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간 영풍그룹 ‘한 지붕 두 가족’ 장·최
조상까지 동원한 ‘영끌’ 지분 매입
계열분리 사실상 불가능… 실익 없는 싸움 왜?
최家, 형제 경영 전통에 ‘지분 춘추전국’ 형세
“외부 적 만들어 불안한 내부 입지 다지기”
고려아연 “내부 갈등 없어”
2021년 최씨 3세 최윤범(48) 고려아연 회장이 경영을 맡으며 평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최 회장은 최기호 창업주의 손자이자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최 창업주의 장남)의 차남이다. 지난해 8월 고려아연 이사회가 ‘한화H2에너지 USA’를 대상으로 제3자 유상증자를 결의하면서 두 가문 간 지분 경쟁이 본격화됐다. 당시 한화H2에너지 USA는 4717억5050만 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최씨 일가에 힘을 보탰다는 게 정설이다. 최 회장과 김 부회장은 미국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전해진다.
갈수록 지분 매입 경쟁이 격화되는 모양새다. 경영권 다툼, 계열분리설이 왕왕 거론되지만 되레 업계에서는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작금의 지분 경쟁이 최씨 측에 사실상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최윤범 회장이 불안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스스로 경쟁 구도를 조성하고 있다고 바라본다. 외부의 적을 설정해 내부 결속을 다지고 향후 ‘최윤범계’가 주도하는 고려아연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왜?
업계 관계자들은 양 가문의 지분 매입이 해를 넘어서도 이어진 점을 근거로 댄다. 3월 17일 열릴 주주총회(주총)가 중요 분기점으로 여겨졌는데, 주주 명부 기준일이 지난해 말이라 올해 매수한 주식은 이번 주총에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양 측의 지분 매입이 단순히 주주총회를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특히 ‘현상 변경’을 꾀하려는 최씨 측 행보가 의구심을 갖게 한다. 경영권 방어가 목적이라면 굳이 지분을 늘릴 이유가 없다. 정확히는 공격받을 일이 없으니 방어에 힘쓸 필요가 없다. 지분 구조상 장씨 측이 고려아연을 소유한 형태긴 하지만 경영은 쭉 최씨 측이 해왔다. 장씨 측도 이를 존중해 경영권을 위협하지 않았다. 또 고려아연을 세계 1위 아연 제련 업체로 발돋움시킨 경영 공로도 인정받고 있는 터라 경영권을 지키기란 어렵지 않다. 현 이사회도 최씨 측에 유리하게 구성된 상태다. 3월 17일 주총에서 논의될 새 이사진 후보에도 박기덕 고려아연 사장, 박기원 온산제련소장, 최윤범 회장의 사촌 최내현 켐코 대표 등이 올라 있다. 큰 차질 없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된다.
계열분리를 생각하고 있다 해도 실현 가능성은 낮다. 최씨 측이 고려아연을 영풍그룹에서 떼어내려면 장씨 일가의 지분을 3% 미만으로 줄이고 임원 겸임을 없애야 한다. 3월 10일 기준 고려아연 시가총액(10조5627억 원)을 고려하면 최씨 측에겐 3조 원가량의 현금이 필요하다. 철강업계 관계자 A씨는 “계열분리설이 왕왕 나오지만 사실상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단순 계산만 해도 약 3조 원이 필요한데, 장씨 측이 제 가격에 팔 리가 없다. 프리미엄을 붙일 것을 감안하면 필요 자금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최씨 측에게 그만한 자금을 동원할 여력은 없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설령 최씨 측이 그만한 자금을 확보한다고 해도 장씨 측이 지분을 팔지 않겠다고 하면 뚜렷한 방법이 없다. 2020년 기준 고려아연은 영풍그룹 전체 매출 가운데 76.8%를 차지한 핵심 계열사다. 장씨 측은 고려아연으로부터 톡톡히 배당수익을 얻어왔다. 장씨 측이 지배하는 영풍은 고려아연의 최대주주로서 5년간(2018~2021) 배당금 2967억 원을 받았다. 전체 배당 수익의 97.2%를 차지한다. 같은 기간 영풍 당기순이익 합계(2059억 원)를 넘어서는 액수다. 철강 분야 애널리스트 B씨는 “장씨 측에게 고려아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다. ‘안 팔면 그만’인 상황인데, 놓아줄 이유가 전혀 없다. 장씨 측이 추가로 지분을 사들인 점을 감안하면 고려아연 사수 의지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씨 일가가 이를 모르진 않으련만 굳이 왜 양가 간 갈등 구조를 만든 건지 의아하다”고 말했다.
