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언론과 대중이 아베 다뤄온 방식
‘발톱 빠진 호랑이’ 택한 日 보수정치
2기 아베 때 美 일본정책 기조 변화
日 이기고 싶다면 잘 아는 게 먼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피습 직전인 7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나라의 야마토사이다이지역에서 길거리 유세를 하고 있다. 그는 연설 도중 두 발의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된 후 숨졌다. [아사히신문]
윤석열 대통령이 7월 12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 마련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분향소를 찾아 조문한 뒤 남긴 방명록. [대통령실]
7월 12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 마련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분향소에 윤석열 대통령이 남긴 방명록의 내용이다. 아베가 테러범이 쏜 사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것은 7월 8일의 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매우 보기 드물게 벌어진 정치인에 대한 총격 사망 사건이다.
세계 각지에서 추모의 물결이 일어났다. 대만은 7월 11일 하루 동안 총통부에 조기를 게양했고, 같은 날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은 직접 일본을 찾아와 아베의 유가족을 위로했다.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추모 묵념이 진행됐으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에 있는 주미 일본대사관을 방문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일부 한국인에게 이러한 분위기는 당혹스럽게 여겨지는 듯하다. 최근 10여 년간 한국의 언론과 대중이 아베를 다루어온 방식 때문이다. 지금껏 아베는 ‘일본 우경화의 주범’ ‘일본의 평화헌법을 개정해 군국주의 시대를 부활시키려는 위험한 정치인’, 심지어 ‘극우주의자’ 같은 식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당장 서점에서 ‘아베 신조’라는 이름을 검색해보면 그의 야욕을 폭로한다는 식의 책 여러 권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과연 아베는 ‘극우’인가. ‘그렇다, 일본은 아무튼 나쁜 놈들이다’라고 대답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실상은 그리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베가 보수 정치인이었다는 것, 특히 그가 2기 집권을 시작할 무렵 안보 문제를 강조하며 강경한 이미지를 연출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아베를 ‘극우’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극우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의미, 더 나아가 일본 사회에서의 맥락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극우는 따로 있다. 아베도,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도, 극우라고 말하기 어렵다.
도조 히데키와 기시 노부스케의 운명
아베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흔히 알려진 논의의 맥락을 먼저 짚어보자. 정치 명문가의 3대손으로 자타공인 ‘도련님’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의 외손자. 기시의 사위이자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총리까지 오르지 못했으나 두 차례에 걸쳐 외무대신 직을 역임했다.사람들이 흔히 문제 삼는 점은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의 관계다. 1896년 태어난 기시는 도쿄대를 졸업한 후 공직에 뛰어들어 출세 가도를 밟았다. 중일전쟁을 벌이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와 가까운 사이였던 기시는 도조 내각에서 상공대신 직을 역임했다. 그 뒤 도조 내각 총사퇴로 자리에서 물러난 후 패전을 맞이했고, 전범으로 기소됐다.
기시와 도조의 운명은 달랐다. 미군정은 자살하려던 도조 히데키를 살려내 기어이 교수형에 처했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체포 다음날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일본의 전쟁 수행에서 행정 관료로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볍게 처리된 셈이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이유는 아주 먼 훗날인 1997년에서야 밝혀졌다. 기시는 CIA의 전신인 OSS와 접촉했고 미국 측에 포섭됐던 것이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전쟁을 벌였고 패배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받아들였다. 1952년,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가 맺은 미일안전보장조약이 바로 그 산물이었다. 일본은 맥아더에 의해 만들어진 평화헌법으로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된 상태였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미국과 대등하게 전쟁을 벌인 나라의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진 셈이었다. 그럼에도 요시다는 철저히 고개 숙이고 미국의 질서에 편입되는 게 일본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이라 믿었고, 미일안전보장조약을 관철시켰다.
기시 노부스케 또한 그 노선을 따랐다. ‘전쟁하지 않는 나라’ ‘미국에 맞서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군말 없이 복속하고자 했다. 1957년 2월 25일부터 1960년 7월 19일까지 총 두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연임한 그의 대표적 업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거의 나라가 마비될 정도로 치열하게 벌어진 반대 시위인 ‘안보투쟁’을 뚫고, 기존의 조약을 갱신해 신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음으로써 미일관계를 현재와 같은 형태로 안착시켰다.
