도 않고 평가한다는 게 어이없잖아요. ‘변호인’ 반응을 보면서 이 세상에는 상식적인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알았어요. 영화 보고 내게 전화한 사람들은 거의 다 보통 사람들이에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정말 가슴이 먹먹했다’ ‘울컥했다’며 울면서 전화했어요. 세상이 험해도 좋은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세상이 굴러가는 거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그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요.”
▼ 흥행 요인이 뭘까요. 노 전 대통령의 영화라서?
“그 점도 작용했겠죠. 나도 변호사 노무현에 대해선 몰랐는데 이번 영화를 하면서 사람들이 왜 그를 좋아하는지 좀 알았어요.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난 감동과 재미를 다 주는 영화가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변호인’은 잔재미와 큰 감동을 주죠. 게다가 정의가 뭔지, 난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런 점이 보수와 진보를 떠나 보통 사람들을 입소문으로 끌어들인 게 아닌가 싶어요.”
▼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기보다 연기자들의 힘이 컸다는 평가도 나오던데.
“공감해요. 영화를 보고 나서 위기감, 기분 좋은 경쟁심을 느꼈어요. 달랑 한 신 나오는 친구까지 어찌나 연기를 잘하든지. 어떤 감독이 ‘이렇게 출연진의 연기에 구멍이 없는 영화는 첨 봤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난 영화를 보면 작품에 빠지기보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데 아쉬울 때도 많아요. 내가 인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죠.”
▼ 그게 누군가요.
“송강호 씨, 김용림 선배, 윤여정 선배, 김영옥 선배, 하정우. ‘베를린’과 ‘더 테러 라이브’ 보면서 정우한테 홀딱 반했어요. 정우가 감독하고 주연하는 ‘허삼관매혈기’라는 영화가 곧 크랭크인 해요. 특별출연으로 한 신 나오게 됐어요. 꼭 하고 싶은 작품이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막 설레요.”
▼ ‘변호인’의 송강호와 임시완을 배우로서 평가한다면.
“송강호 씨가 원래 연기를 잘하는 건 알았지만 옆에서 보니 그 이상이었어요. 영화 전체를 꿰고 있는 점도 놀라웠고. 시완이는 아직 미완이지만 최선을 다한 점을 높이 평가해요. 고문 신이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왜 이런 걸 한다고 했지 싶을 정도로 안쓰러웠어요.”
▼ 배우 생활을 40년 넘게 하면 연기 도사가 되지 않나요.
“지금껏 한 번도 연기가 쉬웠던 적이 없어요. 많이 해본 캐릭터라도 작품이 다르니까 매번 새로워요. 그래서 늘 힘든가 봐. 사람들은 오래 하면 저절로 된다고들 하는데 난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캐릭터가 내 안에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전까지는 너무 힘들어요. 연기가 편하게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배우는 내 운명
기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맑고 선했다. 젊은이의 그것 못지않은 생기가 감돌았다. 비결을 묻자 그는 “철이 안 들어서 그렇다”며 웃음을 빵 터뜨렸다.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비교적 닳지 않아서 아직도 철 안 든 얼굴을 갖고 있나봐요. 일도 연애도 그래서 더 고달팠지만.”
그가 달려온 배우 인생은 기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그는 1971년 MBC 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드라마 ‘민비’(1973)로 스타덤에 오르지만 유부남이던 밴드마스터 이종석 씨와 사랑에 빠져 20대 중반 배우인생의 위기를 맞는다. 1978년 이씨와 결혼한 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중년배우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2001년 이혼 소식을 전해 주위를 안타깝게 한다. 2003년 황토팩 사업을 함께하던 5세 연하인 박장용 씨와 재혼한 후에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듯했다. 그러나 사업 실패로 이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2008년 두 사람은 남남으로 갈라선다. 이후 연기 활동을 재개한 김영애는 여러 작품에서 존재감을 발휘하지만 ‘해품달’에 출연하던 2012년 췌장암 판정을 받는다.
