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 시대에는 기근이 발생해도…”
부여 아니라 대한민국 살고 있는데
‘책임을 묻는다’와 ‘처벌’해야 한다
문소리 발언에서 도드라진 세 가지
대형 참사에는 ‘범인’이 없다
11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 홀에서 열린 이태원참사 국정조사 촉구 국민서명운동 보고대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앞줄 가운데)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11월 2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말이다. 다음날 전국에 비가 내렸지만 그 전까지는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았다. 특히 전라남도에 가뭄 피해가 집중됐다. 그와 같은 민생 현안을 윤석열 대통령이 소홀히 하고 있다며, “왕이 몸소 몸을 움직여서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그 나름 고통을 감수한 것”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사실관계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조선 같은 왕조 시대에는 왕이 기우제를 지냈다. 하지만 기우제가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뾰족한 수가 없으니 그런 행위라도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의 영조는 수도 한양의 주요 하천이던 청계천을 준천(濬川)했다. 장마철에 대비한 홍수 예방책이었다. 조선인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관 주도로 저수지와 보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했다. 비가 너무 많이 오거나 오지 않는 현상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의 힘과 지혜를 모아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왕이 굿을 하는 것은 답답한 민심을 달래기 위한 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 정도는 ‘왕조 시대’에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기원후 3세기에 편찬된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요동반도와 한반도에 살던 여러 고대 국가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중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를 다룬 대목에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옛 부여 풍속에 홍수나 가뭄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면 바로 왕에게 허물을 돌려 혹은 ‘바꿔야 한다’, 혹은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舊夫餘俗, 水旱不調, 五穀不熟, 輒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한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부여의 특이한 풍습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100명가량이나 희생시켰다. 음란한 짓을 하거나 질투하는 부인은 모두 죽였고, 투기한 자는 죽인 후 시체를 그 나라의 남산 위에 버려 썩게 했다. 가혹한 형벌로 유지되는 신분사회면서,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제정일치 사회였거나 제정분리로 나아갔다 해도 구시대의 관습을 아직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
11월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추모 공간을 찾아 시민들이 놓아둔 추모 글귀 등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이 부여, 혹은 조선시대 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재명의 발언을 우리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다른 의도와 목적을 지니고 있는 말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빌드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재명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그가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이재명은 민생 문제로 화제를 넘겼다. “지금 우리 국민들의 민생이 너무 나빠져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가 점차 늘고 있고, 먹고 살기가 어렵고 삶이 힘들어서 온 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한다.” 지금은 이런 상황이며, “대체 정부는 국가가 왜 존재하는가, 그 의문에 답해야 할 때”라는 것이 이재명의 생각이다.
이러한 ‘국가 부재’ 상황은 비단 가난한 이들의 생활고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무총리도, 장관도, 경찰청장도, 심지어 대통령도 진지하게 사과하는 것 같지 않다”며, 이재명은 정부를 향한 투쟁을 선포했다. “민주당이 나서서 책임을 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국민과 함께 책임을 묻도록 하겠다.”
사고가 발생했으니 당연히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원인을 찾고 국가의 책임이 있다면 피해자에게 보상하고,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안전 관리, 특히 인파 사고 예방을 위한 새로운 해법을 찾거나, 만들어져 있는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기존 관행을 재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이재명이 말하는 ‘책임’은 그런 뜻이 아니다. 이재명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책임을 묻는다’는 말은 누군가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상 사고’와 ‘범인’
11월 25일 제43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배우 문소리가 한 발언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문소리는 사회자인 배우 김혜수를 향해 “작년에 미처 못 했던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묻고 허락을 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네가 얼마 전에 10월 29일 숨 못 쉬고 하늘나라로 간 게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너를 위한 애도는 이게 마지막이 아니라 진상 규명 되고 책임자 처벌 되고 그 이후에 더더욱 진짜 애도를 할게. ○○야 사랑해.”문소리의 옷가방을 날라주는 스태프였던 안모 씨는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159명의 애꿎은 사망자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사망자의 명복과 부상자의 쾌유, 그리고 유가족의 회복을 기원한다.
다시 논의로 돌아가 보자. 문소리의 발언에는 세 가지 요소가 도드라진다. ①진상 규명 ②책임자 처벌 ③진짜 애도. 즉 문소리, 더 나아가 그의 발언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이태원 참사를 다음과 같이 바라보고 있다. ①진상이 규명되지 않았고 ②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았으며 ③진짜 애도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각각은 과연 옳은가.