요시다에서 기시로 이어지는 일본의 대미정책, 더 나아가 대외정책의 큰 틀은 ‘극우’와 거리가 있다. 군대 보유를 포기하고 다른 나라에 국방을 일임하는 것은 그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극우의 정책일 수 없다. 전쟁 이후의 기시 노부스케를 극우라 부르는 건 어불성설이다. 기시의 외손자라는 이유로 아베를 대뜸 극우라 하는 것 또한 논리가 결여된 연좌제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일본 재무장 허용한 까닭
7월 8일(현지 시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분향소가 마련된 미국 워싱턴 일본대사관저를 찾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조화를 들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1970년 11월,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평화헌법 개정과 자위대 궐기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이다 할복자살했다. 이른바 ‘미시마 사건’이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유명한 소설가가 자위대를 향해 “지금 일본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위대가 일어나지 않으면 헌법 개정은 없다. 제군은 영원히 미국 군대가 되고 만다”고 외쳐댔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극소수의 비주류로 밀려난 일본의 극우는 변변한 정치적 구심점도 활동의 토대도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주류 정치 무대에서 선거에 나서서 당선되는데 성공한 극우 정치인이라면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가 사실상 유일하다. 그는 1956년 최연소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재능 있는 소설가이자 문화 아이콘이었다. 소싯적 미시마 유키오와 친분이 두터웠던 탓인지,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당당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 외에는 소수의 원외 정당이나 대중적 신뢰를 받지 못하는 과격한 단체 등이 극우로 분류되고 있다.
자민당 주류의 적통 후계자이자 귀공자인 아베 신조를 두고 ‘극우’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이유도 여기 있다. 일본의 보수는 친미가 주류다. 비주류인 반미는 사실상 현실적 입지를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일본의 친미란, 앞서 말했듯 미국의 군사력에 국방을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말과 동일했다. 본디 우파는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성향을 보이게 마련인데, 바로 그런 ‘야생성’을 거세한 독특한 보수 정치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아베는 집권 2기부터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일본을 ‘보통국가’로 만드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사명으로 삼아오지 않았던가. 외견상의 모습만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1950년대나 1960년대가 아닌 2020년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는 2012년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중국이 공격적 투자와 국방비 지출을 통해 동아시아를 넘어 인도양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던 그 무렵이다. 반대로 미국은 금융위기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부전선과 태평양전선 두 곳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을 무렵과 달리 오직 자신들만의 힘으로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억누르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미국은 대일본정책의 기조를 서서히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재무장을 허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물론 일본은 지금도 세계 3위의 GDP(국내총생산)를 자랑하는 경제 대국이다. 미국에 위협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된 중국은 티베트를 무력으로 병합하고, 지금까지도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할 수 있다며 위협하는 나라다.
최근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푸틴의 러시아가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국가 간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는 그 어떤 근거도 없다. 우크라이나에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이근 전 해군 대위가 귀국하며 현지의 동료들과 ‘다음에는 대만에서 보자’는 농담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미국으로서는 아시아 전략과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족’ ‘겨레’ ‘핏줄’
아베가 앞장섰던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은, 굳이 분류하자면 ‘반미’가 아니라 ‘친미’에 더 가깝다. 아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인도태평양 비전’과 ‘쿼드’(Quad·미국, 호주, 인도, 일본 4개국 안보협의체) 역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껏 추구해온 외교 안보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제 식민통치기를 겪은 우리로서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자극될 수 있는 일이나, ‘보통국가 일본’과 ‘제국주의 일본’ 사이의 거리는 멀 수밖에 없다.아베 신조는 731이라는 숫자가 쓰인 전투기에 탑승하며 기념사진을 찍은 바 있다. 한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기도 했다. “일본이 국가적으로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다는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발언을 내뱉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한국에서 얻게 된 악명에는 분명히 그의 책임이 있다는 소리다.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는 발언을 한 일본 정치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극우’니 ‘침략’이니 하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아베의 대외정책은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아버지 아베 신타로로 이어지는 자민당 주류의 친미 보수 노선을 계승하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민족’ ‘겨레’ ‘핏줄’ 등 우파적 주제에 집착하며 전시작전권 환수라는 명분하에 한미동맹을 무력화 혹은 종결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주요 정당에서 요직을 맡는 일도 드물지 않다. 한국은 일본보다 ‘극우’의 정치적 목소리가 큰 나라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미동맹의 가치를 지키고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잠재적 위험을 경계한다는 면에서 한국의 대미정책과 안보 전략은 일본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했다. 일본을 이기고 싶다면 일본을 잘 아는 게 먼저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