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대혁명 배경 된 소금세 ‘가벨’
영란전쟁, 유럽 경제 주도권 바꾸다
아프리카 흑인 노예,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
18세기 베르사유궁전은 커피 문화의 상징
커피와 차 문화가 도자기 유행으로 이어져

청나라 당국이 광둥에 관리를 파견해 아편을 소각하고 유럽 상인들을 추방하자 영국이 이에 반발, 1840년 군함을 보내 광둥을 공격하면서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Gettyimage
오행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인류 생존에 필수적이면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 물질은 소금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인들의 봉급을 소금으로 지급할 정도로 경제적 가치가 높았다. 그래서 봉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salary’는 소금에 어원을 두고 있다. 베네치아가 지중해 무역을 지배하는 해상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소금 무역을 독점했기 때문이고, 네덜란드가 청어잡이로 부를 쌓은 것도 염장용 소금을 확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을 뒤흔든 프랑스대혁명의 배경에도 시민을 괴롭힌 가벨(gabelle)이라는 소금세가 있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식량이나 옷감으로 사용돼 온 필수 작물이 아니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은 없지만 한번 소비하면 끊기 힘든 중독성이 강한 기호성 작물이다. 일반 필수품은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지만, 기호품은 공급이 소비를 자극해 수요를 창출하는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다. 소비자의 의존성을 높이는 동시에 사회에 유행을 불러와 많이 소비할수록 더 소비하고 싶은 욕구를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상품에는 향신료, 커피, 차, 설탕, 담배 등이 있다. 기호성 작물은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세기 향신료로 시작해서, 16세기 이후 설탕, 그리고 차와 아편에 이르기까지 기호품은 국제무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여기서는 이런 상품 중 대표적 작물인 향신료, 커피, 차, 설탕에 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다.
‘후추’ 얻으려 인도 가려던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5세기 말 대항해시대는 향신료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됐다. 대체 향신료가 무엇이길래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을까. 냉장고가 없어 신선하게 음식을 보관할 수 없던 당시에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향신료를 쳐서 먹는 것이었다. 부자와 귀족들은 동방의 향신료에 열광했다.대표적 향신료는 인도의 후추,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의 육두구와 몰루카 제도의 정향이었다. 특히 인도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후추는 고대로부터 유럽에서 귀하게 여겨졌다. 14세기 초 실크로드를 보호해 주던 원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오스만제국이 발흥했고, 그들은 유럽과 동방의 무역로를 차단하고 향신료에 엄청난 관세를 부과했다. 후추 1g이 은 1g, 비쌀 때는 금 1g과 맞먹었을 정도로 귀했다.
견디다 못한 유럽인들은 15세기 말 인도로 가는 직항로를 찾아 나선다. 처음 신대륙을 서인도라 부른 것도 콜럼버스가 후추를 얻기 위해 인도로 가는 길에 발견한 신대륙을 인도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동인도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향신료를 리스본으로 가져왔고, 네덜란드 상인들이 전 유럽에 팔아 두 나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되면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협력관계는 끝이 나고, 네덜란드는 독자적으로 동인도 항로를 개척한다. 이후 발생한 포르투갈(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100년 이상 세계무역을 장악했다.
육두구는 너트메그(nutmeg)라고도 하는 검은색 종자로, 음료의 맛을 내는 첨가제로 사용하거나 잼, 젤리, 버터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중세 유럽에 처음 알려진 육두구는 17세기 네덜란드가 육두구 무역을 독점하면서 유럽에서 비싸게 거래됐다. 육두구와 함께 인도네시아의 정향도 귀한 작물이었다. 정향은 나무에서 피는 분홍색 꽃이 원료다. 꽃이 피기 직전에 꽃봉오리를 따서 햇볕이나 불을 지펴 말리는데, 말린 꽃봉오리가 못을 닮았다고 해서 정향(丁香)이라 불렸다. 영어 이름인 클로브(clove) 역시 못을 뜻하는 클루(clou)에서 나왔다. 정향은 향기가 좋을 뿐 아니라 살균력이 뛰어나 햄, 소스, 수프 등 서양 요리에 필수적으로 사용된 고급 식자재였다.