여자로서 견디기 힘든 세월을 보내면서도 지난 43년간 그는 드라마 56편, 영화 53편에 출연했다. 데뷔 후 해마다 두세 편의 작품을 꾸준히 해온 셈이다.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기에 이 정도로 오랜 생명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비결이 뭘까.
“먹고살기 힘드니까 계속 일한 거예요. 돈이 급해서. 늘 가장이었으니까. 친동생 중에 잘된 애도 있고 좀 힘든 애도 있어요. 결혼하고 나서 민우(친아들)의 배다른 누나와 형도 내가 건사했어요. 민우 아빠에게 아이 셋이 있었으니까 그 아이들도 내가 다 공부시키고 결혼시켰죠. 그래서 늘 사는 게 팍팍했고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마흔아홉까지. 먹고살려고 다작을 하는 게 지긋지긋해서 사업할 생각을 한 거예요. 돈을 벌어서 내가 하고 싶은 작품만 하는 근사한 배우가 되려고.”
▼ 처음에 배우가 된 것도 먹고사는 게 목적이었나요.
“그땐 탤런트 시험에 붙으면 방송국에서 월급 주는 줄 알았어요(웃음). 서울 친척 언니가 한번 도전해보라며 원서를 갖다줬어요. 원래 재수를 하려고 했는데 붙었어요. 이제 월급 받을 수 있겠구나 했지. 배우가 된 건 내 생애 최대의 행운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 배우가 천직이란 생각이 드나요.
“그런 생각한 지는 오래됐어요. 사업한답시고 연기를 못하는 동안 병이 났어요. 전남편이 ‘김영애의 남편’으로 비치기 싫다며 내가 연기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죠. 난 연기를 해야 활력이 생기는데 그걸 못하니 우울증이 심했어요.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6개월 동안 받다가‘황진이’라는 드라마를 한 거예요. 그 작품을 하며 우울증을 치료했어요. 다 죽어가다가도 카메라에 불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해지죠(웃음).”
▼ 자식 때문에 이혼을 망설인 적이 있나요.
“있죠. 실은 30대 초반에 이혼하려고 했어요. 그때는 우울증이 심해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알코올 중독에 약물중독이었고 정신과 치료도 여러 번 받았어요. 1970년대 말부터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으니까. 근데 서른네 살 때 민우가 태어났어요. 아이를 위해 참고 살다 마흔아홉 살에 이혼을 했지. 내가 죽어서 없는 것보다 어떻게든 살아서 민우 옆에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천운’으로 키운 사랑
사춘기에 부모의 이혼을 겪었는데도 엄마의 걱정을 덜기 위해 늘 어른스럽게 굴던 민우는 어느덧 장성해 가정을 꾸렸다. 세계적인 요리 명문인 프랑스 파리의 르코르동블루에 이어 미국 뉴욕의 CIA (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를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 맨해튼에서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로 일한다. 김영애는 “두 번째 이혼할 때도 그 아이는 엄마만 행복하면 된다며 내 결정을 존중해줬다”며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상처를 많이 받으며 자랐는데 나 역시 아들을 엄하게 키워 미안하다”고 털어놨다.
▼ 이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나요.
“물론이죠. 결혼할 때는 좋아서 했지만 헤어질 때는 오죽하면 헤어졌겠어요. 같이 사는 게 많이 힘들고 우울했어요. 참고 살기 싫어서 이혼했어요. 근데 헤어지고 나서 많이 밝아졌어요. 근래 몇 년 동안 이렇게 편안하고 밝았던 적이 없어요.”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여인의 향기가 났다. 화장해서 풍기는 분 냄새와는 또 다른. 이성 친구가 생겼다더니 그 덕분인 듯했다.
