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강제 북송되면 사형입니다, 인권변호사 대통령이 어떻게…”

탈북민 1호 변호사 이영현

  • 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caesare21@hanmail.net

    입력2022-07-2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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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우신조로 밟은 한국 땅 “촌음 아끼며 공부했어요”

    • 4전 5기 탈북민 1호 변호사

    • 故 박세일 선진통일론에 감명

    • 文 정부 탈북민 강제북송은 反헌법적 범죄

    • 북한 민주화·인권 개선이 일생의 사명

    이영현 변호사는 “북한 주민은 폭력적인 정치체제에 익숙해져 인권 의식을 갖기 어렵다”면서도 “결국 북한에도 민주주의가 정착하리라 확신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지호영 기자]

    이영현 변호사는 “북한 주민은 폭력적인 정치체제에 익숙해져 인권 의식을 갖기 어렵다”면서도 “결국 북한에도 민주주의가 정착하리라 확신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지호영 기자]

    2022년 6월 기준 한국 내 탈북민(북한이탈주민) 수는 약 3만3000명이다. 대부분의 탈북민에게 한국에서 선망받는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은 넘어설 수 없는 벽에 가깝다. 이러한 벽을 넘어 탈북민으로서는 최초로 한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이가 있다. 이영현(39)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 변호사는 1983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1995년부터 1998년까지의 북한 최악의 식량난 기간)’으로 일컫는 시기인 1997년 탈북했다. 중국에서 5년 체류하다 한 개신교 선교사의 도움으로 몽골을 거쳐 2002년 한국 땅을 밟았다. 19세 나이로 고등학교 과정에 진학해 졸업 후 연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들어가 총 4번의 낙방 끝에 ‘4전 5기’로 2019년 제9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올해부턴 법무법인 세창에서 일하고 있다. 재단법인 대한변협인권재단 사무총장, 대한변협 북한이탈주민 법률지원위원, 통일부 산하 하나원 정책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북한 인권 문제 개선 및 통일운동도 병행하고 있다.

    6월 29일 이 변호사를 서울 서초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북한 인권 개선 문제는 내 일생의 사명”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사 피하려 선택한 탈북

    북한 최악의 식량난으로 손꼽히는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7년 함경남도의 한 도시에서 촬영된 북한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이영현 변호사는 이 시기에 ‘아사’를 피하고자 탈북했다. [동아 DB]

    북한 최악의 식량난으로 손꼽히는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7년 함경남도의 한 도시에서 촬영된 북한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이영현 변호사는 이 시기에 ‘아사’를 피하고자 탈북했다. [동아 DB]

    ‘고난의 행군’ 시기 탈북했는데, 당시 삶이 어땠나요.

    “이전부터 쉽지 않은 삶이긴 했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농장에서 일하시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할머니, 저를 포함한 3형제 등 총 다섯 식구가 어머니의 외벌이에 의존해야 했죠. 어머니는 지극한 사랑으로 저흴 돌봐주셨어요. 비록 어려운 환경이지만 저 나름대로 밝게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던 이 변호사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접어들어 환경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다고 술회했다.

    “제 고향 함경도가 본디 농사짓기 척박한 곳입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엔 더 어려웠죠. 배급은 중지됐고 저와 형제들은 산으로, 들로 다니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요. 한국 속담에 ‘식은 죽 먹기’가 있잖아요? 저희 가족은 멀건, 식은 죽이 얼마나 잘 넘어가는지 매일 경험해야만 했어요. 멀건 죽이나마 먹으면 다행인 적도 많았고요. 이러다 할머니, 이웃해서 살던 삼촌이 돌아가셨고요. 말 그대로 ‘아사(餓死)’였죠.”

    탈북을 결심한 배경은요.

    “그 무렵 수많은 사람이 부지기수로 죽어 나갔어요. 저도 가만히 있었다면 같은 운명을 겪었겠죠. 어느 날 외삼촌께서 권유하시더군요. ‘삼촌 따라 중국으로 가자. 중국에 가면 거지라도 배부르게 먹는다고 하더구나. 가서 쌀 한 배낭이라도 메고 오면 남은 가족에게 보탬이 되지 않겠니?’ 그렇게 외삼촌 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너게 됐습니다.”

    강을 건너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그때가 1997년 6월 초였는데, 장맛비로 강물이 불어 있었죠. 밤 8시 무렵 외삼촌과 강에 뛰어들었는데 외삼촌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어요. 저는 죽지 않으려 발버둥 쳐 겨우 살았습니다. 외삼촌은…. 그것이 생전 외삼촌을 본 마지막 순간이에요. 식량난이 심해 외삼촌도 1주일 전부터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어요. 콩비지로 겨우 허기를 달래는 정도였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불어난 강을 건너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구사일생으로 랴오닝(遼寧)성 훈춘(琿春)시에 도착했습니다. 조선족자치주에 자리한 도시죠. 한족·조선족 집을 전전하다 한 선교사를 만났어요. 재미(在美) 한인 선교사로 중국에 단기 선교활동을 위해 오신 분이었죠. 이분의 도움으로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에 거주하던 한 조선족 부부와 인연이 닿았어요. 이들 집에 살면서 막노동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 시장의 면(麵) 한 그릇이 약 2위안(元)이었는데, 하루 종일 일하면 7~8위안 정도 손에 쥘 수 있었죠.”

