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전성기 연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성전 파괴 후 유대교, 율법 중심 종교로 변모
헤롯 왕 시대에 유다 왕국 경제 크게 번성
유전병처럼 중세에도 ‘유대인 혐오’ 계속돼
근세 들어 절대군주들 중상주의 채택…“유대인 재발견”

카를 마르크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대표적 유대인이다(왼쪽부터). Gettyimage
대표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 카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스티븐 와인버그 같은 학자, J P 모건, 헨리 키신저,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마이클 블룸버그, 조지 소로스 같은 경제인과 정치인도 유대인이다. 예술계 쪽으로 가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이 더 많다. 화가 마르크 샤갈,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스탠리 큐브릭, 우디 앨런, 그리고 더스틴 호프먼, 해리슨 포드, 폴 뉴먼, 내털리 포트먼, 스칼릿 조핸슨, 귀네스 팰트로 같은 유명 배우도 유대인이다.
유대인이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특출난 인물이 많아도 너무 많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에 대한 서구인의 시각을 잘 나타내 준다.
1948년 가나안 땅에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중동 지역은 바람 잘 날 없는 화약고가 됐다. 1970년대 중동전쟁으로 인한 2차례의 유가 파동(오일 쇼크)이 있었고, 이로 인해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경제 현상이 초래됐다. 2023년 10월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2월 28일 발발한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은 중동을 다시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강(江)을 건너온 사람들’ 유대인의 기원
유대인은 어떤 사람들이고, 이들은 주위의 중동 아랍인들, 그리고 이란인들과 왜 이렇게 싸우는 걸까. 미국은 왜 항상 이스라엘의 편만 드는 걸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번 편에서는 유대인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표준국어대사전에서 ‘유대인’을 찾아보면, “셈 어족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유대교를 믿는 민족. 고대에는 팔레스타인에 거주했고,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다가 19세기 말에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나 1948년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세워 살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J P 모건, 헨리 키신저,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마이클 블룸버그, 조지 소로스(위부터).Gettyimage, 뉴시스
유대인은 언제부터 다른 아랍인들과 분리됐을까. 그것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하나인 수메르 문명권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이 가족과 함께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 무렵 수메르는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었는데,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히브리(Hebrew)는 ‘강(江)을 건너온 사람들’이란 뜻으로, 여기서 강은 유프라테스강을 뜻한다.
유대인의 역사나 다름없는 구약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먼저 하녀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낳고, 아내 사라로부터 이삭을 낳았다. 후일 이스마엘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의 조상이 되고, 이삭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의 조상이 됐다. 아브라함의 적자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요셉을 포함한 열두 명의 아들을 낳는다. 야곱의 아들 열두 명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된다.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고, 이후 그의 후손 전체를 이르는 이름으로 사용됐다.
열두 아들 중 요셉은 그를 시기한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왕의 꿈을 잘 해몽해 이집트의 재상이 됐다. 가나안에 가뭄이 들자,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을 이집트로 불렀다. 이후 유대인들은 400년 이상 이집트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들이 점차 강성해지자, 이집트인들은 이를 경계해 유대인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등 핍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많은 유대인이 재산을 다 잃고 노예로 전락했다. 이들을 구원해 준 이가 모세였다. 람세스 2세 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나게 된다. 이 사건이 구약에 나오는 ‘출애굽기’다. 쉬운 말로 ‘이집트 탈출기’다. 애굽, 즉 애급(埃及)은 이집트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홍해를 건너 시나이반도로 탈출하면서 유대교 신앙의 기본이 되는 ‘십계’가 탄생한다. 1956년에 제작된 영화 ‘십계(The Ten Commandments)’에서 모세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이 홍해 바닷가에서 지팡이를 땅에 내리치자 홍해가 둘로 쩍 갈라지는 장면, 그리고 람세스 2세역을 맡은 율 브리너가 마차를 타고 이들을 쫓는 장면은 아주 오래전 영화임에도 아직도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 그때 모세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방황한 이유가 가나안 땅에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레셋인은 팔레스타인인의 조상일까