①부터 따져보자. 우리는 해당 사고가 발생한 지점, 시각, 원인을 모두 알고 있다.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인파가 좁은 골목길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치안을 담당하는 국가 조직인 경찰은 사고 발생 시점의 인파를 예년 수준과 다름없거나 특별하지 않은 수준으로 인지했고, 신고가 들어왔음에도 빠르고 강력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요컨대 ‘진상’은 규명됐다. 다만 우리는 ‘디테일’을 아직 다 확인하지 못했고, 그에 따른 대비책도 논의하는 과정에 있다.
문제는 ②와 같은 인식이 ①의 진행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진상 규명은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인가. 물론 형법적으로 죄가 될 수 있는 행위를 한 사람이 있다면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문소리의 발언은 그런 뜻이 아니다. 누군가는 ‘죄인’이다, 죄인이어야 한다는 어떤 선언에 가깝다.
대형 참사는 범인과 피해자가 분명히 나뉘는 범죄가 아니다. 미국 예일대 교수였던 찰스 페로의 ‘정상 사고’(normal accident) 이론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대체로 대형 참사는 작은 오류와 실수가 중첩돼 발생한다. 평상시라면 수많은 안전장치와 보호막, 절차 등이 가동한다. 그 중 일부가 망가져도 나머지 덕분에 시스템이 정상 작동한다. 대형 참사가 벌어질 때는 그렇지 않다. 작은 실수와 불운이 겹쳐 그 모든 예방책이 작동하지 않고, 최악의 가능성이 현실이 되고 만다.
그래서 대형 참사에는 ‘범인’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 어떤 한 사람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일, 그래서 그 사람 하나만 잘 했으면 됐다는 식으로 분명하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는 대형 참사의 일반적 패턴과 거리가 멀다. 일하다보면 벌어질 수도 있는 작은 사고나 고장을 못 봤거나 방치하는, 단순한 실수 내지는 아주 작은 과실이 여러 겹 쌓이면 대형 참사가 된다.
대형 참사라는 ‘결과’는 있지만 ‘원인’은 복합적이며, ‘범인’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해롭다. 누군가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참사의 원인을 조사하면, 당연히 관련자들은 자신의 실책을 최대한 감추려 들 것이다. 앞서 말했듯 대형 참사는 작은 실수와 과실이 쌓여 벌어진다. 그것들을 모두 드러내고 투명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같은 유형의 참사가 또 벌어질 수 있다. 범인을 찾고자 하는 열망, 누군가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은, 또 벌어질 수 있는 대형 참사를 막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길삼봉은 임금 자신일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임진왜란 중 벌어졌던 내란인 정여립의 난을 거론한다. 정여립과 함께 반란을 저지른 주범 중에는 길삼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여립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길삼봉은 잡히지 않았고, 뒤숭숭한 민심은 여기저기서 길삼봉의 ‘허깨비’를 소환하며, 선조는 길삼봉을 핑계 삼아 조정을 들쑤시고 피를 뿌린다. 김훈은 그 황당한 난장판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마침내 길삼봉은 누구냐? 라는 질문은 누가 길삼봉이냐? 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질문이 바뀌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길삼봉은 천 명이 넘었으나, 길삼봉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길삼봉은 임금 자신일 것이다.”
이태원 참사의 ‘책임자’를 찾아라, 그리고 그를 처벌하라, 그래야만 진정한 애도다. 이와 같은 주장은 위험하다. 길삼봉이 누구냐? 라는 질문이 누가 길삼봉이냐? 라는 질문으로 뒤집히듯, 책임자를 찾아 처벌하라는 주장은 처벌받은 자가 범인이라는 식으로 전도될 수 있다.
그런 목소리는 대형 참사의 원인을 분석하고 다른 사고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칼의 노래’의 배경인 조선시대에도 그랬거니와, 오늘날에도 수많은 조직경영론에서 연거푸 반복하고 있는 단순한 진실이다. 오히려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각자의 실수와 오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브레인스토밍 같은 것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다면 ‘작은 실수’를 모두 꺼내어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가뭄이 들면 왕이 책임을 졌다’는 발언을 한 이재명의 속마음까지 우리가 알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태원 참사를 정쟁의 소재로 삼으려는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참사 원인 규명을 ‘길삼봉 찾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정부와 경찰이 정직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초당파적 협력이 절실하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