    공부를 하긴 힘든 환경이었겠네요.

    “원래는 학교를 못 다녔죠. 그러다 저를 도와주신 선교사께서 랴오닝성 단둥(丹東)의 조선족 중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셨어요. 탈북민 신분을 숨기기 위해 한족으로 위장했죠. 문제는 수업이었어요. 수년간 중국 생활을 해서 중국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학교 공부는 차원이 달랐어요. 중국어 교재를 해독하지 못하고 선생님의 질문에 동문서답하니 의심의 눈초리가 늘어났어요. 학교에서 호적 기록을 제출하라고 독촉해 왔죠. 결국 야반도주하듯 학교를 나와야만 했어요.”

    이 변호사는 이후 옌볜(延邊)의 다른 학교로 적을 옮겼다. 그에게 도움을 준 선교사가 설립한, 고아원을 가장한 탈북민 보호시설이었다. 이곳에는 한족, 조선족, 탈북민이 섞여 살고 있었다.

    하루 차이로 강제 북송 피해

    한국엔 어떻게 오게 됐나요.

    “옌볜에서의 학교생활도 매일 좌불안석이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중국 공안(公安)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죠. 선교사님이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갈 것을 권유했고 방법을 찾아줬어요. 이른바 ‘브로커’를 통한 것이었죠. 전 몽골을 경유하는 길을 택했어요. 걸어서 중국과 몽골 국경까지 가고 주(駐)몽골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 루트였죠.”

    한국 입국 과정은 순탄했나요.

    이 대목에서 이 변호사는 “자신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했다.

    “한창 입국을 준비하던 무렵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002년 3월 25일 탈북민 25명이 베이징(北京) 주재 스페인대사관으로 뛰어들었죠. 그 장면이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 중계됐는데, 살펴보니 그중에 저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도 있더군요. 정말 놀랐죠. 하루빨리 중국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를 떠나 베이징까지 열차로 이동한 후 다시 몽골 국경을 넘었습니다. 한국대사관 도움으로 임시 여권을 받아 한국에 올 수 있었고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제가 떠난 다음 날 학교로 공안 100여 명이 들이닥쳐 교직원·학생을 연행해 조사했다고 해요. 만약 조금만 더 늦게 떠나왔다면 전 강제 북송됐을지도 모르죠. 찰나의 차이로 인생이 바뀌었어요.”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감회가 컸겠어요.

    “한일월드컵 열기로 뜨겁던 2002년 5월 17일이었죠.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어요. 가슴이 뛰었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 안도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가슴 한구석이 미어졌죠. 중국에서 걸인으로 지내거나 강제 북송당해 생명을 위협받는 북한 동포들 생각이 나서요.”

    복잡다단한 심경으로 한국 땅을 밟은 이영현 변호사는 이때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저는 정말 행운아라 생각했습니다. 탈북민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한국 땅을 밟았으니까요. 한편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탈북민들의 꿈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북한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죠.”

    입국 후엔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조사를 받은 후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에 입소해 한국 생활 적응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듬해(2003) 부산 소재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일반적인 한국 학생의 경우 대학교 2학년일 나이에 고등학교 공부를 시작한 거죠.”

    마지막 기회에 변호사 자격증 거머쥐어

    법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저 혼자 배부르게 사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어요. ‘공익(公益)’을 추구하고 싶었죠. 무엇보다 압제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고 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는데, 성경을 해석해서 얻은 결론도 같았어요.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구한 요셉이나 모세와 같은 사명을 제게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죠. 또 탈북민 문제, 북한 인권 개선 문제는 모두 ‘법(法)’으로 연결돼 있기도 했고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연세대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변호사가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고난의 연속이었죠. 난이도가 비교될 수준이 아니었어요. 난해한 법률 용어와 법전을 이해하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어요. 담당 교수님께 허락을 받고 강의 내용을 녹음해 다시 들으며 학습했죠. 원래 꿈은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저에겐 너무 높은 목표였어요. 대학 졸업 후 한 해 재수를 거쳐 대구에 있는 경북대 로스쿨에 입학했죠. 국립대라서 등록금이 저렴했고, 무엇보다 제가 대구엔 연고가 전혀 없었기에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어요.”

    이 변호사는 대학과 로스쿨 시절 수많은 은사(恩師)를 만났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로 2017년 작고한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를 꼽았다.