구약성경에는 블레셋인이 자주 등장한다. 삼손을 유혹한 데릴라,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거인 장수 골리앗, 다윗의 망명을 받아준 아기스 왕도 모두 블레셋 사람이다. 이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의 조상이다. 팔레스타인은 성서에 ‘블레셋’, 라틴어로는 ‘팔라이스티나’라고 불렸고, 가톨릭에서는 ‘필리스티아’라고 한다. 블레셋은 고대 가나안 지방의 지중해 연안 지역 연맹체인 5개 도시(가자, 아스글론, 아스돗, 에글론, 갓) 연맹체를 말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들은 에게해나 크레타섬 등에서 고대 미케네 철기 문명을 건설한 그리스계 해양 민족으로, 이스라엘인 등 셈족과 구분되고 반은 물고기, 반은 사람 모양을 한 ‘다곤신’을 믿었다.하지만 현재의 팔레스타인인이 고대의 블레셋인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고대 블레셋인의 DNA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유대인 등 셈족들과 많이 섞여서 유전적으로는 현재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보다는 오히려 원래 혈통의 유대인과 가깝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구약성경 사사기부터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적대세력으로 등장한다. 기원전 12~11세기경의 사건으로 추정되는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이야기의 데릴라가 블레셋인이다. 영어식 발음은 ‘딜라일라’로, 가수 조영남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데릴라는 유대인 영웅 삼손의 괴력이 머리카락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내고 삼손의 머리카락을 다 잘랐다. 힘을 상실한 삼손은 블레셋인들에게 잡혀 눈이 뽑히고 그들의 포로가 된다.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는 블레셋인들이 다곤 신전에서 종교의식을 올릴 때 삼손이 신전 기둥을 무너뜨려 모두 신전에 깔려 죽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기원전 10세기경 다윗 왕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 시대에 이스라엘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구약성경 사무엘기에는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과 베들레헴 출신 양치기 소년 다윗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골리앗이 이스라엘군에 일대일로 맞서 승부를 가리자고 소리치자, 다윗이 나서 돌멩이를 물매(sling)로 던져 골리앗의 이마에 맞힌 뒤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벤다.
다윗은 왕이 된 후 이스라엘 보병, 특히 궁수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해 말과 전차가 주력인 블레셋 군대와 맞서 싸웠다. 결국 그는 블레셋을 제압하고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통합해 강력한 통일 왕국을 이룬다. 이때부터 ‘다윗의 별’이 유대인의 상징으로 쓰인다. 육각성(六角星) 또는 헥사그램(hexagram)이라고도 하는 이 표지는 삼각형 두 개를 엇갈리게 포개놓은 모양으로, 본래 ‘다윗왕의 방패(Magen David)’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비롯됐다. 다윗 왕은 여부스족의 성곽도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이 역사에 등장한다. 다윗은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를 차지함으로써 인도와 아라비아, 이집트 등과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할 수 있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다윗 왕과 그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났다. 솔로몬 왕은 ‘아가서’ ‘잠언’ 그리고 ‘전도서’ 등 세 권의 성경을 집필하고 7년에 걸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다. 이때 신전에 십계명 석판 두 개를 안치한 언약궤가 마련돼 유대인들에게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게 된다. 솔로몬 왕은 이집트 파라오의 딸과 결혼해 이집트와 동맹을 맺은 덕분에 유프라테스로부터 이집트 국경에 이르는 넓은 땅을 통치했고, 페니키아와 힘을 합쳐 해상무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페니키아는 아라비아반도를 넘어 동부 아프리카, 멀리는 인도양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40여 년을 통치했던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됐다. 기원전 9세기 두 나라가 전쟁을 하면서 점차 약해져 가는 사이, 중동 지역에 아시리아가 부상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기원전 721년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도 아시리아 사르곤 2세에게 패해 멸망한다. 아시리아는 멸망한 이스라엘 왕국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이때 잔류한 이스라엘인과 아시리아인들 간의 혼혈 정책이 이뤄졌는데 이 혼혈인이 성경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이다. 유다 왕국 역시 아시리아의 침략을 받았으나, 마침 아시리아에 전염병이 돌아 패망을 피할 수 있었다.
