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계패 뒤 2연승…“침착함 빛났다”
- 6세 때 ‘마샤오춘 도장’에서 돌 잡은 영재
- 변상일 4단 준우승…“실착으로 대마 못 잡아”
- 1000여 명 출전해 화제몰이
무명의 중국 신형 거포 슌리(대회 ID는 Shunliguog)가 제5회 2016 편강-신동아배 월드바둑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제2의 커제’로 주목받고 있다.
슌리는 5월 6일 사이버오로 ‘오로 대국실’에서 열린 편강-신동아배 결승 3번기 최종국에서 한국의 강자 초코소라빵을 166수 만에 꺾고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슌리는 결승 1국에서 199수에 불계패했지만 2국에서는 195수에 불계승을 이끌어내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최종국에서는 중국 특유의 ‘만만디’ 전략으로 초코소라빵의 ‘속사포 맹공’을 우직하게 견뎌내며 시간승을 이끌어냈다.
편강-신동아배 결승 3번기는 인터넷 바둑대회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 TV를 통해 생중계돼 바둑팬들을 열광시켰다. 아프리카 TV 중계 해설을 맡은 인기 BJ(바둑자키) 프로연우는 “시간패? 오 마이 갓! 이럴 순 없어”라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는 시간패 직전까지 “골인이 눈앞이다. 백(슌리) 대마가 거의 잡혔다”며 한국대표 초코소라빵을 ‘편파 응원’했지만, 시간패가 확인되자 실제 초코소라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韓中 최정상 기사 연파
본명 대신 ‘ID’를 내걸고 승부를 겨루는 인터넷 바둑대회인 만큼, 용호상박(龍虎相搏) 힘겨루기를 펼친 우승자와 준우승자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도 높았다. 네티즌들은 프로 정상급 강자라는 사실 말고는 알려진 게 없는 고수들의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이번 대회 대국을 복기하며 결승 진출자의 바둑 스타일을 분석하는 등 ‘신상 털기’에 열을 올렸다.
‘신동아’ 취재 결과 이번 대회 우승자 슌리는 중국 저장성 출신의 퉁멍청(童夢成·20) 4단으로 확인됐다. 그는 중국 국가대표 바둑팀 감독 출신의 마샤오춘(馬曉春) 9단이 이끄는 명문 ‘마샤오춘 도장’에서 6세 때부터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바둑 영재이지만, 2012년 바이링배 64강에 올라 처음 이름을 알렸을 뿐 아직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지난해 전 세계 신예들이 참여하는 이민배에서 16강에 진출한 게 그동안 가장 좋은 결과다. 현재 중국 랭킹은 23위.
현재 세계 최강자인 중국의 커제 9단도 2014년 제3회 편강-신동아배에 출전했을 때는 무명에 가까운 신예였다. 그러나 이 대회 우승 후 바이링배(2014년), 삼성화재배(2015년), 몽백합배(2016년)를 연거푸 석권하며 세계 최강자로 등극했고, 2012년 2회 대회 우승자 안성준 6단도 우승 후 한국물가정보배 우승(2012년), 삼성화재배 8강 진출(2013년) 등 승승장구했다. 편강-신동아배가 ‘행운의 대회’로 입소문을 타면서 ‘신예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다.
