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에는 이제나저제나 연꽃 필 날을 초조하게 기다렸던 저자가 한밤중 달려가서 수련을 만나고 왔다는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아마조니카빅토리아’ 수련이 있는 충청도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의 “오늘 밤이다”는 암호문 같은 전갈을 받고 망설임 없이 밤길 떠나는 모습은 떠올릴수록 감동적인 데가 있었다. 감동한 마음에 글로 덧붙일 말을 찾기가 좀 구차스러울 정도였다.
사흘 밤만 꽃피우는 그 수련의 운명도 절박한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그 운명을 만나기 위해 밤길 떠나는 중년 사내의 모습도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읽혔다. 어떤 비즈니스 성과도, 어떤 경제적 이익도, 어떤 세속적 목적도 없이 연꽃을 만나러 먼 길 떠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목적 없는 순수한 예술적 열망에 휩싸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에 고양되는 존재인 것이다.
문득 내가 매일같이 만드는 문학·예술 책들이 아름다움에 고양되는 인간을 위한 작업이란 각성이 찾아들었고, 본연의 일상 업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중에서)
세상살이, 밥벌이의 어려움으로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읽는 미당 서정주의 시다. ‘아마조니카빅토리아’ 수련 사진을 본 날, 다시 한 번 읊조린 서정주의 시는 업무로 다소 연약해진 마음의 벽을 쳤다.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이 어디 연꽃을 소유했다고, 연꽃과 만난 시간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환산하겠다 하겠는가. 그저 만났을 뿐인 것이다. 그저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했을 뿐이다.
수련은 무슨 말을 저렇게 낮게 속삭이고 있을까
몇 달 전 만났던 수련 그림도 떠오른다. 일본 나오시마 지추미술관에서 본 클로드 모네의 수련. 가로 폭이 6m나 되는 모네 그림을 보기 위해서 신발을 벗고 하얀 미술관 바닥을 맨발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모네의 수련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 수련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수련이 내게 조금씩조금씩 다가오는 형상이었다. 가까이 가니 수련의 형체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추상적인 물감덩어리가 보일 뿐이었다. 뒷걸음질치면 선명하게 빛이 되어 반짝이는 수련이 보였다. 클로드 모네가 백내장을 앓게 된 이후 그린 이 수련 그림을 “종교적인 무엇을 뛰어넘는 개념의, 만다라와 같은 상징”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미술관 소유주의 말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수련은 무슨 말을 저렇게 낮게 속삭이고 있을까?// 다채색의 빛으로 흩뿌려지는/ 수련의 말을 듣고 모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공기 중에/ 꽃불처럼 터지는 그 말들을/ 화폭에 그려 나갔다” (채호기, ‘모네의 수련 1’ 중에서)
시인은 모네 그림에서 수련의 말들을 들어보려 한다. 나도 수련이 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모네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으니 어쩌면 무슨 말인가를 들었던 것도 같다.
산업화로 버려진 작은 섬, 나오시마에 문제적인 미술관을 세우고,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도 환상적인 일이지만 버려진 폐가를 이용해 집의 특성을 살리는 작품으로 한 채 한 채가 미술관 역할을 하는 것은 경이로웠다.
무엇보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지은 나지막한 베네세 호텔 침대에 누웠을 때, 유리창으로만 된 한쪽 벽면에 가득 찬 바깥 풍경은 흔하게 보던 하늘과 바다, 나무와 풀, 꽃이었을 뿐인데 어느 미술작품 못지않은 경이로움을 안겨주었다.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보려고 하니 보인 것이다. 내가 나오시마의 모든 것을 보고 마음에 새기려 작정하니 한 송이 꽃도 한 그루의 나무도 특별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 유리창 벽을 열어젖히자 날던 새가 베란다까지 그대로 들어와 앉아 울었다. 나만을 위해 나오시마가 편집해준 자연 풍경과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실리지 않으면 그저 풍경이지만, 마음에 새기니 아름다움이 되었다. 몇 달이 흘러도 눈 감으면 나오시마에서 본 모네의 수련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쁘다’는 ‘기쁘다’의 다른 이름이었다
밥벌이의 신산함과 힘겨움에 비하면 시나 그림,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태평한 일인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추구를 멈추는 순간 삶의 빛은, 윤기는 금세 빠져나간다. 나는 푸석거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시의 자리, 그림의 자리, 삶의 진흙탕 속에서도 꽃피우는 것들을 붙잡고 싶었다.
이태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 올 때 갖고 있던 1만여 권의 책을 정리했다. 한 번도 들춰보지 않으면서도 정리도 못하는 옛날 책들이 서서히 그 부피의 위용을 자랑하던 때였다. 그 책들을 볼 때마다 기쁨 반 한숨 반이었다. 기쁨이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책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책 마니아니까 그렇다 쳐도 한숨은 언제 읽나, 언제 찾기 쉽게 정리할까 하는 마음이 숙제처럼 짓누르던 기운 때문이었다. 이사를 결정하면서 책 정리도 과감히 시작했다. 자료용으로 볼 만한 책들은 도서관에서 검색해서 찾아보기로 힘들게 마음먹고 정리를 시작했다. 새집에서는 책이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책장마다 여유 있게, 잘 보이게 꽂혔다. 언제나 읽어도 좋은 책들이었다.
책장을 방과 거실에 흩어 세워놓고, 동선 따라 보고 싶을 때 보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한 권 한 권이 자기 색깔을 보이며 선명하게 제목을 드러냈다. 책을 꺼내 읽지 않고 제목만 연결해서 읽어보는 제목놀이를 하는 날이 많았다. 침실에는 시집만 꽂힌 책장을 놓았다. 600여 권의 시집이 꽂힌 책장이 놓인 침실에서 잠들고 잠 깨고 싶었다.
이사 온 이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맨 먼저 하는 일은, 아직 잠이 덜 깬 몸으로 비몽사몽결에 무작정 손을 뻗어 잡히는 한 권의 시집에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시를 읽는 것이었다.
사는 동안만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
어떤 날은 다소 쓸쓸한 정조의 최승자 시집이 잡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상상력으로 힘 솟게 하는 남진우 시집이… 매일 다른 느낌의 시를 만났다.
“어느 때인가는 너무 아름다워서 만져보면/ 모두가 造花였다/ 또 어느 때인가는 하염없이 흔들리는 게 이뻐서/ 만져보면 모두가 生花였다 造花보다 이뻤다/ 이제까지의 내 인생에서/ ‘이쁘다’는 ‘기쁘다’의 다른 이름이었다” (최승자, ‘더더욱 못 쓰겠다 하기 전에’ 중에서)
이 시를 읽은 날은 시구대로 “더더욱 써보자, 무엇을 위하든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으로 뭔가 써보기도 했다.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남진우, ‘타오르는 책’ 중에서)을 읽은 날엔 출근해서 만든 책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상상을 하며 열정적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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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 공간에서 아침에 읽은 시어를 되새기는 건 내가 생계에 목맨 비루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움에 경도된 사랑스러운 인간일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오래 남겠지만, 나는 사는 동안만 그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 사는 동안 시를, 그림을, 자연을, 꿈을 부르겠다, 불러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