아프리카-신대륙-유럽 삼각무역의 기반 ‘설탕’
지금은 설탕이 백해무익하다며 무설탕 식품이 인기를 끌지만, 과거에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 원산지는 뉴기니와 인도 갠지스강 유역이다. 하지만 이후 유럽인들에 의해 서인도제도와 남아메리카로 이식돼 대량으로 생산된다.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두 번째 항해 때 생도맹그섬(지금의 아이티)에 사탕수수를 가져갔다. 그의 장인이 설탕 농장주라 사탕수수 농사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에 사탕수수를 심었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통합되자 네덜란드인들이 브라질에 진출해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1640년 포르투갈이 다시 독립해 브라질을 차지하자, 네덜란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을 서인도제도로 옮겼다. 처음에는 바베이도스(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나라)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했지만, 18세기에는 자메이카가 사탕수수 농업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설탕은 삼각무역의 기반이었다. 아프리카는 노동력을, 신대륙은 토지, 유럽은 설탕의 대가로 양 대륙에 공산품을 공급했다. 처음 설탕 산업으로 부를 쌓은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하지만 영국이 제동을 걸었다. 17세기 중반 청교도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선포했다. 이 조례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영국 및 영국의 식민지와 무역을 하려면 반드시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의 배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식민지인 서인도제도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던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어 영국은 바베이도스를 오가던 네덜란드 상선들을 나포했고, 이에 네덜란드 의회는 군함이 상선을 호위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양국 간 긴장 관계가 계속되던 1652년 5월 도버해협에서 네덜란드 함선과 영국 함선이 맞부딪치면서 제1차 영란전쟁이 터진다. 초반에는 네덜란드 해군이 우세했지만 갈수록 전세는 영국 쪽으로 기울었다. 두 나라는 1654년 웨스트민스터에서 종전 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를 계기로 설탕 무역의 주도권은 점차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간다. 이 전쟁은 향후 유럽 경제의 주도권을 바꾸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설탕 산업은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지만 높은 수익을 보장하기에, 면직물 산업이 발전하기 전까지 자본주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상품이었다. 설탕은 유럽인의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커피나 차의 소비를 촉진한 것도 바로 설탕이었다. 특히 차와 설탕의 조합은 획기적인 것으로 영국인들이 매일 차를 마시는 계기가 된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한 세기 만에 세 배 이상 급증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설탕은 점차 대중화돼 19세기에는 생활필수품이 된다.
설탕 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으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대거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됐다.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이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말라리아에 면역력이 있는 흑인은 사탕수수 농장에 가장 적합한 노동력이었다. 처음 포르투갈이 흑인 노예무역을 시작했으나 이후 영국인들이 이를 주도했다. 17세기 중반 교황이 노예무역을 금지하자, 가톨릭 국가들이 노예무역에서 손을 뗐기 때문이다. 설탕 외에도 커피, 담배, 면화 등 플랜테이션 농장 재배 품목이 늘어나면서 흑인 노예에 대한 수요는 계속 증가했다. 노예 상인들은 흑인 노예들을 자신들이 산 가격에 5배 이상의 가격을 붙여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팔려 간 흑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인적 노동에 시달리며 혹사당했다. 설탕 산업은 흑인들의 피눈물 속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인들의 영(靈)적인 국가(國歌)로 불리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는 영국 성공회 사제인 존 뉴턴이 1772년에 쓴 글에 곡을 붙인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로 시작되는 이 곡의 가사는 그가 과거 흑인 노예 상인으로 일했을 때 흑인들을 학대했던 것을 참회하며 고백한 글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커피’, 유럽 유행 덕에 브라질에 전파
원래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였다. 에티오피아에서 키우던 염소들이 붉은색의 나무 열매를 씹어 먹고는 밤늦도록 잠을 안 자길래 이 열매를 화로에 던졌는데 여기서 그윽한 향기가 나자 이를 꺼내 뜨거운 물에 넣어 마신 것이 커피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후 커피는 홍해 건너편 아라비아의 예멘으로 전파됐다.
