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호

[에세이] 나의 마지막 행운

  • 부희령 수필가

    입력2025-01-10 09: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Gettyimage]

    [Gettyimage]

    어머니는 신경외과 병동의 4인용 병실에 누워 있었다. 손목이 보호대로 묶인 채 허공을 바라보며 횡설수설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무거운 둔기로 마음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어머니가 자꾸 몸을 일으키려 하고, 수액이 연결된 바늘을 잡아 빼려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우선 보호대를 풀면서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으나,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간호사인 줄 알고 연신 고맙다고만 했다. “엄마, 엄마” 여러 번 부르자 비로소 “아, 우리 딸이 왔구나” 하며 힘없이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준비되지 않은 시련 마주할 때

    보름 전쯤 어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방치했는데 점점 통증이 심해져서 큰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척추 골절이었다. 주위 신경을 누르는 뼛조각을 제거하고 인공 척추를 넣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즉시 입원해 수술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 병동이라 보호자는 필요 없다고 들었는데 이틀 뒤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미약한 섬망 증상을 보이니, 보호자가 들어왔으면 한다는 이야기였다. 가족들과 의논 끝에 내가 병실로 들어가기로 했다.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에는 너무 놀라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저녁 식사 시중을 들고 어머니가 약을 삼키는 것까지 확인한 뒤, 잠시 병실 안을 돌아봤다. 세 개의 침상에 있는 환자 모두 튜브로 유동식을 공급받는 상태였다. 완전히 의식이 없지는 않은 듯 눈을 뜨고 계신 분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고연령의 여성 노인이었고 수척해 보였다. 수액 줄에 연결된 채 낙상 방지를 위한 난간에 둘러싸여 누워 있는 모습이 새장에 갇힌 새들 같았다. 처음에 병실에 들어섰을 때 묘한 정적이 감도는 느낌이 들었던 게 바로 그런 이유였다. 어머니가 밤마다 집에 간다고 소란을 피운 탓에 크게 의식이 거의 없는 중증 뇌졸중 환자들의 병실로 옮겨진 듯했다.

    밤이 돼 병실 전등이 꺼진 뒤 보호자용 긴 의자에 누우니, 황폐함이 뿌옇게 몰려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마주했던 어머니의 참담한 모습이 떠올랐고, 멍든 곳을 다시 건드린 것처럼 묵직한 아픔이 느껴졌다. 저 멀리 어느 병실에선가 고통을 호소하면서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나 아프면 애타게 찾는 건 엄마구나.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 세상에 있거나, 혹은 이미 없는 엄마를 부르게 되는구나. 뜬눈으로 밤새 뒤척였다.

    환자로든 보호자로든 병원에서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고통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아픈 사람뿐이고, 아픔을 다루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니까. 고통은 몸에 한정된 사태가 아니다. 몸의 고통은 곧 마음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목격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병원에서 지내면서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있다는 초조함은 오히려 무뎌졌다. 날마다 눈앞에 닥치던 골칫거리나 일상의 과제는 괴로움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증거임을 깨달았다. 축복이었다. 건강하고 무탈한 삶이 지속돼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노쇠한 몸 지배하는 어린아이 마음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는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신마취하는 큰 수술을 받은 뒤이고, 한 달 이상 척추를 보호하는 조끼를 착용해야 했다. 집에 있는 것보다 24시간 환자를 돌봐주는 시스템을 갖춘 곳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적당한 시설을 찾아봤다. 어머니는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가려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함께라면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인지 기능에 약간 문제가 있을 뿐 아무 지병도 없는 건강한 상태였으나, 어머니 때문에 요양병원의 2인실로 함께 들어가게 됐다.