‘온라인 고수’ 盤上 무예극
올해 대회에선 슌리가 ‘등용 바통’을 이어받았다. 32강전부터 슌리가 꺾은 강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문가들이 왜 그를 ‘제2의 커제’로 주목하는지 알 수 있다. 그에게 고배를 마신 예감좋은날(한국·32강), gunners(한국·16강), sundayf(중국·8강), 10scking(중국·준결승), 초코소라빵(한국·결승전 2승 1패)은 한중 양국의 최정상급 프로기사들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는 응씨배 우승자와 한국 KB리그 상위랭커, 중국 갑조리그 상위랭커 등이 포진했지만, 슌리는 고비마다 특유의 끈기와 저력을 발휘한 끝에 역전극을 일궈냈다.결승에서 패한 초코소라빵은 신인왕 출신의 변상일 4단(19, 골든벨도장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2년 최연소로 바이링배 세계대회 본선에 진출했고, 2013년 동아팜텍 신인왕, 2014년 신인왕 2연패, 한중신예대항전 우승, LG배 세계대회 16강, 2015년 LG배 챌린지스컵 우승, 삼성화재배 세계대회 8강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손종수 세계사이버기원 상무는 대회를 지켜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편강-신동아배가 기전 규모를 대폭 키우면서 한중 양국의 팬들은 물론, 정상급 프로들의 관심도 커졌고 경쟁도 훨씬 격렬해졌다. GS칼텍스배에서 우승한 이동훈 5단과 ‘포스트 이세돌 시대’의 희망으로 꼽히는 신진서 5단, 응씨배 세계대회 우승자 판팅위 9단, 이민배 우승자 구즈하오 4단 등 초강자들이 대회 초반에 탈락할 만큼 치열한 격전이 이어졌다.
이번 대회가 건져 올린 최대어는 역시 우승자 퉁멍청인데, 현재 중국 갑조리그에서도 초반 전적 3승 1패로 선두그룹에 올라 제2의 커제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중국은 30여 명의 신예 강호가 정상을 위협하는 데 반해 한국은 변상일, 이동훈, 신진서, 신민준 이외에 눈에 띄는 신예가 없어 걱정스럽다. 편강-신동아배가 신예들의 분발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해 벽두에 막을 올려 4개월에 걸친 대장정을 마무리한 제5회 2016 편강-신동아배 월드바둑 챔피언십엔 1000여 명의 프로·아마추어 기사들이 출전해 ‘사이버오로’ 대국실에서 치열한 반상(盤上)의 무예극을 연출했다.
속기전(제한시간 20분, 초읽기 30초씩 3회)에 약한 기사들은 대국 중반 수읽기에 쫓겨 무너진 반면, ‘온라인 고수’들은 안정적인 포석으로 진지를 구축한 뒤 중원(中原) 전투에서 승리하며 연승을 이어갔다. 초읽기에 몰려 던진 승부수가 패착으로 드러났을 때는 대국실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본선 3강에 오른 고수들은 예선 컷오프를 거친 12명의 실력자와 전년도 우승자 등 본선 시드를 배정받은 각국 최강자(한국 9명, 중국 6명, 일본 2명), 3명의 와일드카드 출전자와 맞붙었다.
이번 대회는 유명 한의원인 편강한의원과 ‘신동아’가 공동 주최하고 인터넷 바둑대회로는 드물게 상금 1억200만 원을 내거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내년 6회 대회는 아시아 기사들은 물론, 북미와 유럽 기사들도 대거 참여하는 온-오프라인 세계대회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인터뷰◈ ‘공포의 서팔짱’ 서효석 편강한의원장 ◈
“예의와 상생의 바둑, 정신건강 처방전”
서효석 편강한의원장은 “4개월 동안 펼쳐진 제5회 편강-신동아배 월드바둑챔피언십은 프로기사들의 도전과 응전, 창과 방패가 격렬하게 부딪친 전장이었지만,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는 승자를 축하하면서 상생의 정신과 예의가 빛났다”며 “앞으로도 바둑을 통해 인류 정신건강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 원장은 아마 바둑 6단으로,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 한국 바둑대표팀 주치의로 참가했을 만큼 열혈 바둑애호가다.
▼ 1000명이 넘는 젊은 기사들이 ‘속사포 대전(大戰)’을 치렀다.
“대회가 속기전(速棋戰)이라 속기에 익숙한 중국 선수들의 선전이 눈에 띄었다. ‘장고(長考)파’인 일본 선수들은 대국 중반에 힘싸움을 하면서 초읽기에 흔들리는 양상을 보였다. 6회 대회에서는 일본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한다. 다른 대회도 많이 열렸는데, 이번 대회에 1000여 명의 기사가 참여한 것은 고무적이다. 편강-신동아배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고, 매년 큰 규모로 발전하고 있어 뿌듯하다. 특히 이번 대회 우승자인 퉁멍청의 향후 활약상이 기대된다. 그가 편강한의원의 ‘편강탕’을 먹으면 ‘퉁총명’이 돼 커제처럼 승승장구할 것으로 확신한다(웃음).”