주변 강대국 부상으로 쇠락한 이스라엘
기원전 601년 중동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신바빌로니아가 유다 왕국을 침략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언약궤에 안치됐던 모세의 십계명 석판도 소실된다. 이때 4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데 이를 성경에서는 ‘바빌론의 유수(幽囚)’라고 한다. 바빌로니아에 가지 않은 유대인들도 이집트와 페니키아 식민지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를 유대인의 1차 이산(離散, diaspora)이라고 한다. 신바빌로니아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지금의 이란)에 의해 멸망한다. 페르시아는 아시리아제국과는 달리 속국에 관용을 베풀었다. 바빌로니아에 끌려갔던 유대인들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고대 시대 유대인과 페르시아인(이란인)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성전이 파괴되자 유대인들은 성전을 찾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믿음을 키우고 율법을 지켜나갔다. 유대교가 성전 중심에서 율법 중심의 종교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제 없는 회당인 시나고그(synagogue)에서 랍비를 중심으로 신자들끼리 율법 낭독과 기도를 하는 예배 의식이 시작된다. 이후 시나고그는 유대인 생활의 중심이 됐다.
기원전 3세기,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면서 유대인은 알렉산더 제국에 복속된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건설 등에 유대인들을 동원했다. 이때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지중해를 넘어 중앙아시아까지 알렉산더 제국의 각 도시로 이주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 진출하는 계기가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으로 가나안의 유대인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일정 수준의 자치권이 허용됐다. 기원전 200년경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던 시리아 왕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시리아 왕국은 처음에는 유다 왕국의 자치를 허용했지만, 안티오쿠스 4세 때 유대인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유대의 종교의식을 금지하는 등 탄압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에 유대인들은 마카비 5형제를 중심으로 저항을 시작했고, 기원전 164년 예루살렘을 수복하면서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100년 동안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나라인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해 다스려졌다. 마카비 가문의 조상인 하스몬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가나안 땅과 멀지 않은 이탈리아반도의 로마는 기원전 3세기부터 점점 강성해지며 제국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로마에 대항하기보다 보호를 받으면서 존속하는 쪽을 선택하고,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속국이 된다. 로마인들은 처음에 유대인들에게 관대했다. 기원전 37년부터는 유다의 자치를 허락하고 헤롯을 유다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 왕은 상업과 광업을 일으키고 광대한 지역에서 세금을 거둬 로마와 나누었다. 예루살렘에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이 왕궁을 건설했는데 이를 ‘헤롯의 성전’이라고 한다. 헤롯 왕 시대에 유다 왕국의 경제는 크게 번성했다.
예수의 탄생과 기독교의 태동
이 시기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예수(Jesus)의 탄생이다. 예수의 탄생은 기독교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연대(서기, AD)는 6세기 로마의 수도승 디오니시우스가 ‘예수의 탄생을 원년으로 삼는’ 연대 체계를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물론 그 당시 추정 오차로 인해 정확한 예수의 출생 시기를 BC 6~4년으로 추정하지만 말이다. 유대교는 원래 상부상조를 실천하는 사랑의 종교였지만, 그 당시 이런 유대교의 본질은 약해졌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서로 사랑할 것을 설파한 사람이 예수다. 예수(Yeshua)는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Yehoshua)의 약어다. 예수의 다른 이름 그리스도(Christ)는 그리스어로 메시아를 일컫는 크리스토스(kristos)에서 나온 말이다.예수가 메시아로 활동한 시기는 헤롯 왕이 죽고 얼마 지난 뒤 유다 지역이 유대인 자치 통치에서 로마제국의 직접 통치로 바뀐 때였다. 예수는 서기 27년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민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유대교의 배타적 선민사상과 율법주의에 비판적이었다. 율법 대신에 사랑, 믿음, 소망을 강조하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 바리새파 등 당시 유대의 기득권층은 예수를 위협적 존재로 여기고, 예수를 재판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내몰았다. ‘탈무드’에는 “예수가 마술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켜 배교하게 했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됐다”라고 쓰여 있다. 이 사건은 훗날 기독교인이 유대인을 박해하는 근거가 됐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에서는 지금도 예수를 선지자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보고 존경한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산(diaspora)
로마시대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역과 상업 분야에서 경쟁한 것도 그 이유였지만, 세계 시민주의를 지향하는 그리스인이 배타적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을 좋아할 수 없었다. 서기 66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인이 유대인을 학살했는데 로마 수비대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이에 유대인들이 로마 수비대를 공격했고 로마인과 유대인 간, 그리스인과 유대인 간의 전쟁으로 확대됐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은 함락됐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됐다.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인의 두 번째 반란은 13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다. 로마가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인 할례를 금지한 데다가,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주피터 신전을 세우자,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135년 로마군에 의해 반란은 무참히 진압된다. 두 차례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으로 유대인의 나라는 완전히 없어졌다. 유대인의 3분의 2가 죽었고, 나머지도 가나안을 떠났다. 본격적인 유대인의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유대인의 2차 이산이라고 한다.
