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한 지붕 두 가족’, 최윤범 회장 등극 후 균열
한화·LG·현대차 참전으로 崔 지분 역전
유상증자 이사회만 불참하며 불편한 심기 드러낸 장형진
“계열분리? 張이 황금알 낳는 거위 포기할 리가”
지분 경쟁 崔 내부 결속 수단으로 보는 시선도
兩家 전면전 확산 가늠쇠 = 영풍정밀
[Gettyimage, 고려아연]
지분을 통한 견제와 상호 영역 존중 아래 두 가문은 평형을 이뤄왔다. 2021년 최 씨 3세 최윤범(48) 고려아연 회장이 경영을 맡으며 구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최 회장은 최기호 창업주의 손자이자 최창걸(82) 고려아연 명예회장(최 창업주의 장남)의 차남이다. 지난해 8월 고려아연 이사회가 ‘한화H2에너지 USA’를 대상으로 제3자 유상증자를 결의하면서 두 가문 간 지분 경쟁이 본격화됐고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당시 한화H2에너지 USA는 4717억5050만 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최 씨 일가에 힘을 보탰다는 게 정설이다. 최윤범 회장과 김동관 부회장은 미국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전해진다.
崔, 한화·LG·현대차 友軍 삼아 勝機 잡다
장형진 영풍 고문(왼쪽).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영풍, 고려아연]
그동안 최 씨 일가는 다시 한화, 이어 LG를 끌어들이며 판을 키웠다. 같은 해 11월 11월 한화가 보유한 자사주 7.3%와 고려아연의 자사주 1.2%를 맞바꿨다. LG화학엔 자사주 1.97%를 주고 자사주 0.47%를 받았다. 일반적으로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타사로 넘어가면 의결권이 다시 생긴다. 한화와 LG화학을 ‘우군’으로 확보한 셈이다. 이외에도 최 씨 일가는 한국투자증권, 세계 2위 원자재 거래 기업 트라피구라에 자사주를 넘기는 등 꾸준히 우호 지분을 늘렸다. 해를 넘겨서도 두 가문의 지분 매입은 이어졌다. 지난해 12월 하순부터 올해 2월 초까지 약 두 달간 두 가문이 매입한 고려아연 지분은 약 660억 원어치다.
3월 17일 주주총회 이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가 근래 다시 불이 붙은 모양새다. 최윤범 회장이 불을 댕겼다. 우선 8월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유상증자를 진행해 우군으로 확보했다. 유상증자 규모는 약 5200억 원으로 고려아연 지분 5% 상당이다. 또 9월 5일부터 18일까지 8차례에 걸쳐 약 60억 원을 들여 1만1915주를 사들이며 지분율을 끌어올렸다.
8월 30일 서울 강남구 파르나스타워에서 김흥수 현대차그룹 GSO(Global Strategy Office) 담당 부사장(왼쪽)과 박기덕 고려아연 사장이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 사업제휴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그럼에도 승기는 최 씨 측으로 다소 넘어간 상황이다. 유상증자를 통해 현대차그룹이 최 회장의 우군으로 가세한 영향이 컸다. 6월 30일 기준 장 씨 측 지분은 32.91%, 최 씨 측 지분은 28.86%였는데, 유상증자로 지분율이 희석돼 각각 31.26%, 27.41%가 됐다. 이 상태에서 현대차그룹의 5%가 최 씨 측에 더해져 역전된 것. 지난해 8월 지분 경쟁 본격화 전 장 씨 측 지분율이 최 씨 측 지분율보다 약 10%포인트 더 높았던 것을 감안하면 최 씨 측이 무서운 기세로 지분율을 끌어올린 셈이다.
崔 대규모 차입 못마땅한 張
장 씨 측으로선 달가울 리가 없다. 지금껏 함께해 온 최 씨 측이 노골적으로 독립·분리 의사를 드러낸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장 씨 측의 필두 장형진 고문은 이사회 불참을 통해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장 고문은 고려아연 이사회에 항상 참석해 왔는데, 유독 지난해 한화그룹, 올해 현대차그룹에 대한 유상증자를 결의하는 이사회엔 불참했다. 유상증자가 결국 최 씨 측의 지분을 높이고, 장 씨 측의 지분을 희석시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최윤범 회장의 자금 차입에 있다는 것이 업계 평가다.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영풍그룹은 두 창업주의 창립으로부터 지켜온 원칙이 하나 있다. ‘남의 돈 끌어다 일 벌이지 않기’다. 최윤범 회장은 회장 취임 후 신재생에너지, 2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자원 순환) 사업을 골자로 하는 신사업 ‘트로이카 드라이브’를 적극 추진하면서 대규모 차입금을 들여왔다. 6월 말 기준 고려아연 차입금 규모는 총 1조575억 원이다. 2021년 말 4460억 원이던 것에 비해 약 2.3배 늘었다. 이는 1993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역대 최대치 수준이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신재생에너지, 2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자원 순환) 사업을 골자로 하는 신사업 ‘트로이카 드라이브’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이 가운데 2차전지 소재 사업 밸류체인. [고려아연]
이에 대해 고려아연 관계자는 “영풍과 고려아연은 장 씨 일가와 최 씨 일가가 동업을 시작한 이래로 고유 영역을 설정하고 각자 체제로 운영됐다. 단순히 지분 구조만을 보며 누가 소유하고, 경영을 맡기는 개념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업 정신과 상호 존중 속에서 서로가 각자의 영역을 운영해 온 것”이라고 반박했다.