▼ 새로운 만남을 시작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연하지만 오빠 같고 아버지 같은 느낌이 드는 친구랄까. 2011년 ‘로열패밀리’를 시작할 때 우연히 알았는데 ‘해품달’ 촬영 끝내고 췌장암 수술하면서 가까워졌어요. 그 친구가 병구완을 해줘서 큰 힘이 됐거든요. 지나치게 낙천적인 성격이라 가끔 흉도 보지만 내 어리광과 투정을 다 받아줄 만큼 따뜻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에요. 내가 짜증 내도 감정 기복이 심한 직업이라 그런 것 같다며 이해해줘요.”
▼ 결혼할 생각인가요.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사랑받는 느낌이 들지만 이제 죽을 때까지 결혼은 안 할 거예요. 남녀보다는 친구가 좋은 것 같아요.”
▼ 갱년기 우울증은 안 겪었나요.
“잘 극복했어요. 그다지 지혜롭지도 못하고 앞으로 또 어떤 진창에 빠질지 알 수 없지만 내가 겪는 모든 일에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매순간을 열심히 살았거든요. 췌장암 수술 전 마스크를 쓰는데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너무나도 편안해지더라고. 참 열심히 살았다, 김영애 수고했다 그랬지. 난 지금이 마지막이라도 원도, 한도 없어요.”
▼ 수술 후유증은 없었나요.
“수술을 9시간 동안 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이었어요. 수술하고 나서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반나절 갔겠지 하고 보면 한 시간이 지났어. 지옥이 따로 없더라고.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이 아팠어요. 십이지장부터 담도, 담관, 췌장 일부를 다 잘라냈거든. 물만 먹어도 고통스럽더라고요.
수술 전에는 그나마 견뎌낼 수 있을 정도였어요. 고열에 시달리며 췌장염을 앓았는데도 ‘해품달’이 끝날 때까지 두 달을 더 찍었죠. 일을 마쳐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어서. 나중엔 너무 힘드니까 황달이 오더라고. 병원에 갔더니 황달은 마지막 순간에 오는 거라네. 거의 말기쯤 돼서. 검사받은 후 깨어보니 이 사람이 너무도 슬픈 얼굴로 잘 이겨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기를 들은 거지.”
▼ 검사 결과가 안 좋았나요.
“수술 전날 담당 의사가 와서 천운이라고 했어요. 황달이 있어서 캐보니 암을 발견한 거야. 췌장암은 이미 다 번져서 손 쓸 수 없을 지경에 알게 되는데 초기에 발견한 건 아주 드문 일이래요. 수술 후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는데 아직은 건강이 괜찮아요. 과식하던 버릇이 없어졌어요. 과식했다가 몇 번 혼났거든. 죽을 때까지 과식하면 안 된대요. 이제는 식사할 때도, 술 마실 때도 ‘스톱’하는 타이밍을 알죠.”
아버지의 선물
▼ 보톡스 시술로 주름 펴본 적 있나요.
“적당히 조금씩은 해요.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눈가 주름이 너무 싫어요. ‘변호인’에서 순애가 웃는 장면을 보니 그 주름이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더라고. 그래도 안에 뭘 넣고 하는 건 싫어요. 어차피 난 젊지 않아. 어떻게 잘 늙어갈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평소 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헬스와 필라테스, 등산 같은 운동을 6~7년간 꾸준히 했죠. 근데 수술 후 딱 2주 만에 13kg이 줄더라고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알았어요. 밥을 먹기까지 두 달이 걸렸는데 체중이 크게 줄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 체중이 얼마나 나갔는데요?
“40kg쯤 됐어요. 지금은 49~50kg 정도고요. 그전에는 어떻게 하면 1kg을 뺄까 고민하면서도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 포기할 수 없었어요. 운동한 목적도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였는데 수술 후에는 살이 안 쪄서 걱정이었지. 의사 선생님도 췌장암 수술을 20여 년간 했는데 수술하고 나서 살찐 사람을 한 명도 못 봤다고 했어요. 근데 내 체중은 거의 다 회복돼 전보다 3kg 정도 적게 나가요.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의 체중이 됐죠. 대신 기운은 없어요. 지금은 와인 한 잔이면 기분 좋게 알딸딸하니까. 얼마 전 ‘변호인’ 1000만 파티에서는 300cc짜리 맥주 2병을 마시고 해롱거렸어요, 하하. 굉장히 경제적으로 됐어.”