이산 이후 유대인들은 정착 지역에 따라 아시케나지(Ashkenazi) 유대인, 세파르디(Sephardi) 유대인, 그리고 미즈라흐 유대인으로 분류된다. 아시케나지 유대인은 이산 이후 독일, 러시아 등 동유럽에 정착한 유대인을 말한다. 지금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 대부분이 아시케나지 유대인이다. 세파르디 유대인은 이산 이후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유대인을 말한다. 이들은 1492년 스페인이 통일되자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돼 암스테르담과 브라질 등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브라질에서 다시 맨해튼섬 뉴암스테르담, 즉 지금의 뉴욕으로 이주한다. 미즈라흐는 중동 지역의 유대인들을 말한다. 미즈라흐는 ‘동방 사람들’이란 뜻으로, 바빌론의 유수 이후 이 지역에 남거나 이후 이슬람 세계로 이주한 유대인들이다. 근대 이후 상하이와 홍콩의 번영을 이끌었던 서순과 커두리 가문이 미즈라흐 유대인이다.
기독교 공인과 유대인 박해
유대인들의 수난은 이들의 이산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유대인이 죽인 예수를 신으로 떠받드는 기독교가 유럽인 대다수가 믿는 종교가 됐기 때문이다.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데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거기에 더해 로마제국이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의 반열로 올라선다. 정통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가톨릭’이 기독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은 이 사건 때문이다. 이후 100년도 되지 않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가톨릭은 서유럽의 유일한 권위가 됐다.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서 처형한 유대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유대인은 로마의 시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공직자나 군인이 될 수 없었다. 토지와 노예를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농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당시 천대받는 직업인 무역, 수공업, 대부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차별과 박해가 유대인을 무역과 금융업의 전문가로 만든 것이다. 무역과 금융업이 1000년 후에 국가경제의 중심이 되고, 모든 이들이 선호하는 업종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고대(古代)가 저물고, 중세(中世)가 시작된다.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세워진 게르만 국가들도 로마를 따라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고, 봉건제(封建制)하에서도 교회와 기독교는 사람들의 삶을 좌우했다. 유대인 혐오는 유전병처럼 중세에도 계속됐다. 십자군전쟁의 광기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 이슬람교도와 더불어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다. 십자군전쟁은 기독교의 정신적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수복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14세기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도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누명을 쓰고 살해당했다.
고대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유대인은 나라를 잃은 뒤 전 세계로 흩어졌고, 만민의 종교가 된 기독교가 유럽의 최고 권위로 자리 잡으면서 유대인이 유럽에서 설 땅은 점점 좁아졌다. 중세까지도 유럽에서 유대인의 삶은 참혹했다. 유럽인은 유대인을 ‘게토’라는 곳에 격리했고, 노란 모자를 쓰고 옷에 노란 마크를 달게 해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근세로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절대군주와 근대국가가 국부를 늘리기 위해 중상주의를 표방하면서 무역과 금융업은 점차 중요해졌다. 이 방면에 유대인들만큼 특화된 사람들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들이 속한 국가는 부국(富國)이 됐다. 지금까지 고대와 중세의 유대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봤다. 다음 편에서는 근세 이후 유대인이 어떻게 사회에 진출해 주도권을 잡았는지, 그들의 활약상에 대해 알아보겠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前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現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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