“계열분리 가능성 희박”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전경. [고려아연]
그러나 현실화되진 않으리라는 게 중론이다. 최 씨 측이 고려아연을 영풍그룹에서 떼어내려면 장 씨 일가의 고려아연 지분을 3% 미만으로 줄이고 임원 겸임을 없애야 한다. 10월 9일 기준 고려아연 시가총액은 10조2138억 원이다. 즉 3조 원가량 현금이 필요하다. 대규모 차입을 들이고 있는 상황에 이만한 현금을 갖고 있을 리 없다. 철강업계 관계자 B씨는 “계열분리설이 왕왕 나오지만 사실상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단순 계산만 해도 약 3조 원이 필요한데, 장 씨 측이 제 가격에 팔 리가 없다. 프리미엄을 붙일 것을 감안하면 필요 자금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최 씨 측에 그만한 자금을 동원할 여력은 없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설령 최 씨 측이 그만한 자금을 확보한다고 해도 장 씨 측이 지분을 팔지 않겠다고 하면 뚜렷한 방법이 없다. 현재로선 장 씨 측이 핵심 계열사 고려아연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2020년 기준 영풍그룹 전체 매출 가운데 고려아연의 매출 비중은 76.8%에 이른다. 5년간(2018~2021) 장 씨 측이 고려아연을 통해 얻은 배당금만 2967억 원으로 전체 배당 수익의 97.2%를 차지한다. 한 철강 분야 애널리스트는 “장 씨 측에게 고려아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다. ‘안 팔면 그만’인 상황인데, 놓아줄 이유가 전혀 없다. 장 씨 측이 추가로 지분을 사들인 점을 감안하면 고려아연 사수 의지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도대체, 왜?
일각에서는 최윤범 회장의 진의가 스스로의 ‘입지 강화’에 있다고 바라본다. 최 씨 일가 ‘형제 경영’ 원칙으로 인한 최 회장의 낮은 지분율이 근본적 원인으로 거론된다. 최 씨 일가는 최기호 창업주의 뜻 아래 2대까지 고려아연을 ‘형제 경영’ 해 왔다. 최창걸 명예회장이 처음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뒤를 최창영(79) 명예회장, 최창근(76) 명예회장이 차례로 이었다. 2대를 순회한 후 3대 최윤범 회장에게 자리가 이어졌다.서로 돌아가며 자리를 맡다보니 지분도 골고루 나눠 가졌다. 우애가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절대 강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언제든 갈등이 빚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셈이다. 9월 26일 기준 최윤범 회장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1.73%에 불과하다. 아버지 최창걸 명예회장과 어머니 유중근 경원문화재단 이사장(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아내 이경은 씨의 지분율을 합쳐도 2.1%에 그친다. 작은아버지 최창영 명예회장 집안의 지분율이 3.2%로 더 높다. 장형진 고문 아래 장남 장세준 코리아써키트 대표, 차남 장세환 서린상사 대표에게로 일찌감치 승계를 마친 영풍과는 대조적이다.