    고(故) 박세일 교수와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

    “학부 시절 지도교수의 소개로 박세일 교수님을 알게 됐습니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이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죠. 박세일 교수께서 한반도 선진화론에 이어 선진통일론을 설파하셨어요. ‘한반도가 변방의 역사를 끝내려면 남북한은 반드시 통일돼야 한다. 북한 지역 선진화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는데, 감동이 밀려들었어요. 그 후로 박세일 교수가 쓰신 책도 구해 읽고 강연도 들었죠. ‘선진통일’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신 경세가(經世家)이자 국가 지도자이셨건만 현실 정치에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쉬웠어요. 돌아가셔서 더는 뵙지 못하는 것도 슬프고요.”

    변호사가 되는 과정도 험난했다고요.

    “로스쿨에 입학한 게 2010년이에요. 3년 과정을 이수한 후 졸업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변호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데, 저는 졸업부터 1년 더 걸렸어요. 변호사시험은 총 5번까지 응시할 수 있어요. 저는 내리 4번 낙방하고 ‘마지막 기회’이던 5번째 시험에 합격해 ‘탈북민 제1호 변호사’가 될 수 있었어요. 마지막 시험 땐 정말 절박했어요. 정말 촌음(寸陰·매우 짧은 시간)을 아껴가며 공부했죠. 수시로 ‘합격’ ‘합격’이라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습니다.”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라더니…

    이영현 변호사는 문재인 정권 시절 탈북민 강제 북송에 대해 “명백한 헌법·국제법·국내법 위반”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은 2019년 11월 동해상으로 남하했다가 강제 북송된 어민 2명이 타고 있던 북한 어선. [동아 DB]

    이영현 변호사는 문재인 정권 시절 탈북민 강제 북송에 대해 “명백한 헌법·국제법·국내법 위반”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은 2019년 11월 동해상으로 남하했다가 강제 북송된 어민 2명이 타고 있던 북한 어선. [동아 DB]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요.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 변호사는 “문재인 정부에서 북한 인권 정책은 없었다”고 단언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헌법상 북한 주민도 엄연한 한국 국민이에요. 인권은 전 인류의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고요. 이웃 사람이 강도를 당하는 등 위험에 빠지면 돕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같은 동포가 독재 체제하에서 신음하고,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건 말이 안 돼요. 이 연장선상에서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북한 인권 문제를 정쟁(政爭)의 도구로 삼는 한국 정치권에도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른바 진보 정권이 집권하면 북한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북한 인권 문제를 쉬쉬해요. 보수 정권은 북한 인권 문제에 ‘진정성’이 없어 보이고요.”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문재인 정부의 탈북민 처리 문제로 옮아갔다.

    문재인 전 대통령 시절 발생한 어업지도 공무원 피살 사건, 탈북민 강제 북송이 논란이 되고 있어요.

    “진상 규명이 더 필요하지만 만약 자국 공무원을 사살하고 시신까지 공개 소각한 행위를 정부가 수수방관했다면 책임자를 처벌해야겠죠. 자국민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북한에 ‘우리 국민을 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탈북민 강제 북송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탈북민으로서 정말 화나죠. 명백히 헌법, 국제법, 국내법(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 위반입니다.”

    이 대목에서 차분하던 이영현 변호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강제 북송당하면 열에 아홉은 사형당합니다. 공무원 피살 사건은 한국 정부가 자국민을 사지(死地)로 내몬 거예요. 더 경악스러운 건 명색이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이러한 일을 방조했다는 점이에요.”

    당시 정부 관계자는 북송 이유로 그들이 살인 등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탈북민 지원 법령 등 현행법은 살인 등 반(反)인륜 범죄를 저지른 탈북민의 처우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어요. 정착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게 돼 있죠. 처벌을 하더라도 한국 수사기관이 수사하고 법원이 판결해야 해요. 탈북민도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니까요. 중대 범죄자라는 북한 측의 주장만 일방 수용해 북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탈북민 및 북한 주민 인권 개선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여요. 이를 위한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요.

    “변호사로서 전문성을 높여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나아가 탈북민 보호, 북한 인권 개선·민주화를 위한 연대를 구축하길 바라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북한을 민주화해 김씨 일가 치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제 일생의 과제예요.”

    이영현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북한에선 김씨 정권 수립 후 오늘날까지 단 한 번도 시민운동이나 항쟁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 주민은 공개처형, 정치범수용소 등이 상징하는 폭력적인 정치체제에 익숙해져 자유, 민주주의, 인권 등의 인식을 갖기 어려워요. 하지만 역사의 보편적 흐름을 살펴볼 때, 시기의 문제는 있을 수 있으나 결국 북한에도 민주주의가 정착하리라 확신합니다. 저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묵묵히 나아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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