“형제도 싸우는데, 4촌·6촌 경영이 되겠나”
경영권은 애초에 뺏길 것이 아니고, 계열분리는 어렵다. 최윤범 회장의 진의가 ‘입지 강화’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 최씨 일가 ‘형제 경영’ 원칙으로 인한 최 회장의 낮은 지분율이 근본적 원인으로 거론된다.최씨 일가는 최기호 창업주의 뜻 아래 2대까지 고려아연을 형제 경영해 왔다. 최창걸(82) 명예회장이 처음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뒤를 최창영(79) 명예회장, 최창근(76) 명예회장이 차례로 이었다. 2대를 순회한 후 3대 최윤범 회장에게 자리가 이어진 셈이다. 서로 돌아가며 자리를 맡다 보니 지분도 골고루 나눠 가졌다. 우애가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절대 강자가 없다는 점은 언제든 갈등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최윤범 회장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1.72%에 불과하다. 아버지 최창걸 명예회장과 어머니 유중근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아내 이경은 씨등 집안 지분율을 합쳐도 2.46%에 그친다. 작은 아버지 최창영 명예회장 집안의 지분율이 3.76%로 더 높다.<표2 참고> 장형진 영풍 고문(장병희 창업주 차남) 아래 장남 장세준 코리아써키트 대표, 장세환 서린상사 대표에게로 일찌감치 승계를 마친 영풍과는 대조적이다.
최씨 일가 장손이자 최윤범 회장의 형 최우현 씨(데이비드 최) 사례도 거론된다. 2009년 2월 최 씨는 당시 영풍정밀 최대주주(23.94%)로서 이사회 진입을 시도했다. 이때 일반적 경우인 이사회 추천이 아니라 주주제안권을 이용, 자신을 ‘셀프 추천’해 눈길을 끌었다. 뜻을 이루진 못했다. 1367만7698주 중 최 씨가 확보한 표는 약 418만 주로 약 30%에 불과해 이사회 진입에 실패했다. 당시 장·최 두 가문의 지분이 75%에 달한 것을 감안하면 가문 차원에서 최 씨를 막아선 것이다. 최 씨는 이후 지분을 모두 처분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철강업계 관계자 D씨는 “대개 가문의 일원은 일부러라도 이사회에 진입시키는 게 보통이다. 스스로 들어가려고 시도한 것부터 특이하지만, 이를 가문 사람들이 부결했다는 건 더 특이하다. 가문의 장손임을 감안하면 뭔가 껄끄러운 문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최윤범 회장 취임 후 유독 스스로의 경영 성과를 강조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실력’을 내세워 입지를 다지려는 듯하다. 최 회장이 내세우는 신재생·그린수소 에너지와 2차전지 소재산업, 리사이클링 자원순환 이른바 ‘트로이카 드라이브’도 같은 이유라고 본다. 기업에서 ‘형제의 난’도 종종 벌어지는데, 4촌·6촌은 거의 남이나 다름없다. 돌아가며 경영을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최윤범 회장은 일차적으로 장씨 측과 지분 경쟁 구도를 만들어 내부 결속을 다지고, 계열분리 등을 염두에 둔 장기적 관점에선 가문 내 주도권을 굳혀 최윤범계 일원화를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아연 “장씨 간섭 배제用, 내부 문제없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업계가 바라보는 시각이 그럴듯하지만 사실과는 다른 점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지난해부터 최씨 측이 지분을 매입한 의도는 장씨 측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두 일가 모두 제련업에 임하고 있다 보니 지분이 더 많은 장씨 측이 거래 관계 등 여러 부분에서 이런저런 간섭을 해왔다. 이를 줄이기 위해 최씨 측이 ‘강경 대처’한 것에 가깝다. 내부 문제도 없다. 최창걸 명예회장과 최창영 명예회장의 경영 시각이 달랐던 건 사실이지만 단순한 견해 차이 정도였을 뿐 갈등이 있었던 건 아니다. 형제 간 우애가 워낙 좋아 한 사람이 아프면 나머지 형제들이 매일 병문안을 갈 정도다. 최우현 씨 경우 개인의 일탈일 뿐 가문 내 껄끄러운 문제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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