“이기려고 두지 않는다”
▼ 국내 대표 한의원과 전통의 잡지 신동아가 공동 개최하고 억대 상금을 내건 데다 대회가 생중계되는 등 화제를 모았다.
“바둑 애호가로서 꼭 개최하고 싶은 대회였다. 바둑으로 인류의 정신건강 향상을 돕고, 바둑이란 공통어를 통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한의원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었다. 특히 올해 대회는 85년 역사의 신동아와 함께 개최해 그 의미가 컸다. 사회의 공기(公器)이자 한국 잡지의 대명사인 신동아와 한의학의 공기(公器)를 자임하는 편강한의원이 만났으니 앞으로 명품 대회로 우뚝 자리매김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한·중·일 3국 기사들이 참여했는데, 내년부터는 전 세계 기사를 대상으로 참가 범위를 넓힐 생각이다.”
▼ 서 원장도 ‘속기파’로 알려졌는데.
“그렇다. 내 속기 습성을 간파한 양상국 9단이 대국을 지켜보다가 ‘팔짱 끼고 바둑을 둬보라’고 하기에 팔짱을 끼고 생각하며 바둑을 두니 바둑 실력이 확연히 늘었다(그래서 바둑계에선 서 원장을 ‘공포의 서팔짱’으로 부르는 이가 많다). 그런데 나는 이기려고 바둑을 두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면 상념에 잠긴 채 바둑을 둔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신도 맑아진다. 정신건강에 바둑만큼 좋은 스포츠가 없다. 젊은이들도 잔인한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것보다 바둑을 통해 정신건강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바둑과 정신건강?
“거창한 게 아니다. 1999년 미국 콜로라도 주 컬럼바인고 총기 난사사건을 기억하는가. 총기를 무차별 난사해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이 사망했는데, 범인의 어머니가 지난 3월 ‘어머니의 심판(Mother′s Reckoning)’이라는 참회록을 냈다. 어머니는 ‘아들이 고교 진학하면서 컴퓨터에 빠지고 우울증 증세를 보였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들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고 썼더라.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들을 몰랐던 거다.
미국 하버드대 등 3개 대학 연구팀이 지난해 4월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의 10%가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다고 한다. 일반인은 1인당 총기 1정을 갖고 있지만 분노조절장애자는 1인당 6정 이상의 총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언제든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총기 규제 목소리는 높지만, 정작 사람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총기 사건을 저지르지 않도록 적극 예방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야 한다. 바둑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빈손으론 만날 수 없으니…”
▼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레벨이 올라가는 살인 인터넷 게임을 즐기는 세상이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대회를 열었다. 바둑을 권하고 싶었다. 바둑에는 예의와 상생이 있다. 처음 바둑을 접하면 ‘정석(定石)’부터 배우는데, 공격과 수비에 최선인 정해진 방식으로 돌을 놓는다. 이는 나 혼자 이기는 게 아니라 상생을 하는 최선의 수를 말한다. 지더라도 재기를 노리고, 나 자신을 수양하면서 건강한 도전의식이 생긴다.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하는 과정 속에 희열과 성취감이 있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도 있다.
오죽했으면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외교관들에게 바둑을 권하고, 초등 정규 과정에서 바둑을 가르치게 했겠나. 몇 년 전 중국 프로기사 창하오(常昊) 9단과 대국을 할 기회를 가졌는데, 언젠가 시 주석과도 그런 기회를 갖고 싶다.”
▼ 스모그와 황사로 인한 중국인의 폐 건강과 인류 정신건강을 위한 대국인가.
“그렇게 되나(웃음). 같은 바둑 애호가로서 시 주석과 바둑, 그리고 정신건강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다. 그를 빈손으로 만날 순 없으니 중국인들의 폐 건강을 위한 ‘청폐(淸肺) 비법’을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