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년 약체였던 하버드대 농구팀의 돌풍을 이끌고 있는 토미 아마커(왼쪽) 감독이 경기 중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농구 재능이 남달랐던 토미 아마커는 1965년 미국의 행정수도 워싱턴 DC와 가까운 버지니아 주의 폴스처치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 고등학교의 영어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농구에 두각을 나타낸 아들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아마커는 1988년 듀크대 졸업 후 프로 진출 대신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택했다. 그는 모교인 듀크대에서 자신을 키운 은사(恩師) 마이크 슈셉스키(Mike Krzyzewski) 듀크대 감독 밑에서 코치를 맡기로 했다. 슈셉스키 감독은 1980년부터 무려 32년간 듀크대 감독으로 재임하며 듀크대를 미국 대학농구의 최고봉으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슈셉스키 밑에서 차근차근 지도자 수업을 받은 그는 1997년 뉴저지 주 시튼홀대학의 감독으로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시튼홀에서 우수한 성적을 낸 아마커는 2001년 농구 명문인 미시간대 감독으로 뽑혀 미국 농구계의 명장으로 도약할 채비를 갖췄다. 하지만 성적 부진으로 2007년 경질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런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의한 곳이 바로 하버드대였다.
공부와 농구, 두 마리 토끼 잡기
아마커가 처음 하버드대로 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이 모두 말렸다. 앞서 언급한 대로 듀크대나 미시간대와 달리 하버드대 농구팀은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들은 “하버드대에도 농구팀이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실상은 더 나빴다. 아마커가 하버드대에 부임했을 때 선수들의 실력은 들쑥날쑥했고 고참 선수들은 사실상 태업에 가까운 불성실한 훈련 태도를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실력 있는 유망주가 들어온다 해도 주전으로 뽑히기가 어려웠다. 아마커는 오직 실력으로만 선수를 기용하는 원칙주의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는 농구팀을 대대적으로 쇄신하기 위해 고학년 대신 저학년 중심으로 팀을 꾸렸다. 고학년 선수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버드대 학생들은 농구를 못한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유례없이 강도 높은 훈련 프로그램도 실행했다. 훈련시간을 2배로 늘려 선수들의 입에서 저절로 단내가 나도록 했다. 가능성 있는 선수를 찾아나서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포츠 장학금이 없는 하버드대에서 그가 홀로 유망주를 발굴하려고 몸을 사리지 않다보니 문제까지 발생했다. 아마커는 2008년 NCAA의 선수 스카우트 관련 규칙 위반으로 구설에 휘말렸다가 무혐의 처분을 받는 곤욕도 치렀다. 부임 초 학업 부담을 느끼며 반발했던 선수들도 ‘공부와 농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며 독려하는 아마커 감독의 말에 자신감을 얻으며 달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