▼ 예전에는 얼마나 마셨기에.
“한때는 폭탄주를 10잔 마셔도 멀쩡했어요. 취하지만 기분 좋게 놀았지요. 지금은 그러면 기절해서 병원에 있을걸.”
▼ 불면증은 없어졌나요.
“지금도 있긴 있어요. 몸은 피곤한데 머리가 쉬어지지 않아. 매일 90분씩 운동을 하는데도 소용이 없어요. 선천적으로 예민해서 그런가봐요. 중학교 때 악성빈혈로 만날 쓰러지고 그랬는데 동네 주치의 말이, 내 신경 굵기가 다른 사람의 반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강박증이 더 심했던 것 같아요.”
▼ 아버지가 어쨌는데요?
“우리가 밖에 나가서 길거리 과자를 못 먹게 하셨어. 연필도 공책도 다 쓰면 검사를 받고 통과돼야 새것을 주셨는데 한 줄이라도 낙서가 있거나 건너뛰면 종아리를 맞았지. 연필도 몽당해질 때까지 쓰게 하고. 고3 때는 천자문을 매일 한 자씩 외워서 일주일마다 검사를 받았어요. 일곱 자를 못 외우면 종아리를 때렸지. 치마 교복을 입고 다니는 딸의 종아리에 줄이 쫙쫙 가게.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그게 당신의 사랑법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얼마나 날 예뻐하셨으면 만날 공주라고 부르면서 바람 피울 때도 데리고 다녔겠어.”
▼ 이제 아버지를 용서했나요.
“지금은 고맙고 죄송하지. 아버지 덕에 신문을 보니까. 한자를 쓰진 못해도 막힘없이 읽어요. 용서를 구할 사람은 난데 때를 놓쳤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40년 남짓 됐거든. 내가 공부하기 싫어서 부산여상에 원서를 내고 아버지에게 쫓겨나 한 달간 이모 집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부산여상이 아니라 부산여고에 원서를 냈다고 거짓말을 했지. 어려서부터 그렇게 당돌하고 앙큼한 구석이 있었어요. 간이 컸지.”
연애보다 연기가 좋아
어릴 적 어머니가 “조선팔도에 어쩌다 저렇게 앙칼진 게 나왔느냐”고 했던 말을 떠올리던 그는 “내재된 당돌함이 내가 연기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그 나름의 분석을 내놨다.
“근성 없이는 연기하기 힘들어요. 난 큰일을 만나면 더 대범하고 침착해져요. 작은 일에는 오히려 안달하고 겁도 많아요. 무서워서 운전도 못하잖아.”
▼ 대범하니 사업에 도전했겠죠.
“그 일이 적성에 맞지는 않았어요. 날 너무 힘들게 했어요. 그래도 후회는 안 해요. 그런 경험이 내게 없던 배짱을 키워줬거든. 갖고 싶은 것도 다 가져보고. 배우로서 그런 삶도 해볼만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전남편과는 동업자로만 지냈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처음에는 너무 미워서 좋았던 시절이 생각 안 났는데 5~6년 지나니까 새록새록 떠올라요.”
▼ 배우가 안 됐다면 뭘 하고 있을까요.
“상상이 안 가. 그러면 시집을 한 다섯 번은 가지 않았을까, 하하. 난 좋은 엄마도 못 되고 좋은 와이프도 못 돼. 좋은 애인은 될 수 있는 것 같아.”
▼ 연애와 연기 중 하나만 고르라면.
“그야 연기죠. 지금도 연애 중이지만 연애보다 연기가 좋아요. 연기는 내 숨구멍이니까. 난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연기로 풀어내는 것 같아요. 연기할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 맛에 연기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배우 인생을 빛내준, 잊지 못할 작품은?