실제 최 씨 일가 안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한 전례도 있다. 철강업계 관계자 C씨는 “경제학을 전공한 최창걸 명예회장과 달리 최창영 명예회장은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그래서인지 경영 방향에서 둘의 생각이 달랐다. 의견 충돌이 종종 있었던 건 업계에서 유명한 사실”이라면서 “고려아연이 지금의 입지를 구축한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최창영 명예회장으로 여겨진다. 최창걸 명예회장의 아들인 최윤범 회장으로선 다소 불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씨 일가 장손이자 최윤범 회장의 형 최우현 씨(데이비드 최) 사례도 거론된다. 2009년 2월 최 씨는 당시 영풍정밀 최대주주(23.94%)로서 이사회 진입을 시도했다. 이때 일반적 경우인 이사회 추천이 아니라 주주제안권을 이용, 자신을 ‘셀프 추천’해 눈길을 끌었다. 뜻을 이루진 못했다. 1367만7698주 중 최 씨가 확보한 표는 약 418만 주로 약 30%에 불과해 이사회 진입에 실패했다. 당시 장·최 두 가문의 지분이 75%에 달한 것을 감안하면 가문 차원에서 최우현 씨를 막아선 것이다. 최우현 씨는 이후 지분을 모두 처분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철강업계 관계자 D씨는 “대개 가문의 일원은 일부러라도 이사회에 진입시키는 게 보통이다. 스스로 들어가려고 시도한 것부터 특이하지만, 이를 가문 사람들이 부결시켰다는 건 더 특이하다. 가문의 장손임을 감안하면 뭔가 껄끄러운 문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어 D씨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최윤범 회장 취임 후 유독 스스로의 경영 성과를 강조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실력’을 내세워 입지를 다지려는 듯하다. 기업에서 ‘형제의 난’도 종종 벌어지는데, 4촌·6촌은 거의 남이나 다름없다. 돌아가며 경영을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최윤범 회장은 일차적으로 장 씨 측과 지분 경쟁 구도를 만들어 내부 결속을 다지고, 계열분리 등을 염두에 둔 장기적 관점에선 가문 내 주도권을 굳혀 최윤범계 일원화를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또 다른 고려아연 관계자는 “그럴듯한 분석이지만 사실과는 다른 점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최 씨 측이 지분을 매입한 의도는 장 씨 측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분이 더 많은 장 씨 측이 거래관계 등 여러 부분에서 이런저런 간섭을 해왔다. 내부 문제도 없다. 최창걸 명예회장과 최창영 명예회장의 경영 시각이 달랐던 건 사실이지만 단순한 견해 차이 정도였을 뿐 갈등이 있었던 건 아니다. 형제간 우애가 워낙 좋아 한 사람이 아프면 나머지 형제들이 매일 병문안을 갈 정도다. 최우현 씨 경우 개인의 일탈일 뿐 가문 내 껄끄러운 문제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張이 영풍정밀 지분 사면 전면전 선언인 셈”
최 회장의 진의가 무엇이든 최 씨 측으로선 신사업을 하고 싶고, 장 씨 측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에 각자 뜻을 더 관철하기 위해 지분을 늘리며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 지분 경쟁의 본질인 셈이다.내년 3월 주주총회를 기점으로 장형진 고문과 최윤범 회장 모두 이사 임기가 만료된다. 양가의 지분 경쟁이 극단 상태에 이르면 최악의 경우 어느 한쪽이 이사회에서 쫓겨나게 될 수 있다는 점도 서로가 더더욱 물러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계열사 ‘영풍정밀’이 향후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가늠쇠로 지목된다. 양가의 갈등이 ‘극단 상태로 가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회사다. 영풍정밀은 고려아연 지분 약 1.8%를 보유하고 있다. 이곳을 지배하면 고려아연 지분 1.8%가량을 얻는 셈이다. 9월 19일 기준 유중근 이사장이 가장 많은 지분 (6.27%)을 보유하는 등 최 씨 일가가 지배하고 있다. 장형진 고문은 지분 5.71%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는 회사인 만큼 최 씨 일가는 꾸준히 지분을 사고 있는데, 장 씨 측은 움직임이 없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장형진 고문이 영풍정밀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마지막 선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근거는 이렇다. 영풍정밀의 시가총액이 약 2200억 원이고, 최 씨 측의 지분이 장 씨 측의 그것보다 10%가량 많은 상황이다. 장 씨 측이 약 200억 원만 들이면 영풍정밀을 지배할 수 있고, 그럴 만한 현금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 장형진 고문의 머릿속엔 ‘영풍정밀을 건드리는 순간 양가의 지분 경쟁이 전면전으로 커지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는 의미다.
그간 최 씨 측과 장 씨 측은 이러한 경쟁에 대해 대외적으론 “경영활동의 일환일 뿐”이라며 갈등 사실을 부인해 왔지만 이젠 미묘하게 달라졌다. “갈등이 있다”고 말하진 않지만 “갈등이 아니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더는 부인하기가 민망할 만큼 상황이 심화됐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업계에선 지분 경쟁이 최소 올해 연말까진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 대한 주주명부폐쇄일이 12월 말 무렵이기 때문이다. 이제 숨길 수도, 부인할 수도 없을 만큼 양가의 갈등이 표면화한 상황. 이들의 동행이 74년간 이어져온 것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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