    다음 날부터 영문도 모르고 환자 신세가 된 아버지가 끊임없이 딸들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지갑도 없이 낯선 곳에 버리고 갔다며 호통을 쳤고, 택시를 불러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혼자 걸을 수 있게 되면 곧 다시 모셔 온다고 진정시키고 설득했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수중에 지갑이 없어도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휴대폰을 붙들고 요양병원 밖 세상에 있는 자식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됐다. 아버지와 하루에 서너 번씩 통화를 하니 입맛도 잃고 잠자리도 편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 자식을 고아원에 떨어뜨려 놓고 온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부모를 이렇게 사랑했나? 그들의 괴로움이 곧 나의 괴로움일 정도로? 예상치 못한 또 다른 통증이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달 뒤 어머니는 보행기에 의지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돼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직접 끼니를 챙기기 힘든 상태여서 평일에는 요양보호사가, 주말에는 큰언니와 내가 교대로 돌보게 됐다. 어쩌다가 가까운 동네에 산다는 이유로 부모를 돌보는 역할을 맡았지만, 나는 원래 그다지 살뜰한 자식은 아니다. 아들을 바라면서 낳은 여섯 명의 딸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물론 자식이 여섯이나 되면 부모로서는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터다. 어릴 때는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 부모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삶을 겪어왔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만 생각했고, 내가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나뿐만 아니라 철없는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졸업 후 일찍부터 내 앞가림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모와 멀어졌다. 어쩔 수 없이 이즈음, 신체적으로는 노쇠했으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아진 부모를 자주 대하다 보니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그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다. 돌이켜 보면 내 부모의 세대만큼 곡절과 역경이 많은 삶을 살아온 이들도 드물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 전후의 혼란한 상황에서 10대 시절을 보내고, 6·25 전쟁으로 나라가 반쪽이 된 상황에서 최악의 가난을 겪은 이들이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휴전선 이북이 고향이라 타의에 의해 실향민 신세가 됐다. 아흔이 넘은 두 사람의 가장 절실한 소망은 고향 땅을 한 번 밟아보는 것이다. 아마도 분단을 자신의 상처로 아파하는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부모 향한 냉기가 사라지면

    며칠 전에 저녁을 챙기고 부엌 정리를 끝낸 뒤 어머니 아버지에게 집에 간다는 인사를 했다. 그날따라 아버지가 어둑어둑해진 문밖으로 따라 나왔다. 그러더니 불쑥 “밤길에 혼자 갈 수 있니? 뭘 타고 갈 거니?” 물었다. 그렇게 늦은 시각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시라고 안심시켰다. 걷다가 골목 모퉁이에서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여전히 현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지팡이를 짚어 비뚤어진 자세로 선 채 이제는 흐릿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뭉클했다. 예전에 우리는 서로 심상한 안부 한 마디를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무뚝뚝하다 못해 차갑던 내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어느 쪽이 진짜 내 아버지인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일었다. 주말마다 부모를 돌보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는 게 짜증스럽기도 했다. ‘왜 여러 자식 중 하필 나에게? 가장 못나고 가난해서?’라는 억울함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분명한 ‘왜’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걸 찾으려 한다면 온통 억울한 마음만 남는다. 그날 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을 걸으면서 문득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내게 부모를 돌볼 시간이 주어진 것은 행운이라는 사실을. 오래 품고 있던 차갑고 뾰족한 마음이 녹아 사라질 기회라는 것을.

    비록 바라지 않던 자식이라 해도 나의 부모는 책임을 다했다. 걱정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부모는 잠재의식에서 나와 자아가 중첩된 존재라고들 한다. 그러니 부모를 향한 냉기가 사라지면, 진심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이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때, 멈춰 서서 밤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만은 완벽하게 흔쾌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아, 정말 감사한 일이구나.

    부희령
    ● 1964년 서울 출생
    ● 서울대 심리학과 중퇴
    ●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 저서: 소설집 ‘고양이소녀’ ‘꽃’ ‘구름해석전문가’, 산문집 ‘무정에세이’ ‘가장 사적인 평범’ 외






    에세이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