원래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였다. 커피 농장에서 흑인 여성들이 커피열매를 수확하고 있다. Gettyimage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29년 커피가 유럽에 처음 들어온 베네치아에 생겼다. 영국에는 1650년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옥스퍼드에 등장했고 2년 뒤에 런던에 ‘파스카로제’라는 커피하우스가 생겼다. 유럽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그 당시 물 대신 술을 일상 음료로 마셨다. 음주 경연대회 우승자에게 상으로 술잔에 토스트를 띄워줄 정도로 그 당시 술은 음료이면서 영양 섭취 수단이었다. 건배할 때 ‘토스트’라고 외치는 관행이 여기서 생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17세기 커피가 전파되면서 커피를 물 대용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에 커피하우스가 등장한 것은 영국보다 20년 정도 뒤인 1672년이다. 중상주의를 대표하는 루이 14세 때의 재상 콜베르가 1683년 위암으로 사망하자, 사람들이 그가 쓴 커피를 좋아해서 위암에 걸렸다고 생각했고, 이후 파리에서는 커피에 우유를 넣은 카페올레가 유행하게 된다. 18세기가 되면 파리와 베르사유궁전은 커피 문화의 상징이 된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680년대에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1683년 오스만제국의 병사들이 빈 포위전에서 퇴각하면서 두고 간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1660년 왕정복고 이후 영국 지식인들은 술집보다 격조 높은 장소인 커피하우스를 즐겨 찾았다. 런던 러셀가의 ‘윌 커피하우스(Will’s Coffee House)’가 대표적인 곳이었다. 1688년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커피하우스를 개점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탄생한 회사가 로이즈(Lloyd’s) 보험회사였다. 태틀러(Tatler) 매거진도 처음에 커피하우스의 이야기를 모아서 창간한 잡지였다.
번영하던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1730년대를 정점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주된 이유는 차가 커피를 대체한 데 있다. 커피가 차에 밀린 것은 영국의 통상정책과 연관된다. 그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 수요가 늘면서 오스만제국이 유럽으로 커피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자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커피 재배에 성공하고 커피를 대량 생산해 유럽에 수출했다. 모카커피 대신 자바 커피가 유럽의 커피 시장을 장악하면서 네덜란드가 엄청난 수익을 올리자, 무역 경쟁국이던 영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수입 커피에 높은 관세를 매기고 대신 동양에서 들어오던 차의 관세는 낮췄다. 이후 커피보다 차가 더 싸졌고, 영국인들에게 차가 일상 음료가 됐다.
유럽에 커피가 확산하면서 서인도제도에도 커피나무가 이식됐다. 1727년 재해가 발생해 서인도제도의 카카오 농장이 황폐화하자, 생도맹그(지금의 아이티), 마르티니크 등 프랑스령 섬에서 커피가 대량 생산된다. 1728년 자메이카에서 커피의 황제라 불리는 블루마운틴이 생산됐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령 기아나의 커피나무가 브라질에 이식됐다. 원래 브라질에는 사탕수수 농장이 커피 농장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커피 가격이 오르면서 커피 농장이 점차 늘어났고, 19세기 초에는 브라질 커피가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된다. 이렇게 커피 산지는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인도네시아, 중남미 등지로 퍼져 나갔다.
미국 독립전쟁과 아편전쟁 트리거 된 ‘차’
차(茶)를 처음 생산한 곳은 중국 남서부, 인도 동북부, 미얀마 북부 지역이다. 기원전 4세기 진의 혜왕이 파촉을 점령한 뒤 중원으로 차가 전파되었다고 전해진다. 후한의 명의(名醫) 화타는 ‘식론(食論)’에서 차의 효용을 기술했다. 4~5세기가 되면 남조에서 일반 백성도 차를 마셨다.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럽에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에 의해 차가 처음 소개됐다. 네덜란드는 동양에서 녹차를 구매해 식민지였던 자바섬을 통해 네덜란드로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네덜란드 상류층이 즐기던 차가 점차 유럽으로 전파됐다.