“내 생애 첫 주연을 맡은 ‘민비’라는 드라마가 먼저 떠올라요. 1973년 1년 가까이 방영했는데 대단한 인기를 끌었죠. 김영애를 배우로 만들어준 MBC 주말극 ‘야상곡’도 잊을 수 없죠. 김수현 선생님의 작품인데 그걸로 백상예술대상도 받고,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도회적인 이미지를 벗고 한국의 어머니상을 연기한 드라마 ‘형제의 강’과 ‘파도’, 기업 총수로 출연한 ‘로열패밀리’는 연기 폭을 넓혀준 고마운 작품이에요. 우울증을 낫게 한 ‘황진이’, 영화의 맛을 알게 해준 ‘변호인’도 평생 기억에 남을 작품이지요.”
▼ 혹시 버킷리스트가 있나요.
“지금껏 계획을 세워놓고 살아본 적이 없어요. 가족과 4주 동안 이탈리아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배를 타고 한 시간 반 동안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나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있던가, 허겁지겁 산을 오르면서 달음박질만 쳤는데 뭣 때문에 이렇게 살았나 하고. 어른이 되고 보니 40년이란 세월을 빨리 지나왔더라고요. 그래서 두 번째 결혼생활을 마감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앞으로 10년을 더 살지, 20년을 더 살지 모르는데 이제 날 위해 살자,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자고.”
여행과 우물의 꿈
KBS 드라마 ‘황진이’.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은 없어요. 다만 나이 먹는 게 좀 무서워. 내 사지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을까봐. 내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만 살면 좋겠어요. 그것 역시 욕심이지, 알아요. 그러기 위해 내가 노력할 거예요.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 이러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애들한테도 말해뒀어요. 산소 호흡기를 달거나 인공적으로 음식을 넣으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뭔지 묻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여행을 꼽았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너무 바삐 사느라 가본 데가 별로 없다”는 이유였다.
“볼거리가 많은 터키와 스페인도 가보고 싶고, 차를 타고 한 달 정도 계획 없이 국내를 마구 돌아다니는 자유여행도 해보고 싶어요.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는 그런 여행이요. 두 달은 외국에 나가 한군데다 여장을 풀고 그 주변을 유유자적하며 돌아보고 싶어요. 1년에 두 달 정도는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근데 아이들하고 외국에 나가보니까 여행도 기운 있을 때 다녀야겠더라고요. 여행하면서 살이 찐 줄 알았더니 부은 거였어요. 밤에 다리가 쑤셔서 잠을 통 못 잤어요. 열심히 돈 벌어서 물 부족에 시달리는 세계 곳곳에 우물도 파주고 싶어요. 우물 100개 파는 게 목표죠.”
이제 삶이 허락하는 시간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쓰고 싶다는 그의 꿈은 아직 현실의 벽에 갇혀 있다. 그를 찾는 영화와 드라마가 많아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변호인’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후 극장을 돌며 무대 인사를 다니던 그는 얼마 전부터 명필름에서 제작하는 영화 ‘카트’를 찍고 있다. 3월부터는 MBC 새 주말드라마 촬영에 들어간다.
이랜드 킴스클럽의 부당해고 사건을 소재로 한 ‘카트’에서 그가 맡은 배역은 대형마트 노조가 시위하는 현장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청소부 할머니. 그는 “데모해서 길이 막힐 때마다 안 좋게 생각했는데 영화 대본을 보니 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 관객이 나처럼 생각해주면 ‘변호인’이 그랬듯 이 영화도 성공할 것”이라며 웃었다.
▼ 몸도 생각해야지, 이렇게 계속 달려도 괜찮은 건가요.
“‘카트’에서는 대사도 적고 움직임이 크지 않아 걱정할 일이 별로 없어요. 드라마 촬영도 일주일에 사흘만 하면 될 것 같고. 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60세가 넘으면 황금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날 인정하고 써주는 사람이 계속 있잖아요. 좋은 작품에서 큰 부분을 담당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작은 부분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