미국 독립전쟁을 촉발한 ‘보스턴 차 사건’. Gettyimage
1730년대 차가 커피보다 싸지면서 영국인들은 커피보다 차를 더 많이 마셨다. 18세기 중반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중산층 소득이 증가한 것도 차의 보급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은 밀크티를 마신 것도 차의 확산에 도움을 주었다. 아침부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 식사 대용으로 혹은 휴식 때 영양 보충을 위해 밀크티를 마셨다. 이렇게 차가 대중화하면서 18세기 동안 영국인의 1인당 차 소비가 400배로 늘어났다. 영국뿐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에서도 차가 유행했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이 ‘보스턴 차 사건’으로 촉발된 것을 보더라도 영국인에게 차가 얼마나 소중한 상품인지 알 수 있다.
19세기에는 영국인의 차 의존도가 더 높아지면서 영국의 청나라 수입품 중 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90%에 육박한다. 중국과의 무역적자가 심각한 수준에 달하자 영국은 이를 메우기 위해 인도에서 아편을 생산해 중국에 팔기 시작했다. 이에 청나라 당국은 광둥에 관리를 파견해 아편을 소각하고 유럽 상인들을 추방하는 등 강경하게 조치했다. 영국은 이에 반발해 1840년 군함을 보내 광둥을 공격한다. 아편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아편전쟁은 차로 시작해서 아편으로 번진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차나 아편 같은 중독성 기호품이 세계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차 수입을 줄이기 위해 식민지에서 차를 재배하려 했고, 1875년 드디어 실론(스리랑카)에서 차 재배에 성공한다. 이후 토머스 립턴은 1890년에 실론에 차 농장을 세우고 홍차의 대량생산에 성공한다. 립턴 차는 지금도 영국을 대표하는 홍차 브랜드다.
커피와 차를 일상적으로 마시게 되면서 상류층을 중심으로 도자기(陶瓷器)가 유행했다. 처음에는 일본, 중국 등에서 도자기를 수입하다가 유럽에서도 자체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처음 네덜란드에서 델프트웨어 도기(陶器)를 만들었다. 지금도 네덜란드항공을 타면 네덜란드 집 모양의 작은 도자기를 선물로 준다. 1709년 독일의 마이센에서 유럽 최초로 자기(瓷器) 생산에 성공한 후 영국에서 동물 뼈를 섞어 구운 ‘본차이나’와 ‘퀸스웨어’라 불린 ‘웨지우드’ 자기가 나왔다. 진화론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바로 웨지우드의 외손자다. 그가 평생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웨지우드가의 부(富) 덕분이었다. 웨지우드에 이어 덴마크의 세계적 도자기 브랜드인 ‘로얄코펜하겐’이 나왔다.
소비할수록 더 원하게 되는 인간의 욕망
이렇듯 기호성 작물은 역사의 물길을 바꿨다. 향신료는 신대륙의 발견과 서유럽의 부상을 불러왔고, 설탕은 영란전쟁과 영국의 굴기를 가져왔다. 설탕과 커피는 중남미에 플랜테이션 농업을 일으켜 아프리카 흑인을 아메리카인으로 만들었고, 차는 미국 독립전쟁과 아편전쟁의 트리거로 작용했다. 필수품이 아닌 기호품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소비할수록 더 원하게 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듯, 금(金)처럼 귀했던 작물은 대량 생산되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작물이 되었다.귀하신 몸에서 평민으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제럴드 다이아몬드의 관점에서는 이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인류 덕분에 여러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종(種) 확산이라는 원대한 꿈을 실현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이들 작물만큼 인류사에 큰 영향을 미칠 작물이 다시 역사에 등장할지 궁금해진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